아카시 꽃 피는 계절, 통일꿀을 상상하다

신경림의 시 '끊어진 철길'과 남북 통일꿀이 만들어진 그날

등록 2020.06.19 14:10수정 2020.06.19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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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 이승숙


지난 5월 말 강화 양사면의 평화전망대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남편의 눈이 자꾸 양사면 철산리의 동네 뒷산으로 갔습니다.


"벌치는 사람 눈에는 아카시 꽃 밖에 안 보여. 저 산에 꽃이 참 많이 피어 있네."

남편은 활짝 핀 아카시 꽃이 아까운지 자꾸 산 쪽으로 눈길을 주었습니다. 벌치는 사람들에게는 아카시 꽃이 필 무렵이 일 년 중에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꿀의 약 70%를 아카시 꿀이 차지할 정도이니 아카시 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만합니다. 양봉가들은 일 년 벌 농사를 아카시 꽃이 피는 근 열흘 동안 다 하는 셈입니다.

만약 날씨 문제 등으로 아카시 꽃이 덜 피기라도 하면 우리나라 벌꿀 생산량에 차질이 생깁니다. 꽃봉오리가 생길 때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 냉해를 입는다거나 아니면 한창 활짝 피었을 때 비가 오면 아카시 꿀 수확량이 확 떨어집니다.  
  
그러니 비라도 오면 큰일입니다. 벌이 한창 꿀을 물고 와야 하는데 비가 오면 벌은 바깥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또 비를 맞고 꽃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양봉가들은 일기예보에 신경을 쓰며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부터 살피는 게 일입니다.  
   
아래 지방에서는 아카시 꽃봉오리가 막 나올 무렵에 날씨가 들쑥날쑥 해서 꽃이 제대로 피지 못했다고 합니다. 활짝 만개해야 꽃의 꿀샘이 열리는데 그렇지 못하니 아카시 꿀 수확량이 예년의 절반 수준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강화도는 아카시 꽃이 절정일 때 날이 맑고 기온도 높았습니다.
 

강 건너 황해도의 산이 보입니다. ⓒ 이승숙

 
평화전망대는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 시설물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혼돈의 시대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일상이 흐트러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강 건너 북녘 땅의 사람들은 어찌 살고 있을까요. 우리처럼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을까요. 설마 마스크가 부족해서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강 건너 북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에도 아카시 꽃이 피었을 것입니다. 아카시 꽃향기가 풍겨올 북녘 땅을 그려보았습니다. 북쪽의 벌을 치는 사람도 남쪽의 우리처럼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겠지요.


"비야 비야, 오지 마라. 아카시 꽃이 질라, 비야 오지 마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빌고 있지는 않을까요. 달콤한 아카시 꽃꿀을 수확해 들어오는 꿀벌을 보며 흐뭇해 할 모습도 그려졌습니다. 
   
"황해도 땅이 건너다보이는 이쪽에 벌통을 두면 남쪽 꿀벌과 북쪽 꿀벌이 만날 수도 있겠네. 그러면 통일 꿀이 생산되는 거야. 그래, 통일 꿀이네 통일 꿀이야. 남북의 꿀벌이 하나가 되어 만든 통일 꿀이네."
 

ㅇㅇ ⓒ 이승숙

 
강 건너 북녘 땅을 바라보던 남편이 꿈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턱도 없는 소리였지만 듣노라니 설렜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강화도와 황해도 사이에 조강이 흐르니 벌은 날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영 가망 없는 말은 아닙니다. 두 양안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은 1.8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조금 먼 곳이라고 해도 2.4킬로미터 정도 된다고 하니 그 정도 거리라면 벌이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가까운 곳에 꽃이 있는데 부러 강을 건너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꿀벌의 이동 거리가 평균 2킬로미터나 되고 어떤 경우에는 4킬로미터까지도 날아간다고 하니 어쩌면 남녘과 북녘의 꿀벌이 서로 오갈 수도 있습니다.

남과 북의 꿀벌이 만나 통일 꿀을 만든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듣노라니 문득 시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신경림 시인이 쓴 '끊어진 철길'이란 시입니다.
    
끊어진 철길 -철원에서
신경림

​끊어진 철길이 동네 앞을 지나고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민통선 안 양지리에 사는 농사군 이철웅씨는 
틈틈이 남방한계선 근처까지 가서 
나무에서 자연꿀 따는 것이 사는 재미다 
사이다병이나 맥주병에 넣어두었다가 
네댓 병 모이면 서울로 가지고 올라간다 
그는 친지들에게 꿀을 나누어주며 말한다 
"이게 남쪽벌 북쪽벌 함께 만든 꿀일세 
벌한테서 배우세 벌한테서 본뜨세" 
(아래 생략)


이 시를 만났을 때 가슴이 떨렸습니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라니요. 더구나 기차를 타고 금강산을 갔다니 설렐 수밖에요. 게다가 남북의 꿀벌이 만나 만든 꿀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벌들의 세계에 남이 있으며 북이 또 있을까요. 민통선 마을에 피는 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을 타고 꽃씨들이 날아가고 날아올 것입니다. 벌들은 남과 북을 구분하지 않고 꽃을 찾아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남쪽의 꽃이 다르고 북쪽의 꽃이 또 다를까요. 같은 땅에서 나는 같은 꽃이고 또 꿀입니다. 벌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벌을 보고 본뜨야 합니다.

"이보게, 벌에게서 배우세, 벌을 본 뜨세. 싸우지 말고 함께 사세."

남쪽의 꿀벌과 북쪽의 꿀벌이 만나 함께 달콤한 꿀을 만들 듯이 사람들도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걸까요. 이념이 어떻고 조건이 어떻고 할 것 없이, 좋은 게 생기면 나눠주고 싶은 그 고운 마음처럼 한 민족 한 겨레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보듬고 안아주면 안 될까요.

강화 양사면의 산에는 아카시 꽃이 활짝 피었다가 졌습니다. 잉잉대며 꿀을 따던 벌들의 노래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 또 다른 꽃이 피었습니다. 밤나무 꽃향기가 비릿하게 전해져 옵니다.
 

철책으로 막혀 있는 조강과 강 건너 북녘 땅. ⓒ 이승숙

#아카시아꿀 #밤꿀 #통일꿀 #금강산가는길 #끊어진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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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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