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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영화관, 이걸 못해서 실패했습니다

[놀면 뭐하니?] 잡안에 '나만의 영화관'을 만들다

등록 2020.07.25 11:36수정 2020.07.25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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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콕'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남들은 뭐하고 노는지 궁금했습니다. 아직 출구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 시대. 바이러스에 굴하지 않고 시간을 견디며 '제대로' 노는 방법을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역시, 아인슈타인은 옳았다! 지난 2월 이후로 내 생활의 영역은, 걸어서 30분 이내의 거리로 엄청나게 응집되었다. 집과 일터뿐인 내 조그만 행성에서의 시간은 어마어마한 중력이 잡아 끄는 듯 아주 천천히 흘러 갔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매일 보는 동료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제한적이었다.

친구들과의 만남도 쉽지 않은 데다, 다양한 취미 생활에도 제약이 걸리니,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버티는 것이 절대 쉽지 않았다. 제일 힘든 건, 내 중요한 취미 생활 중 하나인 극장에 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지역의 작은 독립영화관 프로그램은 놓치지 않는 관객이었고, 친구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영화를 보는 모임도 운영하는 영화 마니아인데... 코로나19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 결심했어, 빔 프로젝터를 사야지
 

베란다를 정리한 후! 창고처럼 방치되었던 베란다를 정리하고, 화분을 몇 개 들여 놓았습니다. 하루 종일 태양빛을 받고나면, 저녁에 짠~하고 불도 환하게 켜져요. 원래는, 이 곳에 영화관을 만들고 싶었는데, 결국은 스크린을 설치하지 못해서 실패했네요. ⓒ 이창희


이러다간 내 삶에서 2020년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잡혀먹히기 직전, 상황을 타개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4월쯤이었다. 때마침 넷플릭스에서는 마이클 조던과 전성기 시카고 불스의 이야기인 <라스트 댄스>를 예고하고 있었고, 마이클 조던의 플레이를 조그만 스마트폰 화면에서 볼 수 없다면서 결심한 것이 '빔 프로젝터'였다.

"빔 프로젝터를 사자! 영화관을 만드는 거야."

때마침, 집에서만 살아야 하는 2개월 정도의 시간 동안 폐허로 방치되었던 베란다도 치워 놓았다. 여기에 빔프로젝터와 스크린만 설치하면 한여름 더위도 견딜 수 있을 근사한 야외 상영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루함과 무료함으로 고갈된 줄 알았던 에너지가 어디서 샘솟는지 나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진짜 살 거야? 내가 프로젝터 전문가인데, 추천해 줘?"


SNS에 결심을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조언과 응원, 걱정의 답글들이 연이어 올라왔다. 안 그래도 얼른 실행하고 싶어서 안달하던 중이었으니, 그중에서 '골라줄까?'라는 선배의 댓글이 제일 눈에 띄었다.

SNS의 댓글로는 부족한 조언들이 카카오톡 채팅으로 연결되었고, 예산과 활용 목적 등에 대한 대화가 이어진 후 '광학을 전공한 기계공학 박사'가 엄선한 '추천 모델' 메시지가 도착했다. 야호!

내가 원하는 프로젝터는 집 안에서 영화를 보기 위한 것이 주된 용도였고, 가끔 고향에 계신 엄마 집에 갈 때나 야외 소풍 등에도 들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격도 100만 원은 넘어가지 않았으면 했다.

선배가 골라주신 모델은 국내에는 아직 출시되지 않았기에 아마존에서 '해외 직구'를 했고, 제품 가격에 배송료, 관세까지 지불하고 났더니 대략 75만 원 정도 들었다.

그렇게 주문에 성공했을 때가 4월 말. 당시 뉴욕의 코로나19가 최악의 상황이었음에도, 나는 동부의 공항에서 배송되어야 하는 프로젝터 걱정만 하고 있었다(다시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다).

어쨋든 4월 28일에 주문한 프로젝터는 5월 7일에 뉴저지를 출발해서 5월 18일에 내 손에 들어왔다. 구입을 결심한 지, 정확히 3주 만이었다.

20년 된 시멘트 벽을 못 뚫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란다 영화관'은 실패로 끝났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오래된 아파트의 구조가 거의 비슷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베란다는 안방과 거실, 서재를 통과하는 좁고 긴 형태이다. 여기에 프로젝터를 비추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화면이 영사될 스크린이 없었다.

부랴부랴 베란다 폭을 재서 스크린을 주문했지만, 끝내 '20년 된 시멘트 벽에 못을 박는 것'을 뛰어넘지 못했다. 명색이 기계공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드릴 사용법'을 실전에서 쓸 수가 없다니(매뉴얼로만 배웠더니, 실전은 영 꽝이다).

베란다로 옮겨놓은 편안한 의자에 누워서 맥주 한 모금씩 홀짝이면서 <라스트 댄스>를 보고 싶었는데... 접었다. 대신 거실에서 비어 있는 벽에 비추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도 충분히 좋다! 
 

영화관은 거실로! 실패한 베란다 영화관 대신, 프로젝터는 거실의 비어있는 벽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라스트 댄스>를 보며, 90년대 초의 NBA에 대한 추억과 함께 제 20대의 추억도 자연스럽게 들어오네요. 야호, 만족스러워요! ⓒ 이창희


7월이 넘어가는 지금, 아주 천천히 세상이 넓어지는 중이다. 집과 회사뿐이던 행성에는 오래 쉰 후 다시 문을 열어준 극장도 문을 열었고, 동네 책방의 독서 모임도 다시 시작되었다.

6월 중순엔 오랜만에 영화모임 친구들과도 다시 만났으니, 답답하게 매여 있던 거대 중력도 조금은 지구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하지만, 코로나19의 불안은 여전히 일상을 무겁게 지배한다. 여전히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두렵고, 익숙하지 않은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코로나19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일상의 불안을 이겨내기엔, 작아져 버린 나의 행성을 지배하는 중력이 여전히 무거워 힘겹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의 시간은 코로나19를 핑계 삼지 않은 채 쉼 없이 흘러간다.

나도 이 시간을 살아내며 힘들지만 꾸준히, 새로운 일상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매번 성공적이진 않지만 시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엉뚱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행위마저 없다면, 2020년이 통째로 불안에 먹혀 버릴 테니 말이다. 자, 그럼, 이번엔 또 무엇을 해볼까.
#일상 비틀기 #베란다 영화관 #프로젝터 구매 #라스트댄스 #불안과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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