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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국수주의자'로 키운 것은, 8할이 야근이었다

고담하면서도 소박한 그 맛, 내가 국수에 빠지게 된 이유

등록 2020.07.22 08:54수정 2021.09.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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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국수 부평의 잔치국수 ⓒ 장순심


국수는 나의 취향이 아니었다. 우선 씹히는 것 없이 후루룩 넘기는 게 별로였다. 국물을 좋아하는지라 국물을 그득 삼키고 나면 이어지는, 영양가 없는 포만감도 싫었다. 이 외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국수를 기피했다.


반면 남편과 딸은 국수를 좋아했다. 주말마다 냄비로 하나 가득 국물을 만들고, 면도 500원 동전 너비보다 더 많이 삶았다. 큰 그릇에 면을 넣고 국물까지 부으면 저걸 언제 다 먹을까 싶은 양인데도 '맛있다'를 연발하며 마지막 국물까지 들이켰다. 간이 안 된 국수가 들어가면 뜨끈함도 없어지고 간도 옅어지는 국물 한 냄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족이 국수를 먹을 때 나는 고집스럽게 찌개에 밥을 먹었다.

그런 내가 면 종류를 찾게 된 것은 학교에 있을 때 야간자율 감독을 하며 늦게 오는 것을 밥 먹듯 하면서다. 집에 오면 굳이 먹을 것을 챙겨주는 살뜰한 남편은, 퇴근길에 지쳐 잠들까봐 데리러 오는 차 안에서 냉면이나 가락국수 등을 주문해 두고 찾아왔다. 

처음엔 준비해주는 성의가 고마워 그것들을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었다. 마음은 그래도 절반은 남아 버리기 일쑤였다. 버려지는 것이 민망하기도 했고, 배도 고프지 않으니 사 올 필요 없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때마다 남편은 수고가 미안해서 말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괜찮다고, 오는 길에 주문하고 찾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억지 반으로 시작된 면 먹기는 조금씩 양을 늘려갔고 더불어 뱃살도 늘려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사서 기다리는 것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내일은 무엇을 준비할까 묻는 질문에 메뉴를 고민하고 답하기도 했다. 더는 면이 싫지 않았다. 특히 겨울임에도 얼음이 사각거리는 시원한 냉면을 몇 번 먹은 뒤로는 냉면이 나의 최애 식품이 되어버렸다.

나는 어쩌다 '국수 맛집' 킬러가 됐나


이후로는 면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소면은 물론이고 두툼한 짜장면, 반죽한 것을 밀어 투박하게 써는 칼국수 면까지 가리지 않고 즐겨 먹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이전부터 면을 좋아했던 남편과 국수 맛집 투어를 하기 시작했다.

봉평에 가서는 메밀 면과 메밀묵을 먹었다. 올라오는 길에는 장칼국수 맛집을 찾았다. 시뻘건 고추장 국물이 아닌 된장에 시래기가 가득 들어간 장칼국수였다.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느껴지는 거북함이 장칼국수를 먹고 난 후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때부터 장칼국수는 국수 맛집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했다.
 

장칼국수 춘천 장칼국수 맛집 ⓒ 장순심


집 근처의 비빔국수와 잔치 국수는 이전부터 줄기차게 즐겼던 메뉴다. 표고버섯 향이 진하게 나는 육수는 뜨거운 것을 그냥 들이켜도, 면을 삶아 차가운 물에 헹궈 국물이 뜨끈함을 잃었을 때도 변함없이 맛있었다. 거기에 청양고추를 잘게 다진 것을 국물에 넣으면 뜨끈한 것에 얼큰함이 가미되어 맛이 한층 더 깊어졌다.

김포공항 근처를 지나다 보면 칼국수 맛집을 찾을 수 있다. 간판도 투박하게 '칼국수'라고만 써서 걸려 있다. 국수 종류는 없는 것이 없다. 아직 전 메뉴를 정복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칼국수가 으뜸이었다. 잔치 국수의 국물과는 또 다른 걸쭉한 국물에 단번에 빠져들었다. 

주인장 겸 주방장 한 명이 빠르게 회전하는 테이블 5개를 거뜬히 소화할 정도로 손이 빨랐다. 점심시간 직전인 11시 50분에 영업을 시작하지만, 이미 그전부터 손님은 대기 상태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시간을 잘 맞춰 간 날은 행운이라고 하며 먹고 나왔고, 시간을 잘 못 맞춘 날은 기다릴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며 먹고 나왔다.

부천역의 시장에 가면 간판이 역시 '국수집'이라고 세로로 걸린 국숫집이 있다. 그곳은 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단골 가게다. 물론 우리처럼 일부러 찾는 손님도 많은 것 같았다. 주문하고 10초만 카운트하면 음식이 나온다. 재래시장에 있어 가격도 저렴하다. 작은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만 매번 갈 때마다 자리는 빈틈이 없다. 저렴하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단골 맛집이다.

주말에 산행을 하고 내려오면 들르는 냉면집도 있다. 양념을 조금만 넣어도 입안이 얼얼해지는 매운맛이 일품이다. 맵다고 말하면서도 국물을 계속 들이켜게 만든다. 얼마 전 다녀온 서산 바닷가 근처의 식당에서 먹은 해물칼국수도 인상적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끝없이 나오는 해물의 향연. 간을 전혀 하지 않아도 해물의 맛만으로 국물이 시원했다. 역시 음식의 맛은 좋은 재료에서 나온다.
 

냉면 부천 매콤 냉면 ⓒ 장순심


엊그제는 인터넷 검색을 하다 우연히 어탕국수 맛집을 찾았다. 내비를 켜고 겨우 찾아간 집은 온데간데없고 다른 영업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블로그에 소개된 것이 벌써 3년 전. 시간을 생각하지 못한 실수였다. 소개된 가격을 보니, 가격을 너무 낮게 책정한 것이 영업 실패의 요인은 아닐까 아쉬운 마음이었다.

백석과 같은 마음을 공유한다는 것
 
     국수 
                 백석(1912~1996)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 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연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 아버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백석 시인도 국수를 좋아했던 것 같다. 시인의 말대로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 이것들이 동치미 국물이나 고깃국물과 만나 조화를 이룬 것. 시인이 생각한 '살틀하니 친한 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하지만, '고담(枯淡)'하면서도 '소박한 것'은 때론 그 어떤 음식보다 화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변화무쌍함을 시인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궁금하다.  
 

해물칼국수 서산 해물칼국수 ⓒ 장순심


백석 시인이 살았던 그때보다 국수는 더 다양해지고 여러 가지 색을 입는 것 같다. 그러나 국수 본연의 민낯은 그때와 다름이 없다. 그러니 백석 시인이 좋아했던 국수의 맛과 다르지 않은 것을 지금 내가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시인이 예찬했던 국수를 어제도 그제도 먹었다. 어떤 날은 하루 세 끼 중 두 끼가 국수로 채워지기도 한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매끈한 식감, 진한 국물을 양껏 들이켜면 남은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낼 수 있다.

국수 맛집 기행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얼마나 많은, 맛있는 국수를 만나게 될지도 벌써 기대가 된다. 시인이 살았던 때에 마을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던 국수는 지금은 나를 들뜨게 한다. 또 나중에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은 우리가 즐겼던 국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까 시를 읽으며 생각해 보기도 한다. 맛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만의 맛집 순위를 매겨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국수 맛집 #백석 <국수> #잔치국수 #장칼국수 #해물칼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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