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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의 '노동' 개혁이 한국판 뉴딜에 주는 함의

[한국판 뉴딜, 문제점과 대안 모색 5] ILO 협약 비준, 끝이 아닌 시작

등록 2020.08.25 13:59수정 2020.08.2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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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미국 실업률이 24.9%에 달했다. 1929년 10월 하순 '검은 화요일'로 미국 증시가 폭락할 때는 아무도 공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대공황이 발발하던 즈음 경제 전문가들은 공황이 발생할 리 없다고 믿었다. 

1929년 3월 취임한 후버 대통령은 국제 무역은 '보호주의'를, 국내 경제는 '자유방임주의'를 처방전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1929년 10월 '검은 화요일'이 닥치면서 후버 행정부의 자유방임주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철도와 전력 등 인프라 건설과 유지를 위해 정부 지출을 늘렸고, 연방준비은행은 이자율 인하를 발표했다. 1930년 초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은 1억 달러 농업 지원금을 승인하기까지 했다. 
 

1930년 12월 20일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실업부조법에 서명하는 후버 대통령. ⓒ hoover archive

 
1930년 말 실업률이 11%를 넘어섰고 1931년 중반 실업률이 15%를 돌파하면서 미국 경제가 침체를 넘어 공황으로 치닫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연방정부 재정이 적자로 돌아서자 후버 행정부는 '재정 건전성'에서 증세로 정책 방향을 선회했다. 1932년 6월 후버가 서명한 세법으로 고소득층에 대한 세율을 25%에서 63%로 세 배 가까이 인상됐고, 부동산보유세와 법인세도 덩달아 올랐다. 

후버 행정부의 시장 개입과 규제

1932년 실업률이 23%에 이르자 후버 행정부는 연방정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할 필요성을 받아들여야 했다. 재건금융공사, 연방주택대부은행, 연방예금보험공사가 만들어졌고, 중앙은행으로서 연방준비제도의 역할과 권한을 강화하고 은행의 금융업과 증권업 겸업을 금하는 '글라스-스티갈 법'이 통과되었다. 

후버 행정부는 노동 개혁에도 착수해야 했다. 1932년 3월 23일 황견계약(yellow-dog contract)을 불법화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은 채용 조건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는 행위를 강요하는 것을 금지했고, 사용자의 간섭 없이 노조를 설립할 자유를 명시했으며, 비폭력적 쟁의에 대한 연방법원의 불허 명령을 금지했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민간부문에만 적용되었고, 단체교섭권은 보장하지 않았다. 

1932년 6월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는 대의원 98%의 지지로 후버를 대통령 후보로 승인했다. 전당대회는 균형 재정에 당의 충성을 재천명했으나,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현실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7월 후버는 재건금융공사법을 강화한 긴급구호건설법에 서명함으로써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연방 정부가 공공근로 사업을 펼쳐 실업자 구제에 나설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재선이 유력시되던 후버는 7월 28일 1차 대전 참전 퇴역군인들로 실업자들이 주를 이룬 '보너스 육군(Bonus Army)' 시위에 군대를 동원해 강경 진압했고, 이를 계기로 후버 대통령의 인기는 급락했다. 


뉴딜 '노동 개혁'의 배후, 프란시스 퍼킨스

후버가 대통령에 당선된 1928년 11월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욕주지사에 당선되었다. 1929년 10월 증시가 폭락했을 때 후버 대통령과 다른 주지사들은 경제 위기가 가라앉으리라 전망했지만, 루스벨트는 주 정부 차원의 고용위원회를 설립했으며 주지사로서는 최초로 실업보험 정책을 입안했다. 1930년 5월 주지사 선거운동에 나선 루스벨트는 농민 지원, 완전고용 실현, 실업보험 도입, 고령자 연금을 공약으로 내걸어 승리했다. 재선 주지사로서 루스벨트는 임시 긴급 구호청을 설치하고 경제구호자금을 지원했다. 

뉴욕 주가 추진한 사회경제 정책은 1911년 뉴욕에서 여성 노동자 146명이 죽은 트라이앵글 블라우스 공장 화재 사건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뛰어든 프란시스 퍼킨스가 주도했다. 루스벨트에 의해 뉴욕 주 정부 산업정책관에 임명된 퍼킨스는 공장 근로 감독을 확대하고, 주 48시간 상한제를 도입하고, 최저임금제를 실시하고, 실업보험을 만들고, 아동노동을 금지했으며, 여성 노동자 보호 정책을 입안했다. 

1932년 7월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대통령 후보로 선정했다.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루스벨트는 "미국민을 위한 뉴딜"을 다짐했다. 1933년 3월 4일 루스벨트는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고, 상·하원 모두 민주당이 장악한 제73대 미 의회가 개원했다. 

바로 그날 아동노동 폐지, 고령자 연금 등 사회보장제, 실업보험, 노동조합 권리 확대, 최저임금제, 하루 8시간, 주 40시간, 산업재해 보상, 전국민건강보험 등 "미국에서 지금껏 존재한 적 없는" 정책을 가슴에 품은 퍼킨스가 연방정부 노동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이 된 퍼킨스는 1945년 4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노동부 장관을 맡게 된다. 

전국산업부흥법, 그러나 대법원의 위헌 결정

1933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100일 동안 루스벨트는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정책들을 쏟아냈다. 연방긴급구호청, 민간자원보존단, 농업조정청, 전국부흥청, 테네시계곡개발청이 이때 만들어졌다. 뉴욕 주 정부 때부터 호흡을 맞추었던 루스벨트와 퍼킨스는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의 지지 속에 임기 첫날부터 노동 개혁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935년 7월 5일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인 프란시스 퍼킨스 노동부장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국노동관계법에 서명하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 위키피디아

 
1933년 5월 17일 상정된 전국산업부흥법이 의회를 통과해 6월 16일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발효되었다. 전국산업부흥법은 경제 회복을 자극하기 위해 공정 임금과 공정 가격을 대통령이 규제할 권한, 공공근로청 설치를 통한 공공근로 사업, 노사 간의 공정 경쟁을 위한 노동조합 결성권 및 단체교섭권 보호를 주요 특징으로 했다. 하지만 이 법은 노동자의 권리로 단체교섭권을 부여하기는 했으나, 단체교섭을 사용자의 의무로 규정하지는 못했다. 

법에 따라 자유시장 경제의 낭비와 비효율은 개선하고 공정 경쟁을 증진하기 위해 출범한 전국부흥청에서 최저임금, 근로시간, 단체교섭권 등 노동 문제를 다뤘다. 당연하게도. 전국부흥청은 노사 양쪽으로부터 공격받았다. 사용자는 친노동적이라고, 노동자는 친사용자적이라고 비판했다. 

'와그너 법', 1935년 전국노동관계법

1935년 6월 대법원이 전국산업부흥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자, 루스벨트 행정부와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는 단체교섭권을 더욱 강화한 전국노동관계법으로 화답했다. 로버트 와그너 상원의원이 주도하여 '와그너 법'으로 불리는 전국노동관계법은 1935년 7월 6일 발효되었다. 

대법원에 의해 위헌 판정을 받은 전국산업부흥법의 노동조합 및 노사관계 부분을 계승한 이 법은 민간부문에서 사용자가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단체의 활동에 개입하는 것을 부당노동행위로 금지하고, 노동 문제와 노사 분쟁을 다루기 위해 전국노동관계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법적 토대가 되었다. 

이로써 연방정부가 노동권 보호와 노사 분쟁의 중재를 위해 노사관계에 개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특히 단체교섭권이 노동자의 권리이자 사용자의 의무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사용자의 단체교섭 거부를 부당노동행위로 규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 법은 관리자, 농업노동자, 가사노동자, 공무원, 독립계약자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1935년 사회보장법과 1938년 공정노동기준법

1935년 8월에는 사회보장법이 발효되었다. 노령자에 대한 현금 지원, 사회보장금 지급을 위한 재무부의 연방정부 계좌 이용, 실업보험, 부양 아동을 둔 가족 지원, 모성보호 및 아동 복지, 공공보건 서비스, 사회보장청 설립, 사회보장 재정 확보를 위한 임금 및 급여 원천 징수, 맹인 지원, 고용자와 장애인을 위한 건강보험, 그리고 고령자와 장애인 그리고 실업자를 위한 주 정부의 다양한 사회보장 지원 등의 내용을 담았다. 
 

1935년 8월 14일 사회보장법에 서명하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뒤로 사회보장법을 주도한 프란시스 퍼킨스 노동부장관이 서 있다. ⓒ 위키피디아

 
1936년 11월 3일 대통령선거에서 루스벨트는 뉴딜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효과를 톡톡히 보면서 투표자 60.8% 지지를 받아 압승을 거두었다. 또한 미 의회도 다시 민주당이 장악하였다. 선거 승리는 제2차 뉴딜을 가능케 하였다. 보수적인 대법관의 은퇴와 사망으로 대법원의 구성도 바뀌었다. 새롭게 바뀐 정치 지형에서 대법원이 전국노동관계법을 합헌이라 판결함으로써 개혁적 뉴딜 법안에 대한 사법적 사보타주는 막을 내렸다. 

1938년 1월 '임금∙근로시간법'이라 불린 공정노동기준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의회 내에서 격렬한 논의가 벌어졌고 법안 내용은 악화됐다. 10월 시행에 들어갈 때 최저임금은 시간당 40센트에서 25센트로, 주 근로시간은 40시간에서 44시간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하루 8시간, 연장근로 50% 할증, 18세 미만 아동의 위험한 일 종사 금지, 16세 미만 아동의 제조업 및 광업 종사 금지 등의 조항들이 살아남았고, 노동부 안에 임금시간국(Wage and Hours Division)이 신설되었다. 물론 관리직, 계절노동자, 농업노동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한계 때문에 제정 당시 법 적용 노동자는 44%에 그쳤다.

'노동 개혁', 후버와 루스벨트의 차별성

경제적 자유주의를 지향했던 후버 행정부는 경제 파국에 떠밀려 정부의 시장 개입, 금융 개혁, 기업 활동 규제, 세금 인상과 공공근로 사업을 통한 실업 구제 정책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루스벨트 뉴딜의 초석을 깔아주었다. 그런 점에서 루스벨트 뉴딜의 '지적 재산권'이 있다면 후버에게 돌려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과 사회보장에서만큼은 루스벨트 행정부의 차별성이 두드러진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연방정부가 실업 해결과 사회보장제도의 주체로 나섰다. 또한 전국노동관계법으로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이 노동자의 권리로 인정되었고, 공정노동기준법 제정을 통해 근로시간과 임금에 대한 규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퍼킨스 장관이 주도한 뉴딜의 노동 개혁에서는 국제노동기구(ILO)가 만든 국제노동기준이 나침반 역할을 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차 대전과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결과로 ILO는 창립총회가 열린 1919년 11월에만 6개 협약을 채택했다. 하루 8시간과 주 48시간(1호), 실업(2호), 모성보호(3호), 여성 밤일 규제(4호), 공업의 최저 근로 연령 제한(5호), 청소년 밤일 규제(6호)가 그것이다. 

루스벨트 행정부가 노동 개혁과 사회보장 강화에 박차를 가하던 1930년대 중반에 ILO는 이미 50개가 넘는 협약을 채택하고 있었다. 

뉴딜의 노동 개혁이 한국에 주는 시사점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지 3년을 넘었고, 지난 4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도적 의석을 차지한 지 100일이 지나가지만, 국제노동기준에 맞는 노동법 개정은 물론이거니와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보장을 규정한 ILO 기본협약조차 비준되지 않고 있다.  

노동 문제에서 루스벨트의 뉴딜은 대통령이 노동권 개선과 사회보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개혁가를 장관에 임명하고 그의 개혁 드라이브를 지지하고 추동하는 방식, 즉 선거에서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토대로 대통령과 여당이 앞장서는 방식으로 개혁을 집행했기에 가능했다. 개혁을 위해 루스벨트는 '사법 사보타주'를 일삼는 보수적 대법관을 갈아치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ILO 기본협약 비준과 국제 기준에 맞는 노동법 개정을 통한 노동권 개선은 비정규직을 비롯한 광범위한 노동자층의 처지를 개선해 문재인 정권하에서 개선되지 않고 있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강화함으로써 코로나19 이후 날로 악화되고 있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1944년 5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ILO) 연차총회에 참가한 대표단이 워싱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이 총회에서 ILO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퍼킨스 장관의 열렬한 지지 속에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labor is not a commodity)"를 기조로 하는 필라델피아 선언을 발표한다. ⓒ https://www.fdrlibrary.org/unions

 
뉴딜의 노동 개혁과 관련해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대목은 ILO 기본협약 비준이 노동 개혁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190개 ILO 협약 가운데 대한민국이 비준한 협약은 29개로 세계 꼴찌 수준이다. 심지어 1919년 만들어진 하루 8시간, 주 48시간의 1호 협약도 대한민국 정부는 비준을 거부하고 있다. 

루스벨트 뉴딜의 노동 개혁이 그러했듯, 한국의 노사정 3자는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노동기본권의 재확인에 불과한 기본협약 비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근로시간, 사회보장, 실업 구제, 산업안전, 모성보호, 근로감독, 이주노동자 보호 등 근로조건 개선과 관련된 ILO 기술협약(technical conventions)에 관심을 갖고 그 비준을 위한 행동에 즉각 나서야 한다. 1929년 대공황 시기에 그러했듯이, ILO 협약은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한국 사회가 나아갈 침로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윤효원 시민기자는 글로벌 인더스트리 컨설턴트입니다. 위 기고는 코로나19 사회경제 위기대응 시민사회대책위원회(코로나19시민대책위)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시민대책위는 전세계적 코로나19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대응하기 위해 모인 약 350여 개의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 기구입니다. 코로나19시민대책위의 활동 자료는 홈페이지에서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 : covid19socio.tistory.com
#한국판뉴딜 #대공황 #루즈벨트 #노동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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