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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으로 사과 긁어주던 할머니, 나는 참외를 긁네

손주를 아끼던 마음으로 주시던 간식... 뿌리내린 대물림 사랑

등록 2020.08.25 08:14수정 2020.12.0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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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머니와 할머니 운천(지금의 동두천)장에서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의 사돈, 할머니가 함께하셨다. ⓒ 박진희

 
내 증조할머니께서는 병석에서조차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분이란다. 꼬장꼬장하셨던 그분이 첫 증손주를 얻고는 곧잘 어부바를 하고 마실을 다니셨을 때의 일이다. 좀처럼 없던 일에 동네 아낙들이 몰려와 "증손녀가 참! 이쁘네요" 인사치레를 건네면 그리도 기꺼워하셨단다. 허나 자칫 볼이라도 쓰다듬었다가는 "경우 없는 여편네가 남의 집 귀한 증손녀 몸에 손을 댔다"라며 석 달 열흘을 노여워하셨다고 한다.


증조할머니께서 증손주들을 얼마나 예뻐했는지 기억에 없는 옛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 또한 손주 사랑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분이다. 할머니께서는 살아생전 긴 흥정 끝에 사 온 사과를 손주들 입가심용으로 내곤 하셨다. 그때마다 꼭 반으로 갈라 씨를 발라내고는 숟가락으로 독독 긁어 주셨다.
 

수 많은 과일 중에서도 사과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 박진희

 
목을 길게 빼고 제 차례를 기다리던 손주들은 긁기가 무섭게 곱게 갈린 사과를 낼름 입 안에 넣어댔다. 어른들이 따로 가르쳐 준 적은 없는데, 재미있게 먹는 법은 어찌 또 알았을까? '앙' 다문 이빨 사이로 사과즙을 짜서 삼키고는 탈수된 과육을 꼭꼭 씹으면, 사각사각 소리까지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코로나19로 등교가 미뤄지면서 맞벌이 하는 여동생네 아들, 딸을 돌보게 되었다. 그 옛날 할머니에게 받았던 사랑을 어린 조카들에게도 나눠주고 싶어서 계절 과일인 참외를 같은 방법으로 먹여보고 싶었다. 

반으로 잘라 속을 차게 하는 참외씨는 발라내고, 원을 그리듯 속살을 긁어내 입 안에 넣어 주었다. 엄지를 여러 차례 치켜세우며 칼로 숭덩숭덩 잘라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단다. 그럼 그렇지! 손목이 시큰하도록 참외를 긁은 보람이 샘솟는다.
 

참외를 반으로 잘라 속을 파내고 과육을 긁는다. ⓒ 박진희

  

참외는 껍질이 찢어질 때까지 긁는다. ⓒ 박진희

 
어느 날, 설거지를 하다 보니 비닐봉지에 붙어 참외 싹이 살포시 올라와 있다. 참외를 얼마나 많이 먹었으면 어디서 튀어 들어갔는지도 모를 참외씨가 싹을 틔웠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재활용하려고 씻어놓은 비닐봉지 안에서 참외 씨가 싹을 틔웠다. ⓒ 박진희

  

참외 씨가 싹 틔운 게 신기하여 화분에 옮겨 심어 보았다. ⓒ 박진희

 
나 역시 참외씨가 싹 튼 건 처음 보는지라 신기하여 화분에 옮겨 심어 보았다. 제대로 자라 줄 리 만무하지만, 혹여 떡잎이라도 보게 될 즈음엔 참외 킬러 조카들과 추억 하나를 더 만들 작정이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장맛비가 드디어 꼬랑지를 내렸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공주 오일장에 장 보러 오는 사람들이 몰리는 때와 맞물렸다. 고사리손 양옆으로 잡고 그 옛날 할머니 손잡고 구경 다니던 싸전이며 국수골목에 동행해 봐야겠다.
#운천 #오일장 #공주오일장 #공주산성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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