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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쟁이로 몰아 제거 음모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27회] 정약용은 오래 전부터 정적들에게 표적이 되어왔다

등록 2020.09.26 14:11수정 2020.09.2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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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가 세운 한국가톨릭교회 1779년, 이벽, 이승훈, 권철신·일신 형제, 정약전·약종·약용 형제 등이 함께 하면서 한국가톨릭교회의 기원이 된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 복원도(천주교 천진암 성지 홈페이지 갈무리). ⓒ 정중규

 
정약용은 오래 전부터 정적들에게 표적이 되어왔다.

우수한 두뇌와 개혁성향 그리고 임금의 총애때문이다. '표적'을 찾던 세력에게 그의 주변은 먹잇감인 천주쟁이들로 가득찼다. 1791년(정조 11년) 전라도 진산에 사는 선비 윤치중과 권상연이 부모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진산사건'이다.

두 사람은 공주감영으로 압송되고 정조는 이들에게 사형을 명령하였다. 이들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형에 처해지고, 그 파장은 서울 정계로 옮겨져 서인(노론)이 남인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윤치중은 정약용과 외가 친척간이었으며, 이로부터 그는 표적의 중심이 되었다. 몇 차례 상소와 투서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정조의 배려로 지방관으로 내려가거나 한직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정조는 천주교를 공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진산사건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묵인'하는 수준에서 넘어갔다. 그래서 채제공을 비롯 이가환ㆍ이승훈ㆍ정약용 등이 건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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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동상 책을 읽고 있는 다산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평생에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했다. ⓒ 박태상

 
정약용은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서책을 받아 읽은 후 여러 모임에 참여하는 등 초기에는 어김없이 신자였다. 관직에 나가면서 음해를 받게 되고, 감시의 눈이 많아지면서 각별히 언행에 신중하게 되고,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을 때는 천주교에 빠져있는 역족들을 깨우쳐 제사를  지내게 하는 등 '배교(背敎)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래서 이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약용의 배교 여부는 그의 사후 200여 년이 되는 지금까지 논쟁이 되고 있다. 한국천주교측은 그가 해배된 후 고향에서 신앙인이었으며 결코 배교자가 아니라는 주장이고, 학계 일각에서는 배교자가 분명하다는 입장이다.

그가 천주교인이었는가부터 살펴보자. 신유사옥 당시 이승훈의 심문기록을 해설한 내용이다.

이승훈의 심문기록에서 이벽의 집을 중심으로 서교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정약용은 천주교에 매혹되어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영세받았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이 이벽의 집에서 갑진년 경에 집회하였음은 다른 서교봉행자들의 문초기록에서 모두가 진술한 그대로이며 이벽의 집이 이들의 집회장소로 되면서 주로 이벽은 설교와 교리해설, 이승훈은 교단예식을 주관했다. (주석 2)

이승훈은 1783년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가서 서양인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이듬해 귀국하여 천주교를 국내에 전파한 인물이다. 정약용은 이승훈으로부터 영세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노론 벽파에게 정약용의 배교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과거를 문제삼아 엮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얼마 전까지 형조참의로 죄인을 심문하고 판결하는 재판관이었다. 이제 의금부 도사 한낙유에게 체포되어 국문을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전 영의정이자 영중추부사인 이병모가 재판장, 영의정 심환지, 좌의정 이시수, 우의정 서용보 등 7명이 재판관으로 자리잡은 대대적인 규모의 국청이 열렸다. 두 형은 물론 이가환ㆍ이승훈과 함께 받는 국청이다.

먼저 사헌부는 '공소장'에서 "재물과 여색으로 속이고 유인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나라의 법 범하기를 물 마시고 밥 먹듯 하며, 형벌 받기를 낙원의 일로 여겨, 뭇 불순분자들의 죄를 도피하는 소굴이 되었다."고 죄상을 적시하였다.

정약용은 차분한 어조로 소견을 말했다. 다음은 요지다.

저도 역시 사람입니다. 누가 나라의 은혜를 입지 않았으리오마는 저는 삶과 죽음, 골육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의 이목구비는 일반 사람과 같은데, 어떻게 차마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겠습니까. 제가 지난번에 정조 임금께 올린 상소 「변방사동부승지소」는 꾸며서 했던 것이 아니라 지성 어린 간절함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 비답에 "착하려는 마음씨의 단서가 봄에 솟아나는 새싹처럼 무성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임금님의 비답을 받은 이후로 한 점의 사심이라도 창자 속에 머물러 있게 하고, 한 점의 사학에 관한 글이라도 하늘과 땅 사이에 남겨 두었더라면 저의 죄상은 몸이 천 번 찔리고 만 번 쪼개진다 해도 다시 아까울 게 없습니다. (주석 3)


노론측은 극렬한 문장으로 죄상을 나열했으나 드러난 증거 앞에서는 어찌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노론 계열의 판관들이지만 정약용에 관한 형제끼리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보고는 주춤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정약종의 책 상자 속에서 나온 편지에는 어떤 천주교도가 정약종에게 보낸 편지 속에 "너의 아우가 알지 못하게 하라."는 구절이 있었고, 정약종의 글 속에도 "형제와 함께 서학(천주교)을 익힐 수 없으니 나의 죄가 아님이 없다"는 구절이 있어서, 정약용이 천주교도로 활동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나왔다.

이에 따라 2월 26일에 판결이 내려질 때는 이가환과 권철신은 먼저 곤장을 맞아 죽었고, 이승훈과 정약종은 처형이 확정되었지만, 정약전과 약용 형제는 죽음을 면제받았다. (주석 4)


주석
2> 김옥희,『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29쪽, 가톨릭 출판사, 1979.
3>박석무, 앞의 책, 297쪽, 재인용.
4> 금장태, 앞의 책, 161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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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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