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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한 삶, 아끼는 사람들과의 사별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58회] 정약용은 개인적으로는 참 불운한 사람이다

등록 2020.10.27 17:32수정 2020.10.2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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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 강진군청 홈페이지 캡처

 
정약용은 개인적으로는 참 불운한 사람이다.

몇 차례의 국문과 유배, 끊임없는 반대세력의 모해 속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중에 자식과 가족ㆍ주위에서 많은 사람의 죽음을 겪는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300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처형되기도 하였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었고 장녀는 생후 4일 만에, 삼남은 14개월, 차녀는 22개월, 4남은 22개월, 5남은 10일, 6남은 35개월 만에 각각 눈을 감았다. 다산(多産)했던 정약용 부부는 6남 3녀를 낳아 4남 2녀를 앞세우는 참척을 당한다.

31세 때 아버지가 임소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임종도 하지 못했다. 40세 때에는 셋째 형 정약종이 처형되고 자신과 둘째 형은 유배되었다. 46세에는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할만큼 총명했던 형의 아들 학초(學樵)가 17세로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1811년 50세에는 불경은 물론 세속의 학문까지 통달하였던, 그래서 깊히 사귀었던 혜장 스님이 입적하고, 54세에는 둘째 며느리가 오랜 병환으로 혈육 하나 남기지 못하고 29세로 운명하였다.
  

한국최초의 어류학자 정약전 선생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도감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 선생은 홍어의 습성과 요리에 대해서 그림을 그리듯 소세하게 기록했다. 흑산도에는 자산어보 문화관이 있어 선생의 삶의 궤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김대호

 
그리고 55세이던 1816년 6월 6일 흑산도에 유배 중이던 둘째 형 손암 정약전의 부음 소식을 들어야 했다. 형은 동생이 해배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매일 같이 흑산도 부둣가에 나와 혹시나 하며 기다렸다고 한다. 1801년 11월 21일 나주의 주막 밤남정에서 헤어진 지 15년 만에 끝내 재회하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을 접은 것이다.

자신이 가장 따르고 존경했던 형의 부음 소식에 달려갈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면서 제자 한 사람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고, 고향집의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형님에 대한 통절하고 사무치는 정을 담았다.

6월 6일은 바로 어지신 둘째 형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날이다.

슬프도다! 어지신 분이 이렇게 세상을 곤궁하게 떠나시다니. 원통한 그분의 죽음 앞에 나무와 돌멩이도 눈물을 흘릴 일인데 무슨 말을 더하랴. 외롭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다만 손암 선생만이 나의 지기(知己)였는데 이제는 그분마저 잃고 말았구나.

지금부터는 학문연구에서 비록 얻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누구와 상의를 해 보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가 없다면 죽은 목숨보다 못한 것이다. 네 어머니가 나를 제대로 알아주랴. 자식들이 이 아비를 제대로 알아주랴. 나를 알아주는 분이 돌아가셨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경서(經書)에 관해 240책의 내 저서를 장정하여 책상 위에 보관해 놓았는데 이제 나는 불사르지 않을 수 없겠구나. 밤남정에서의 이별이 마침내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구나.

간절하게 애통스러워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분 같은 큰 덕망, 큰 그릇, 심오한 학문과 정밀한 지식을 두루 갖춘 분을 너희들이 알아주지 못하고 너무 이상만 높은 분, 낡은 사상가로만 여겨 한 가닥 흠모의 뜻을 보이지 않는 점이다. 아들이나 조카들이 이 모양인데 남들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이 점이 가장 슬픈 일이지 다른 것은 애통한 바가 없다. (주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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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의 화성행궁에서 찍은 정조의 초상화. 정조의 실물과 닮았다는 보장은 없다. ⓒ 김종성

 
그가 사별의 아픔을 겪은 것은 자식과 혈육 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자신을 믿고 아끼며 천거했던 스승 채제공, 어버이처럼 돌봐주고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었던 선왕 정조 임금의 승하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고 슬픔이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서학서적을 전해주고 천주교를 안내했을 뿐 아니라 장차 나라의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이벽은 32세로 숨을 거두고, 역시 큰 기대를 모았던 맏형 정약현의 사위였던 황사영은 26세 때에 백서사건으로 서소문 밖에서 참형되었다. 아까운 인재들이었다.

뜻을 함께 했던 이벽의 돌연한 죽음 앞에서는 말을 삼킨 채「이벽의 죽음」이란 시를 지어 읊었다.

 신선 같은 학이 인간에 내려왔나
 높고 우뚝한 풍채 절로 드러났네
 날개깃 새하얗기 눈과 같아서
 닭이며 따오기들 꺼리고 성냈겠지
 울음소리 높은 하늘에 일렁였고
 맑고 고와 속세를 벗어났노라
 가을 바람 타고 문득 날아가버리니
 괜스리 바둥거리는 사람들 슬프게 한다. (주석 5)


누군들 사는 동안 아끼는 사람과 사별하지 않는 경우가 없을 것이지만, 그는 특히 애통하고 절통한 경우가 많았다. 그 숱한 아픔과 슬픔을 견디며 그 많은 책을 썼다. 「형의 아들 학초의 묘비명」의 명(銘)이다.

 호학(好學)했는데 명이 짧아 죽었구나
 하늘이 나를 돌보아 주려다
 하늘이 나를 앗아가 버렸네
 세태야 날로 더러워지고
 옛 성인의 도(道) 황무지 되니 슬픈지고
 저급의 사람들 질탕하게 빠지고
 상급의 사람들 뾰족이 모만 나니
 슬퍼라 누가 있어 나의 글 읽어 줄 것인지. (주석 6)


주석
4> 박석무, 『다산 정약용평전』, 379~380쪽.
5> 『다산시정선(상)』, 62쪽.
6> 『다산산문선』, 215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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