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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에게 살해당한 연대장

[나의 학살 현장 답사기] 제주 충혼묘지

등록 2020.10.25 20:26수정 2020.10.26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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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충혼묘지 구묘역 저 멀리 확장공사가 한창이다. ⓒ 박기철



아직 무더위가 가시기 전인 늦여름, 제주도의 충혼묘지를 찾았다. 이곳은 국가유공자들을 모신 곳인데 하필 내가 갔던 날은 묘지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낭패감에 빠져 커다란 공사장 철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종이 안내문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다행스럽게도 구묘역에는 입장이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다.

공사가 한창인 곳을 지나 군인과 경찰, 그리고 기타 유공자들의 묘역에 도착했다. 잠깐의 묵념 후 어떤 비석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지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공사 때문에 이전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빠졌다.

결국 왔던 길을 터덜터덜 돌아가는 와중에 현장 인부 두 분을 만났다. 그들에게 비석의 위치를 물었지만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실망하고 다시 뒤돌아섰을 때 갑자기 그분들이 큰 소리로 나를 부르며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급히 달려가서 보니 돌무더기 뒤편에 내가 찾던 비석이 있었다. 바로 박진경 연대장의 추모비였다. 
 

돌무더기 뒤에서 발견한 박진경 추모비 1952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이후 세월에 마모되어 1985년 6월에 지금의 추모비가 새롭게 세워졌다. ⓒ 박기철



대한민국 육군장 1호

박진경 대령(사망 후 준장 추대)은 1948년 5월 6일 조선경비대 제주 9연대장이 되었다. 그는 무장대 토벌 작전을 진두지휘했고 부임 한 달여 만에 대령으로 진급한다. 그리고 6월 18일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숙소에서 잠이 들었지만 새벽 3시경 부하의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가 죽었을 때 미군정 장관 딘 소장이 직접 제주도로 날아와 시신을 수습해갔다. 그의 장례는 최초의 대한민국 육군장으로 치러졌고 1952년에 추도비가 세워진다. 이후 1990년에는 자신의 고향인 남해에도 동상이 세워졌고 대한민국 창군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사건 이후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를 비롯한 범인들은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는다. 군인으로서 상급자를 살해했으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당시 신문을 살펴보면 각계에서 판결이 과하다며 감형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법학계에서도 성명을 발표한다.
 
법학가 동맹에서는 고(故) 박 대령 살해사건에 관련하여 26일 "제주도민 30만을 위하여서나 또는 민족적 정기에서 보더라도 가해자 손선호 등 4명에 대하여 총살형에 처한다는 것은 범행 동기를 전혀 무시한 것으로 용납할 수 없음을 법학도의 입장에서 강경히 주장한다"는 견해를 발표하였다.(조선일보, 1948년 8월 27일, ' 박 대령 살해사건 총살형은 부당 / 법학계 동맹 견해')
 
과연 범행동기가 무엇이었기에 이렇게 사형을 반대하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을까?

6주에 6천 명

1948년 4월 3일 무장대의 봉기로 인해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에서만 5.10 선거가 무산되었다. 이는 미국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재선거가 6월 23일로 잡혔지만 제대로 실시될지 의문이었다. 상처 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태를 조속히 마무리 지어야 했다.

미군정은 최대한 신속한 강경 탄압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선무공작과 평화협상을 주장하던 김익렬 9연대장을 해임하고 온건파였던 유해진 도지사 역시 물러나게 한다.

그리고 제주 최고사령관으로 브라운 대령을 임명한다. 그의 임무는 땅에 떨어진 미국의 권위를 최대한 빨리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고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 브라운 대령과 함께 실제 작전을 수행할 신임 9연대장이 바로 박진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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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기념관에서 찍은 박진경 대령 관련 자료 사진. ⓒ 박기철


   
박진경은 일본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전에는 제주도의 일본군 38군단에서 복무했다. 입대 전에는 오사카 외국어 대학에서 영어과를 다녔다. 이 덕분에 해방 이후 주둔한 미군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사실 미국은 그를 '극우주의자(the extreme rightist)'로 평가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미군의 자존심을 조속히 회복시켜줄 적임자이기도 했다. 박진경은 부임하자마자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제주도의 서쪽에서 동쪽까지 빗질처럼 완전히 휩쓸어 버리는 형태로 작전을 진행했다.

그야말로 무차별적인 토벌과 체포였다. 군은 6주 만에 무려 약 6천 명을 체포했다. 체포된 이들 중에는 물론 무장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중학생과 노인을 포함해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무차별적인 강경 진압 때문에 주민들은 더 숨고 도망쳐야 했다. 죄가 없는데 왜 도망치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토벌대는 그런 것을 묻지도 않았고 얘기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박진경의 대령 진급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은 덕분이었다.

9연대의 병사들, 그리고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당시 조선경비대는 지역별로 연대를 창설했고 병사들은 인근 지역에서 모병해서 채웠다. 그러다 보니 9연대에는 제주 출신 장병들이 많았다. 그들은 고향에 대한 이런 무차별적인 토벌 작전에 괴로워했다.

이렇게 무리하고 잔인한 작전이 계속되자 결국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일련의 군인들은 박진경 연대장을 살해하기로 뜻을 모은다. 그리고 박진경의 대령 진급 축하 만찬이 끝난 후 술에 취해 잠든 박진경을 향해 손선호 하사가 방아쇠를 당긴다. 이런 전후 사정 때문에 이들의 구명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손선호는 재판 과정에서 박진경을 살해한 이유를 말하면서 무차별적인 민간인 체포와 학살을 담담히 진술했다. 
박 대령의 작전 공격은 불만하였다. 사격 연습을 한다고 하고 부락의 소 기타 가축을 박살하였으며, 폭도의 처소를 안내하는 양민을 총살한 예도 많다. 또한 매일 한 사람이 한 사람의 폭도를 체포하라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이 전연 없었다. (조선일보, 1948년 8월 15일, '4명 총살 언도 / 태연한 피고, 박 대령 비행 진술')
 
또한 아버지의 시체를 끌어안고 있는 15세 소년을 박진경이 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박진경을 살해한 것은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었기에 도망갈 기회가 충분히 있었으나 도망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상길 중위는 전임 김익렬 연대장이 평화교섭을 추진할 때 무장대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문상길이 좌익이나 남로당의 프락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황상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정부에 반감을 품거나 토벌대의 무리한 작전에 반대하면 모두 빨갱이로 몰리던 시기였다. 또 전후 사정을 잘라내고 '빨갱이였기 때문에 토벌대 지휘관을 죽였다'라는 주장이 양민들에게 행했던 박진경의 무자비한 만행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상길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체포 후에는 여러 기독교 단체에서 구명운동을 펼쳤다. 문상길의 법정 진술은 그의 종교관과 신념을 잘 보여준다.
 
(전략)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김용옥,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240쪽)
 
문상길과 손선호는 '훌륭한 조선의 군대가 되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948년 9월 23일 오후 3시 35분 총살당했다. 그들의 나이는 각각 23세, 22세였다.

30만 vs 30만

박진경 추모비 뒤에는 그의 생애가 간략히 나와 있다. 거기에는 '제주도 공비소탕'의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산화했고 이를 기리기 위해 '삼십만 도민과 군경원호회가 합동하여' 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박진경은 9연대 연대장 취임 연설에서 '제주도 30만을 다 죽여서라도 빨갱이를 몰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도민 30만 명이 뜻을 모아 자신들을 다 죽여버리겠다던 자의 추도비를 세운 것인가? 박진경이 말한 30만과 추모비의 30만은 다른 사람들인가? 추모비의 내용을 보고 있자니 한 편의 블랙코미디 같아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 시민사회에서는 추모비 철거를 계속 주장해왔고 2018년 제주시는 묘역 공사 후에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추모비 뒷면에 기록된 박진경의 생애 (전략) 제주도 공비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히도 단기 4281년 6월18일 장렬하게 산화하시다. 이에 우리 삼십만 도민과 군경원호회가 합동하여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단갈을 세우고 추모의 뜻을 천추에 기리 전한다. ⓒ 박기철


   

[참고자료]
김용옥,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통나무
박태균,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 역사비평사
임영태, <한국에서의 학살 - 한국 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통일뉴스
허영선,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서해문집
제주 4.3 아카이브(과거 신문기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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