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6-2

일제의 마타하리, 요화 배정자 절영도에 유배를 오다

등록 2020.11.14 16:13수정 2020.11.1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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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을 장악한 흑치마 사다코

궁중 출입을 자주 할수록 배정자는 날이 갈수록 궁중의 신용을 얻어 그 사람이 아니면 일본의 사정을 알기 어렵고, 일본 공사관에서도 배정자가 아니면 역시 궁중의 시시각각으로 변하여 가는 사정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1898년 7월 경무사를 지낸 김재풍·이충구 등과 더불어 추진하던 황제 양위음모가 발각되자 안경수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망명정객 박영효 일파와 합세하여 독립협회와의 제휴를 통한 정계 복귀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주선으로 1900년 1월에 귀국하여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자수하였다. 안경수는 심한 고문을 받은 뒤 이준용 역모사건(1894)을 고하지 않은 죄 및 황제양위 미수사건(1898)에 관련된 죄로 교수형에 처했다. 배정자의 궁중 세력은 안경수의 사형당한 후부터 더욱 높아졌다.

광무황제는 민영철, 이용익(보부상 출신으로 고려대 설립자) 등 친러파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러시아가 이기기를 바라며 러시아군과 협력하거나 혹은 러시아군에 가담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한국인도 있었다. 러시아군 청병(請兵)을 위한 자금 50만 원을 배정자를 통해 황제는 일본에서 빌렸다.

일본은 황제와 러시아군의 동향을 탐지하였다. 황제가 친러파의 말을 듣고 평양(혹은 블라디보스토크)으로 파천을 작정하자 배정자는 만류하고 불가함을 설득하였다. 일본군이 막강하니 황제의 신변을 보장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황제는 냉소하고 불신하였다.

하지만 1904년 2월 9일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 2척을 일본군이 격침하니, 황제는 배정자의 말이 옳았음을 인정하였다. 때를 놓치지 아니하여 배정자는 황제에게 상신하여 러시아 공사와 무관의 인천 추방과 친러파 내각의 경질을 단행하게 했다. 한규설 내각의 성립과 친일정책이 실현되는 사이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배정자는 일본군 군부의 종군 명령을 받아 포연이 중첩(重疊)한 만주 광야로 출전하게 되었다.


1885년 관비유학생이 되어 게이오의숙(慶應義孰)에 입학한 현영운은 귀국한 박문국 주사로 관직을 시작한다. 1900년에는 의화단 사건으로 러시아 군대가 남하하자 압록강을 넘어 침범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고, 이 때문에 고종의 특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이토에게 한국국방동맹안을 제안하기도 한다.

일본공사관에 있던 30대 중반의 배정자에게 연인이 생겼다. 한국어 교사 현영운이었다. 그의 이름바위가 통도사에 있다. 1901년 결혼 후 현영운은 육군 참령, 육군 참장, 육군 총장, 삼남 순무사를 거쳐궁내부 대신 서리까지 올랐다. 배정자와 광무황제의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공사관에서나 궁중에서 세력가가 현씨 부부였다. 배정자의 손에 잡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척결을 보았다. 일본 공관의 요구사항을 가지고 한국 황제에 주상하여 해결을 짓고 거꾸로 황제의 요망을 일본 공관에 전달하여 해결하는 등 종횡무진 못 하는 일, 안 되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현상(玄裳, 흑치마)'이라는 별명을 얻고 궁중을 휘젓고 다녔다. 이때부터 흑치마 사다코라 사람들에게 불렸다. 이제 내각까지도 배정자의 손아귀에 놀아났다. 이런 와중에 황제가 배정자를 총애하여 심지어 결혼에까지 마음에 두었다.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의 투기가 날로 더하여 약살(藥殺)까지 하고자 하였다.

1904년 3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에 왔다. 이토는 광무황제에게 "메이지 황제 폐하께서는 늘 동양의 평화를 엄두에 두고 있습니다.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한 것도 실로 동양의 평화를 보전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우리는 충용 무쌍한 장졸들은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날 한국의 산하 역시 보전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이토에게 한국의 최고훈장인 금척대수장(金尺大授章)을 달아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다과회를 열었다.

이토는 배정자를 만나서 "그대야말로 여자지만 동양천지에 제일인이로다."라고 칭찬하였다. "위문사와 일본공사를 대표하여 일본황제와 황후의 선물을 직접 광무황제에게 전달하라."는 이토의 명을 받고 4인교를 타고 대안문(大安門)으로 입궐하였다. 당시 모자(宀)를 쓴 여자(女)가 '대안문(大安門)'을 드나들므로 나라가 망한다고 하여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그 여자가 배정자라고 했다.

현 대감의 부인이자 이토의 양녀인 배정자를 이제는 누구도 괄시할 수 없었다. 이토도 광무황제 앞에서 배정자를 이토처럼 신임하여 일체 정사(政事)를 논의하기를 요청하니 황제도 이를 수용하였다. 이때부터 한국 황실은 황제의 천하가 아니고 안으로는 정자의 천지였고 밖으로는 현영운의 천지가 되었다.

1904년 9월 그녀의 오빠 철도원 참서관 배국태(裵國泰)는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으로, 삼화항 경무관(三和港警務官) 배석태(裵錫泰)는 경무청 경무관(현 경찰청장)에 임용하여 벼락출세한다. 12월에는 부친 배지홍(裵祉洪)에게 내부 협판, 조고(祖考) 배도걸(裵道傑)에게 비서원승, 증조고(曾祖考) 배이견(裵以絹)에게 좌장례(左掌禮)를 추증하였다.

윤치호는 1904년 4월 26일 일기에 "공사관의 일본어 통역관 고쿠부 쇼타로[國分象太郞]는 현영운과 첩(배정자)을 공유하고 있다. 현영운의 첩이 고쿠부를 지배하고 있고, 그는 대신을 지배하고 있으며, 대신은 조선의 황제를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조선의 정치세계에서 권력의 원천은 현영운의 첩, 배정자인 것이다."라고 적었다.
  
러일전쟁에 참전한 밀정 배정자

이토 히로부미의 "일본이 동양 3국을 지배해야 동양의 평화가 온다."라는 주장을 받들어 배정자는 일제의 조선침략 선봉이 되었다. 그녀의 임무는 일차적으로 조선 침략에 장애가 되는 러시아 세력을 황실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부를 따라 만주에 파견되어 여자 밀정 배정자의 이름을 널리 알린다.

경부철도가 개통한 하루 뒤인 1905년 5월 26일 러시아 발트함대가 대한해협(현해탄)에 도착했다. 황제 니콜라이의 배웅을 받아 해군기지 크론시트를 떠나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 베트남, 타이완을 지나는 총 3만 7천km를 7개월 항해한 후였다. 대한해협에 도착한 발트함대는 대부분 병들고 지쳐있었다. 물자 보급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야 했다.

이때를 틈타 5월 27일 새벽,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가 있는 일본 해군은 발트함대의 대형을 이순신의 학익진 전법을 응용한 정(丁)자로 가로지른 뒤 포탄 공격을 퍼부었다. 전투는 5시간 만에 일방적으로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발트함대는 함선 38척 가운데 19척이 격침되고 5척이 포획되었고 4800여 명이 전사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러시아의 패배는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일본은 대한제국을 집어삼키는 일만 남았다. 러일전쟁은 일본에 "단지 군대와 병사만의 전쟁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전쟁이며, 단지 남자 장정만의 전쟁이 아니라 부인과 아이도 또한 전쟁에 대한 일대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본 '국민 전체의 전쟁(国民全体の戦争)'인 총력전이었다. 일본인들의 애국심을 고양시켜 일본을 하나의 국가로 결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구 열강의 하나인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은 근대적 총력전으로 일본의 국운을 건 전쟁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의 한국 침략의 장애물은 제거되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최강자가 되었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근대 유럽 강대국에 대한 비유럽 국가의 승리라는 세계사적 의미도 분명 있다. 러시아가 이기면 열강의 다툼으로 중립국이 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것도 사라졌다. 한국이 기댈 언덕은 사라졌다.

청일전쟁에 전비를 2억 3천엔 정도를 사용했다면, 러일전쟁은 19억 8천4백만 엔을 썼다. 이것은 2억1천5백만 엔의 증세와 15억 6천만 엔의 국채와 임시 차입금으로 충당하였다. 국채 가운데 68%가 조건이 불리한 외채였다. 러일전쟁의 종결에 일본은 배상을 받지 못해 일본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포츠머스 조약을 파기하라는 집회는 급기야 도쿄 시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17명의 사망자와 약 5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히비야야키우치[日比谷燒打]사건이었다. 일본은 전쟁의 보상을 한국 침탈로 받으려 했다.

배정자의 유배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자 1905년 11월 14일 부산에 도착한 이토는 비서관을 보내 배정자의 사면을 정부에 종용하였다. 당시 이토는 일본 특파대사 자격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 오는 길이었다. 이에 정부는 할 수 없이 배정자를 석방하였다. 이제 배정자로서는 자신의 양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이토가 서울로 옴으로써 자신의 친일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다시 한번 잡게 된 것이다.

또 일제의 야심이 노골화되던 시기여서 고종에게도 일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배정자는 어느 정도 필요한 존재였다. 고종은 배정자를 불러 이토의 방문에 공로가 컸다고 치하하면서 이토가 어떤 사람인지를 물었다. 배정자가 "이토는 폐하와 한국을 돕기 위해 왔다"라고 대답하자, 고종은 "이토는 일본의 중신이니 응당 자국을 위하고 그다음에 우리나라를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대가 이토를 성의껏 모셔 이 나라에 도움을 주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고종은 배정자도 이토를 몰랐다.

을사늑약에 따라 1906년 3월, 이토가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고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밀정 배정자는 물만난 물고기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 일제가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넣을 때, 밀정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녀는 1907년 고종 퇴위에 관여할 때 검은 치마를 입고 다녀 "흑치마 사다코"란 별명을 얻는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 사살되자, 쓰러져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생활하다 병으로 드러눕기도 했다. 하지만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되자 병석에서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한일 강제합병 후에는 호화사치 생활과 호색행각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만주 일대를 떠돌며 독립운동가를 정탐·밀고해 생계를 유지했다.

태평양전쟁 때는 "자신의 조국 일본 장병들이 고생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며 일본군의 후원으로 조선인 여성을 군인 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끌고 갔다. 조선인 여성을 일본군의 성적 배설물로 바치며 일제의 승리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일제의 밀정, 일제의 마타하리라 할 수 있는 배정자의 삶은 몸도 마음도 철저히 일본인이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면서 일제의 밀정노릇을 했다.

배정자의 사람들
  
배정자는 남성 편력은 화려했다. 전재식, 현영운, 박영철, 일본인 대교(大橋), 은행원 최덕, 전남부호 조병헌, 20세 연하 대구부호 정봉진, 만주 마적단 두목, 25세 연하 일본인 순사 천고(川尻), 전라도 거부 조희경, 옥승덕 등이 배정자와 동거하거나 결혼한 남자이다. 그녀가 성 해방을 실현한 선구자인지 변태성욕자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남성 편력은 일제 강점기 내내 많은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렸다.

현영운은 배정자와 1907년 11월에 헤어졌다. 현영운의 22년간의 관직생활은 군부협판, 주일공사, 육군참장, 농상공부서리대신, 태복사장 등 정통 엘리트 관료의 길이었다. 하지만 1907년 7월 고종의 퇴위와 순종의 즉위에 이어 9월에 육군참장에서 면직된다. 10월에 민영휘가 위원장을 맡은 일본 황태자의 한국 방문 환영 외사임원을 맡으며 재기를 노리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8년부터 1916년까지 금광사업의 실패로 부채와 사기 등 금전관계로 인한 재판 관련 신문보도가 많다.

배정자의 남편 현영운의 조카가 독립운동가 현정건과 소설가 현진건이다. 현정건은 현영운의 집에서 1905년부터 기거하다 1910년 결혼 후 분가한다. 현정건은 삼촌 집에서 살면서 배정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었다.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다. 친일 매국노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았다. 그가 항일독립운동가로 살계된 계기가 삼촌집 생활이었다.

현정건은 부산 백산상회 취제역 윤현태와 상해임정 재무차장 윤현진의 여동생 윤덕경과 1910년 3월 결혼을 한다. 윤덕경의 부친은 동래부사를 지낸 윤필은, 삼촌은 부산 구포(경남)은행을 설립한 윤상은이다. 현정건은 결혼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하였다. 그의 연인이 기생 현계옥이다. 현계옥은 사상 기생으로 거의 유일한 여자 의열단으로 활동하며 '황옥경부사건'에서 폭탄 제조와 안전 운반 업무를 수행하였다. 한계옥이 사회주의자로 독립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하였지만, 윤덕경은 남편만 바라보고 살다가 1932년 12월 현정건이 옥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41일 후 음독자살하였다.

배정자의 딸 현송자(1899~1978)은 아버지 현영운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1919년 5월 12일 윤치오(1869~1949)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 윤치오는 일본에 유학한 개화파로 한국 최초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일제강점기 총독부 중추원 찬의와 학무국장을 지낸 친일인사이다.

윤치오는 한때 통도사지방학림의 교장을 했다. 그의 동생 윤치소(조선 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아들 명선(공주갑부 김갑순의 사위), 나아가 사촌형 윤치호가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그 집안은 항일과 친일이 혼재하기도 했다. 현송자는 1934년 교회에서 만난 이철(1903~1944)과의 불륜으로 이혼을 한다.

이철과 현송자는 'OK 레코드'를 설립하여 고복수, 이난영, 박시춘, 남인수, 김정구, 백년설 등을 영입하여 한국음반 사업과 연예 사업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이난영, 장세정, 서봉희, 김능자, 이준희)'를 결성하였다. 태평양전쟁 때 '조선악극단(남인수, 김정구, 고복수, 이난영, 장세정, 박향림, 이화자 등)'을 결성하여 일본과 중국까지 활동 무대를 넓혀 노래와 연주에 춤과 코미디를 더한 버라이어티 쇼 단계에서 더 나아가 뮤지컬로 공연 영역을 확장했다. 하지만 전시 가요를 부르고 공연하는 등 친일 반민족행위를 하였다. 그런데 이철의 호적등본에는 현영운과 배정자의 딸이 아닌 현영운과 이씨의 딸로 나와 있다.

배정자의 조카, 배석태의 딸인 배구자(1905~2003)는 곡예단 덴카쓰(天勝) 출신의 현대무용가이다. 전통무용의 무대화와 발레 등 서양 무용의 수용을 위해 노력했고, 가극(歌劇)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인 최초의 무용공연을 하였으며, 조선 춤의 무대화를 하였다. '배구자 무용연구소', '배구자예술연구소'를 운영하였고, '배구자 악극단'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만주 일본 등지를 자주 순회 공연했다.

1935년에 남편 홍순언과 함께 당시로는 최신식의 동양극장을 지었고, 전속극단 청춘좌, 희극좌, 동극좌, 호화선을 운영하며 일제강점기 후반의 대중극을 일으켰다. <아리랑>을 비롯하여 무용극, 연극, 합창, 촌극을 섞은 공연이었다. 현대 무용의 개척자 최승희보다 낮은 학벌과 미모, 집안 때문에 가려진 배구자는 실상 한국 근대무용의 선구자이다. 흥행에는 배구자, 예술성에는 최승희로 평가한다.

최승희는 '무용의 미학화'를, 배구자는 '무용의 대중화'를 지향했다. 두 사람은 당시 무용계를 풍미한 한국여인이었다. 배구자는 일찍 은퇴한 탓으로 그는 다행히 친일의 오명을 쓰지는 않았다. 일제말기 일본군 위문공연을 많이 한 최승희는 해방 후 북한으로 간 반면, 배구자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경부철도 개통식을 보고 온 뒤 정공단 아이들을 일본이 러시아함대를 대파했다는 소식에 놀랐다. 또한 황실에 밀정으로 있었던 이토의 양녀 배정자를 관료들이 위로방문한다는 사실에 또한 놀랐다. 러일전쟁 후 부산항은 일본군의 배치가 증가하였고 그와 함께 일본인도 증가하였다. 갈수록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위한 사회 간접시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러일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일본은 한국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조선사람이 일본을 위해 일하다니?"
"아,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하다니?"
"우리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구동성으로 정공단의 아이들은 말했다. 재혁은 생각했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서양에 대한 동양의 승리 아닌가? 일본에 기대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덧붙이는 글 폴리뉴스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의열단원 박재혁 #박재혁 #배정자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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