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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원 6000여 명... 정조가 화성 갈 때 꼭 건넌 다리

[세상을 잇는 다리] 을묘능행의 출발, 창덕궁 금천교 ①

등록 2020.11.26 13:38수정 2020.11.2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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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주 속에서 억울하게 굶어죽은 아버지를 신원(伸冤)하고자 한다. 정통성 회복이다. 왕은 세손으로 정통성에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왔다. 아버지는 죽어 폐서인 되었다. 1789년 척박한 땅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 인근)에 묻혀있던 아버지를 화성 화산(花山)으로 이장하여 모신다.

이때 한강 뚝섬 부근에 배다리(舟橋)를 놓는다. 아버지를 장헌(莊獻)세자로 추존하여 높인다. 능 이름도 영우원(永祐園)에서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쳐 부른다. 그리고 매해 1월이나 2월에 현륭원을 참배하는 행행(幸行)을 한다.

행행 길에 아울러 민심을 살피고, 민원을 직접 접수·처리한다. 왕의 잦은 행행으로 길이 넓어지고 다리가 생겨난다. 행행 자체가 군사훈련이다. 현지에서 별시를 치러 인재를 뽑기도 한다. 왕은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매년 수차례씩 행행을 했다.

화성에 신도시를 만들다
 

화성 성곽 성벽을 따라 멀리 장안문이 보인다. 성벽을 따라 내려오면 화홍문 지붕이 보이고 그 위로 방화수류정이 의젓하다. 방화수류정 앞엔 용연이 성벽 및 누정과 어우러져 멋들어진다. 가까운 성벽엔 북암문이 선명하다. ⓒ 이영천

 
이런 배경에서, 왕은 화성에 신도시 건설을 구상(1789년)하고 실행(1794∼1796년)에 옮긴다. 화성은 철저한 계획도시다. 아버지 능을 옮기며 그곳에 살고 있던 백성들을 신도시로 이주시킨다. 효(孝)를 앞세운다. 백성들은 왕의 효심에 수긍한다. 정조는 화성을 왜 만들었을까?

복합적인 목적이다. 가장 큰 명분이 백성이다. 삼남(三南)과의 물자교역과 교통·상업·군사·행정·산업(농업)중심지를 만든다는 테제를 내세운다. 이로써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진다고 하였다. 화성을 남쪽으로 통하는 교역 요충지로 만들어 낸다. 삼남 교통의 결절점(結節點, Node, 여러 가지 기능이 집중되는 접촉 지점)이 된다. 정조 사후, 화성에서 상업은 무척 발달한다. 삼남 보부상 거점이 형성된다. 한양과 삼남의 중계지 역할을 한다.

군사적으로도 획기적이다. 이전 성곽의 단점이었던 단순 1차 방어 수준을 벗어난다. 생활과 방어, 산성(山城)과 둔취 기능을 동시에 추구하고 충족시킨다. 18세기 최첨단무기 사용이 가능토록 모든 시설을 갖춘 최신식 성곽을 만들어 낸다. 1793년에 이미 친위부대 장용영 외영(外營)을 화성에 설치, 5천의 병마를 주둔시킨다. 여기에 주변 5개 읍(용인, 안산, 진위, 시흥, 과천) 군사 1만3000을 외영에 합속(合屬, 한데 합하여 소속시킴)시킨다.

일종의 지역방어체제 구축이다. 지방도시에 한양과 유사한 5위 체제를 구성한다. 모든 군권이 왕의 수중으로 들어왔다는 선언이며 힘의 과시다. 또한 행궁을 두어 행정 중심지 기능을 부여한다. 부근 몇 현을 화성의 속현으로 삼는다. 1793년 수원을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키고, 이름도 화성으로 바꿔 부른다.

농업의 연구·발달을 위해 화성 주위 3곳에 큰 저수지를 만들고, 둔전(屯田, 각 궁과 관아에 속한 토지. 관노비나 일반 농민이 경작하였으며 소출 일부를 거두어 경비로 충당)을 일군다. 북에 만석거와 만안제, 서에 축만제(현 서호), 남에 만년제를 축조한다. 자급자족하는 낙원도시 화성을 꿈꾼 것이다. 이중 서측 축만제는 오랜 기간 우리 농업기술연구의 중심지역할을 수행한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이곳에 있었다.

또한 당파, 특히 노론세력에 대한 견제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정치를 개혁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할 것이니 함께 하자는 뜻을 담는다. 적대적인 행위가 아니다. 껴안고 함께 가는 길을 열어둔다. 1795년 화성 행행에서 친위군인 장용영을 동원, 화성 전역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는 장대한 야간훈련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힘으로써 시위한다. 수구적인 그들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란다.

다음이 신기술의 시현이다. 벽돌축성에 거중기 등을 실험하고, 실학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해 보인다. 정약용의 생각과 채제공(蔡濟恭, 1720~1799년. 남인 영수. 사도세자 스승으로 왕의 최측근 중 한사람)의 감독으로 단기간에 화성을 축조해낸 일이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이렇듯 정조는 화성축조와 행행을 통해, 왕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을 장대하게 펼쳐 보이고자 하였다.

조선 르네상스의 결정판 화성 행행
 

창덕궁 전경 을묘년 화성으로 출발한 행행 행렬이 정렬했을 창덕궁 모습이다. 좌측 인정전과 그 앞 인정문, 사진 중앙에 숙장문과 진선문이 보인다. 금천교를 건너 사진 우측 중앙 쪽에 보이는 돈화문을 나선다. 그 앞으로 운종가로 쭉 뻗은 길을 따라 행행 행렬이 지나간다. ⓒ 이영천

 
어머니와 동갑인 아버지를 기리는 길이다. 회갑은 그저 명분일 뿐이다. 같은 해 6월 18일 창덕궁 연희당에서 어머니 회갑연을 정식으로 따로 치른 일이 이를 증명한다. 왕의 치세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정치드라마이며 수구세력에게 시위하는 원행이다. 한양에 오래된 때처럼 묵은 구질서(Ancien regime)을 깨뜨리려는 혼신의 도전이자 노력이다. 왕의 이런 도전으로 문화·학문·예술·기술이 절정으로 치닫는 조선 판 르네상스(Renaissance)가 활짝 꽃피고 있었다.

능행(陵幸)에 동원된 총 인원이 무려 6000명이다. 모두가 한날한시에 일제히 움직인 것은 아니나, 엄청난 규모임에는 틀림없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행행 길이가 무려 1km에 이르렀다 기록한다. 실록(정조 19년(1795년) 윤2월 9일(음)자)에는 '상이 혜경궁(惠慶宮)을 모시고 현륭원에 행행하였는데, 두 군주(사도세자 딸들로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청선군주)가 따라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세자의 직계 혈연만 참석한 능행이다. 두 여동생은 아버지 능에 첫 걸음이다.
 

화성능행도병풍-환어행렬도 행행을 마치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길을 그린 병풍이다. 수많은 배행꾼이 동원된 모습과 곳곳에서 구경하는 백성들 모습도 보인다. 왕과 왕의 어머니 행렬이 화려하다. 그림 하단은 시흥행궁이고, 사람들의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듯 생생하다. 마치 새처럼 하늘에서 내려다 본 행행 행렬이 장관이다. ⓒ 국립고궁박물관

 
이 많은 사람들이 이틀 씩 총 나흘 간 편도 63km 거리를 왕복하고, 신도시 화성에서 나흘을 머물렀다. 행행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은 엄청나다. 왕과 왕의 어머니가 주축이다. 왕이 움직이면 시위군관과 의장, 일부 관료를 포함해 수백 명이 보통이다. 여기에 왕의 어머니가 있으니 나인과 회갑연 행사인원, 잔치의 내·외빈 등등이 있었으리라. 또한 대신들과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이 총동원되었을 것이다. 정조의 직할군대인 장용영의 위용도 대단했다 기록한다.

윤2월이면, 양력으로 4월경이다. 봄이 한창이나 아침저녁으론 제법 쌀쌀하다. 먹고 자고 움직이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은 시기다. 잘 짜인 체계와 규율이 아니라면 엄청난 불편이 뒤따른다. 많은 준비와 계획 없인 불가능했으리라. 단적인 사례가 한강을 건널 배다리 놓을 주교사(舟橋司)를 먼저 설치한 일이다. 주교사는 행행이 시작되기 약 한 달 전부터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한다. 당초 20일 이상 걸릴 것으로 예측한 공기(工期)가 11일 만에 끝이 난다. 이처럼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말은 총 780필이 동원되었다.

치세 19년 차에 어머니 회갑이 다가온다. 6000여명의 인원을 이끌고 화성으로 능행을 한다. 말과 마차, 수레와 가마 등 당시 최첨단 교통수단이 총 동원된다. 행행하는 행렬이 지나는 길은 비교적 평탄해야 했다. 수시로 화성에 다녀간 왕 덕분에 대로가 생겨난다. 행행하는 길의 폭이 24척(尺)이었다 하니 m로 환산하면 대략 10여m에 이른다. 창덕궁에서 출발한다.

궁궐 다리를 건너
 

진선문으로 통하는 금천교 금천교 넓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다리 가운데를 들어 올린 볼록한 모양이 보이고, 상판 바닥은 청판석을 깔았다. 길을 3갈래로 냈는데 한가운데 넓은 길을 살짝 돋워 올렸다. 이 길은 임금만 지나는 길(御道)이다. 신하들은 양쪽 좁은 길로 다녀야 한다. ⓒ 이영천

 
인정문과 숙장문 앞에 긴 행렬이 도열하였다. 경계병과 배행(陪行)하는 시중꾼들이 양쪽으로 도열하고, 왕과 혜경궁을 포함한 귀한 신분의 벼슬아치들이 가운데 열을 지었다. 왕은 말(가마)을 탄다. 혜경궁은 가마에 오른다. 진선문을 나선다.

맨 먼저 궁궐 안에 있는 금천교가 행렬을 맞이한다. 도성의 모든 궁궐에 금천(錦川)을 흐르게 했다. 삿된 것들을 물리치려는 상징이다. 궁궐 금천의 물줄기는 통상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하지만 창덕궁 금천은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지형에 순응한 까닭이다. 그리고 그 위에 다리를 만들었다. 창덕궁 금천을 잇는 다리 금천교(錦川橋)다. 1411년(태종 11년)에 지은 것이니, 우리나라 궁궐에 있는 현존하는 다리 중에선 맏형 격이라 할 만하다.
 

금천교-남측면 2경간 무지개다리다. 청정무사석으로 귀면을 새기고, 그 앞에 해맑은 해태를 앉혔다. 잘 다듬은 무사석으로 벽을 쌓고, 멍엣돌 끝을 돌출시켜 용머리를 새겼다. 난간은 빈틈이 없는 화엽석으로 마무리하였다. 돌난간 머리는 연화보주형으로 익살스런 모습의 법수를 앉혔다. ⓒ 이영천

 
2경간 무지개다리다. 하안(河岸)에 축대를 쌓아 교대 역할을 하게 했다. 무지개 틀 위에 장대석의 멍엣돌을 걸었다. 밖으로 돌출된 부분엔 용머리를 새겨 넣었다. 다리 가운데를 들어 올려 볼록한 모양으로 상판을 만들고, 바닥은 청판석을 깔았다. 길을 3갈래로 냈다. 한가운데 넓은 길을 살짝 돋워 올렸다.

이 길은 임금만 지나는 길(御道)이다. 신하들은 양옆 좁은 길로 다녀야 한다. 멋들어진 돌난간을 세웠다. 동자석에 난대돌을 끼우고, 틈이 없이 화판돌을 결구시켰다. 2칸으로 나눠 꽃문양을 장식했다. 돌난간 머리는 연화보주형으로 장식한 법수(法首, 난간의 귀퉁이에 세운 기둥머리)다. 여러 형상의 동물들이 밝은 모습으로 앉아있다.

두 무지개 틀 사이 청정무사석은 귀면(鬼面)이다. 악귀를 막아내는 의미다. 그 아래 지대석에는 두 동물이 앉아 있다. 북쪽에는 현무를 상징하는 거북이고, 남측은 해태다. 지대석은 끝을 마름모로 하여 물의 저항을 줄이고자 했다. 금천교의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깝다. 그만큼 폭이 넓은 다리다. 길이가 13m이고, 폭이 12m이다.
 

돈화문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이다. 화성으로 행행하는 행렬이 이 문을 나서 운종가로 향한다. ⓒ 이영천

 
금천교를 지나 돈화문을 나선다. 돈화문 앞에서 남으로 쭉 뻗은 도로를 타고, 운종가에 이르기 전, 파자(把子) 앞에 있는 다리(단성사 앞)를 건넌다. 영조 이전엔 대나무로 엮은 다리 위에 흙을 돋아 만든 다리였다. 영조 때 돌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전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운종 2가에서 통운 돌다리(종로2가)를 건넜으나, 이 역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행행은 종루(보신각) 앞에서 좌회전 하여, 청계천 방향으로 접어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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