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7

1905년 을사늑약을 맞이하다

등록 2020.11.21 15:37수정 2020.11.21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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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식물 국가가 되다

1904년의 「한일의정서」에 의해 일본은 조선주차군을 편성하여 한반도 전역을 일본군의 계엄 아래에 두었다. 나아가 서울 및 그 부근의 치안・경찰권마저 박탈하였다. 또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두어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는 황실의 재산을 처분하여 황제의 활동을 크게 제약하였다.

1905년 11월 9일 일본 천황의 특사 이토(伊藤) 후작이 왔다. 한국인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였다.

대한제국의 민중들은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였다. 하지만 이토는 그의 스승 요시다 쇼인(1830~1859)가 주장했던 "일본이 조선, 중국을 정복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잊지 않았다. 일본 제국의 번영을 위해서 임진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장한 것처럼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 먼저 한국을 정복해야 함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선 지배의 길로 나아갔다.

대한제국은 미국의 중재를 기대하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이승만을 비롯한 외교특사를 몇 차례 보냈다. 7월 27일 가쓰타-테프트 밀약을 한지라 특사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것도 모르고 루즈벨트 대통령 딸이 오자 지극히 환대했다.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을 하였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에 동의한 미국과 영국, 양국은 만주에 진출하려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지원했다. 9월 5일 러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었다.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도・감리・보호의 권리를 승인했다. 당사자인 대한제국의 의사와 관계없이 미・영・러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유린했다.

"대신들이 알아서 처리해라." 광무황제는 늘 매사에 자신이 결정하지 않고 신하들에게 책임을 떠맡겼다. 1905년 11월 15일 오후 3시에 이토는 고종을 만나 협박하였다. 이토는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고종은 "외교권 이양을 반대하지 않지만, 외교권이 대한제국에 있다는 형식만이라도 남겨달라"고 애원했다. 이토는 거절했다. 광무황제는 "의정부 회의에서 결정하라"며 신하들에게 떠넘겼다.


폭탄을 넘겨받은 신하들을 이토는 16일 손탁 호텔에 불러 모았다. 이토는 청일전쟁을 통해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게 했고, 러일전쟁을 통해 서구 열강의 탐욕을 벗어나게 했음을 강조했다. 조선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위해 일본이 보호하기 위해 외교권 이양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신하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어느 나라인 줄 모르고 아부를 했다. 이완용은 "때에 따라 변혁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는다" 하였다. 하지만 한규설은 고종과 마찬가지로 "외교권을 갖는다는 형식만이라 남겨달라"고 간청하였다.

17일 오전 11시 일본공사관에 조선의 신하를 모아놓고 일본 공사관 하야시 곤스케가 외교권 이양을 요구했다. 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여론에 따라야 한다"라고 하였지만, 전제국가에서 입헌정치를 흉내 낸다며 일본 공사의 훈계를 들어야 했다. 저녁 8시경 이토는 군대를 끌고 덕수궁 안 회담장에 나타났다. 대신들은 어쩔 줄 몰랐다. 결국 이토는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보장한다"라는 내용을 추가하므로 외교권 이양과 황실 보존을 맞교환하였다.

18일 새벽 1시경,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사이에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은 제목조차 없는 문서였다. 내용을 보면 첫째, 일본 외무성이 대한제국의 대외관계 사무를 보며,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 없이 국제 조약, 계약을 맺지 못한다. 둘째, 대한제국의 외교 담당으로 통감을 두며, 개항장 및 기타 지역에 이사관을 설치하고 통감의 지휘 아래에 두며 사무 관리한다. 셋째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의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한다.

세 번째는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제 대한제국은 식물국가가 되었다. 직접 도장을 찍지 않은 황제는 스스로 면죄부를 받고, 신하들은 죽을 놈, 매국노가 되었다. 열강의 동의를 구하고 일제는 노골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열강은 기다린 듯이 밀물처럼 대한제국을 떠났다. 약소국 대한제국은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고 있었다.

늑약 이후 고종은 여러 시간 눈물을 흘리다가 피를 쏟으며 "대신들이 모두 일본과 한통속이 되어 짐을 협박하고 조인에 이르렀으니, 짐의 적자들은 일어나 혈비(血悲)를 함께하라"는 밀지를 내려 각 지방에 의병 봉기를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하(의정부 회의)에 맡긴 것 자체가 책임 회피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 운명을 결정짓는 국제조약에 대신들의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무효이다. 대한제국은 황제가 주권자인 나라였다. 고종은 외교적으로 무효임을 주장하기 위한 술책이라 할 수 있지만, 이는 열강의 속셈을 몰랐던 실패한 전략이었다.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늘 곤혹스러워했듯이 고종은 일본 측 요구에 동의하는 척하다가 되돌아서서는 의병에게 밀지를 내리거나 열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이는 고종의 생존전략이었다. 일본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으니 밖의 나라에 읍소하는 밀서 외교를 하거나 백성들의 힘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궐기를 요망한 것이다. 그는 일본제국에 당당하게 맞선 적이 없었다.

11월 23일 조약체결이 정식 공표되었다. 열강들은 대한제국이 보호국에서 일본의 한 주(州)로 편입되듯이 조만간 병합될 것으로 예견했다. 대한제국은 국제사회와 단절되고 고립되어 갔다.

이날을 목놓아 우노라!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 그의 논설은 을사늑약 체결의 문제를 대신에게 돌리고 일본에게 펜 끝을 향하지 않았다.(대한매일신문, 1905.11.20) ⓒ 이병길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실렸다. 이어 잡보(雜報)로 "오건조약청체전말(五件條約請締顚末)"이 국한문혼용으로 실렸다. 이 내용은 똑같이 『대한매일신문』 11월 27일에 실렸다. 장지연의 논설은 영문 번역하여 외국인도 읽게 하였다. 장지연은 경상도 상주 출신의 시골 선비였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민비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의병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었던 인물이었다. 장지연은 구금되고 신문은 정간이 되었다.

을사늑약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유생들은 상소하고, 관리들은 공직 사퇴를 하고, 학생들은 일본어 수업 거부 결의를 하고, 매국노를 처단하자는 등 반일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원래 일본을 불신했던 민중들과 이토의 동양평화론과 내정개혁을 통한 개화입국을 기대했던 개화 지식인들도 망국의 길에 들어섰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한국의 자주독립을 보장한다는 일본의 배신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대한제국의 독립은커녕 보호국이 된다는 충격은 핵폭탄급이었다. 친일파는 춤을 추었지만 민중과 지식인들의 망연자실적 상황은 반일 분노로 폭발하였다.

장지연은 논설 말미에 여전히 황제를 옹호했다. "(대신들은)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라며 조약의 책임을 전적으로 대신들에 돌렸다. 전국에서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 운동이 일어났다. 원로대신 조병세, 이근명, 심상훈, 민영환, 조동윤, 민종욱, 조병식, 이종건, 이용태 등이 그들이었다.

그 우두머리의 한 사람인 민영환은 자신의 명함에 빼곡하게 유서를 적고 자결하였다. 자신이 나라일을 잘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음으로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였다. 그리고 외국 공사들에게 대한제국의 자유와 독립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다. 조병세는 음독자살을 하였다.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또 그들을 비꼬는 시가 신문에 실렸다. "경축하네 경축하네/이천만 국민 다 죽어도 나혼자 살면 제일이네/안 입고 안 먹을리있나 돈과 비단은 안 챙겼겠나/고대광실 좋은 집에 예쁜 여자와 즐기고/금으로 지은 옷, 옥으로 만든 음식 먹으며 내 몸이 가장 중요하니/국민은 무슨 소용인가!"(『대한매일신보』, 1905.12.01. 「(賣國慶祝歌, 賣國大臣」)

윤두병은 "폐하는 잊기를 좋아하니 깨달았다가도 곧 잊어버리십시오"하고 비아냥거렸고, 훗날 헤이그 특사가 되었던 의정부 참찬 이상설 또한 노골적으로 황제에게 분노의 붓을 던졌다. "이 조약은 맺어도 망하고 거부해도 망한다. 망하는 것은 똑같은데 어찌 황제는 사직을 위하여 죽으려 들지 않는가."(『대한매일신보』, 1905.11.23.)라고 하였다.

이날은 목놓아 울어도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의 보호국이 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 없었다. 장지연은 마지막에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라고 울부짖었다. 온 나라가 울음바다가 되었고 분노로 치떨었다.

매국 단체인 일진회가 조약 찬성의 선언서를 발표했으나 이로 인해 오히려 배일사상이 더 높아졌다. 심지어 친일 관료들도 망국적임을 알고 있었다. 한국민들은 을사늑약이 곧 망국(亡國)을 뜻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외교권이 없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뻔하게 눈에 보이는 일이었다. 고종의 밀지나 밀사는 결국 나라의 힘이 없음을 나타낼 뿐이었다. 외교는 국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누구 하나 약소국인 대한제국을 도우려는 서구 열강은 없었다.
 

고종의 밀사 -을사늑약에 서명하지 않았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고종의 밀서외교는 강대국으로부터 외면당했다.(트리뷴,1906.2.8.) ⓒ 이병길

 
정공단의 아이들 분노로 울다

정공단 아이들에게도 을사늑약의 소식이 들렸다. 7살 즈음부터 아이들은 육영제(育英齊) 서당에 다녔다. 육영제는 지금의 정공단 자리에 있었다. 10살의 아이들은 세상에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 서당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잡보에 실린 조약 체결의 전후 과정도 알려주었다.

김영주는 울먹이며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믿었던 우리가 진짜 어리석은 인민이었구나! 동양 3국의 평화가 한국 독립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순 거짓말이었어.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었어! 동양 삼국의 평화가 아니라 분열이 더 뻔하고 나라는 망하기 직전이네."

최천택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어릴 때 활빈당이 양산과 언양에서 활동했다고 했는데 우리도 활빈당과 같이 의병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영주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의병은 명분은 있지만 지금은 우리 인민에게 오히려 피해를 입히고, 더욱 일본군이 우리를 지배할 기회를 줄 수도 있어."

"이미, 일본은 우리를 집어삼키고 있는데 저항하지 않고 그냥 잡아 먹힐 수는 없지 않잖아!"


천택이 말하자. 영주는 울먹거리며 말을 했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정부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나니. 어찌 저들을 가만히 두어야 하겠나. 척살하고 능지처참을 해도 분을 삭일 수 없네."

박재혁도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대신들은 문서를 찢지도 배를 가르지도 못하면서 벌벌 떨면서 저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으니 어찌 나라의 대신이라 할 수 있겠는가?"

최천택이 물었다.

"이제 나라의 권리를 되찾기는 어렵게 되었어, 총칼을 들고 나라를 찾는 의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태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노?"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을 의병이 되어 싸우기보다는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나 공부를 해서 실력을 길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의(義)는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박재혁은 분노에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어째 일본의 보호국이 된단 말인가? 이제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황제조차 진짜 강경하게 이토에게 대응하지 못하였으니… 외부대신 박제순은 일본인들과 협상할 권한은 있을지 모르나, 조약을 체결할 권한은 없어. 황제가 날인하지 않았으니 조약은 무효라고 보네. 폭거야!"

재혁은 이어서 차분하고 냉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황제가 주권자이나 책임의 중심에 있어야 해. 책임을 회피하고 서방세계에 독립을 구걸하듯 하고, 조약 체결의 책임을 대신에게 묻고, 밀지를 내려 의병으로 나서라고 하니, 참으로 줏대 없는 무능한 황제를 두었네."

영주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나서 한마디 했다.

"그런데 장지연의 논설에는 황제를 옹호하고 대신을 비난했지만, 왜 조약을 강제한 일본에 대한 비판이 한 줄도 없는 거야."

정말 장지연의 논설은 고종이 거부하였으니 무효라는 주장과 함께 을사오적을 격렬하게 비난하였지만, 침략자인 일본에 대한 공격은 한 줄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잡보에 조약의 부당한 체결과정을 그대로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일제의 사전검열을 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장지연의 논설은 조약의 부당함의 공격 대상을 일본이 아닌 내부로 돌린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당대 지식인의 시각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일본은 조선 민중과 지식인의 공격 대상에서 벗어나고, 한국인들은 서로에게 총질하였다. 황제의 위엄은 땅에 떨어지고, 적전 분열로 한국을 망하게 하려는 일제의 고도의 전략적 산물이었다. 한국 전체에서 반항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반항이 개별적이고 소규모이고 서로 연계되어 있지 않았고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한편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국제적 여론과 열강에 기대는 것은 현 시국에 대해 일본의 보호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입장인 동시에 사대주의적 근성의 산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오판인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명히 드러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적 몸부림이기도 했다.

재혁을 비롯한 정공단의 아이들은 정말 이날을 목놓아 눈물이 마르도록 울고 울었다. 눈물을 그치며 정공단의 아이들은 다가올 망국의 시절에 온몸에 분노와 함께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제까지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한다는 일본제국의 말은 거짓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매국 대신의 규탄과 처벌을 주장하는 가운데 한국민이 가야하는 길은 세 가지 길이 드러났다. 의병운동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길, 상소운동을 통하여 항일사상투쟁을 하는 길, 마지막은 교육운동을 통해 항일실력양성투쟁을 하는 길이었다.

의병과 같이 폭력적인 방법이나 일본 군대 철수를 주장한 상소 그리고 국민계몽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고 밖으로는 국제사회에 조약의 무효와 그 체결의 부당성을 호소하려는 복잡한 노선이 존재하는 시절이었다.

정부도 믿지 말고 일본도 믿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사태를 바라봐야 하는 시절이었다. 광무황제의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밀서외교는 열강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대부분의 지식인은 당장 일제와 대결하여 국권을 회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대세가 너무 기울어져 직접 대결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즉 국권이 침탈당한 원인이 국력이 쇠약한 때문이니 국력을 배양하여 후일을 기약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국력을 배양하려면 민중을 계몽하고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근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의병운동이 국권회복을 위한 직접적인 대응책이라면 국력배양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은 간접적인 대응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애국계몽운동의 주류는 무엇보다도 교육구국운동이었다.

국권 회복은 총칼과 붓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당시는 세계정세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성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시대였다. 역사는 시간이 흘러야 되돌아볼 수 있다. 정공단의 아이들도 역사적 시간과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역사는 아이들을 더 빨리 성숙시켰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덧붙이는 글 폴리뉴스에도 게재합니다.
#의열단원 박재혁 #박재혁 #최천택 #김영주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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