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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 어머니의 마지막 김장, '입맛 전쟁'은 여전하네요

부모님과 셋이 함께 만든 김치...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순간들

등록 2020.12.14 09:57수정 2020.12.1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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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미리 준비하신 양념들 ⓒ 이경희

 
"얘야~ 힘들게 뭐하러 여기까지 왔나. 내가 혼자 버무려도 되는데."


딸인 내가 도작하자 내년에 구순을 맞이하는 노모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하기야 동네에서 김치가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엄마에게 김장은 이골이 난 지 오래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배추가 산처럼 쌓여 있었던 기억이 난다. 100포기 훌쩍 넘기는 배추에, 무김치, 갓김치, 파김치, 동치미 등등 종류별로 김치를 담아내고 거기에 무짠지, 마늘장아찌, 깻잎장아찌까지 담아 항아리마다 쟁여두었다.

어린 삼 남매와 함께 먹을 겨울 양식을 온가을 내내 그렇게 하나하나 장만하셨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딸의 눈에 엄마는 더이상 모든 일을 척척 해내던 장군 같은 모습이 아니다.

올해까지만 하고 내년부터는 김장을 안 하시겠다는 엄마는 내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무채도 썰어놓고, 양념거리도 다 만들어 놓으셨다. 말 그대로 버무리기만 하면 됐다. 김장은 버무리기 전 과정이 힘들다는 걸 알기에, 딸의 일손을 덜기 위해 바빴을 엄마의 손길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구순 노모의 프로페셔널한 손놀림 ⓒ 이경희

 
배추를 사다가 직접 절여 김장하던 시절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절임 배추로 한다고 김장의 과정이 만만한 것은 아니다. 들어가는 양념의 종류만 해도 몇 가지인가? 엄마는 아직도 직접 달인 젓갈을 고집하신다. 가을철에 멸치젓을 사서 오랜 시간 끓이고 곱게 내려 준비하는 액젓은 김장뿐 아니라 다양한 요리에도 사용된다.

그리고 왜 그런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엄마는 생새우보다는 대하를 선호하신다. 대하 몇 마리를 사다가 껍질을 까고 새우살을 곱게 다져서 넣는다. 거기에 풀을 쑤고 다시물을 내고…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엄마표 양념이 만들어진다. 이제 만들어진 양념을 버무리면서 최종적으로 간을 맞추면 배춧속을 넣는다.


예전에는 이 과정을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했는데 이제는 세상을 떠난 분들도 많고, 자식들 주거지를 따라 이사하신 분들도 계신다. 어쨌거나 이제 엄마의 김장을 함께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내가 되었다.

건재하게 일상을 챙기는 부모님, 그저 감사합니다 

아버지도 구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건재한 것만으로도 자식들에게 큰 도움을 주시는 분이다. 내가 집에 도착하니 "무를 사 왔는데 네 엄마가 부족하다 해서 또 나가서 사 왔다"며 무용담을 전해주듯 몇 번을 자랑하신다.

하기야 그 연세에 장을 직접 본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무용담이기는 하다. 거기에 배달하면 비싸다며 항상 직접 사서 자전거에 싣고 오신다. 그렇게 섞박지 무까지 완벽하게 준비가 되었다.
 

티격태격 하시면서도 엄마는 아버지를 위해 가자미식해를 담가 두셨다. ⓒ 이경희

 
나는 배춧속을 넣는 것만이라도 내가 하겠다며 장갑을 끼고 버무리기 시작하는데 오래된 엄마와 아버지의 입맛 전쟁이 또 발발했다. 계속 짜다는 아버지, 계속 싱겁다는 엄마. 나는 그 사이에서 계속 간을 보다 내 입맛을 놓쳐버렸다. "아~ 몰라.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결국 김장 현장에서 아버지는 쫓겨나시고 엄마는 옆에서 조용히 나의 손놀림을 바라보는 것으로 휴전이 되었다. 

김치통 6개를 담아 넣고 겉절이를 무쳐 점심을 드시며 두 분 다 맛있다며 흡족해하신다. 올해까지만 김장하고 내년부터는 안 하시겠다지만 그런 다짐은 또 그때가 되면 무너지는 경우가 많으니 가봐야 알 일이다. 어쨌거나 그저 건강한 모습으로만 계셔도 고마운데 여전히 살림하고 계절 준비를 하는 부모님의 건재함에 감사할 따름이다.
#김장 #노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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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질풍노도 시기를 넘기고 있다. 이 시간이 '삶'을 이해하는 거름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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