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안되는 글을 왜 쓰냐면요

하루에도 몇 번씩 무기력해지는 요즘, 그럼에도 내가 움직이는 이유

등록 2020.12.23 15:15수정 2020.12.23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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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산 일출 집근처에 있는 월명산 일출 ⓒ 김준정

 
등산을 시작한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엄지발톱이 멍든 것처럼 까맣게 변하더니 빠져버렸다. 한 번에 빠진 게 아니라 그 일은 아주 서서히 일어났다. 새로운 발톱이 뿌리에서부터 자라기 시작했고 예전 발톱이 점점 밀려났다. 그러다 덜렁덜렁하는 예전 발톱을 내가 떼어버렸다. 나는 그 아래에 있던 울퉁불퉁한 새 발톱을 들여다보면서 생명의 신비와 다시 태어나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식으로 양쪽의 엄지와 검지 발톱이 차례로 빠졌다.    


이번에는 티눈이다. 처음에는 오른발 새끼발가락에 생긴 티눈 때문에 걸을 때마다 아팠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티눈 약을 티눈 주위에 바르다가 딱딱해지거든 떼어 내세요"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이길 "그래도 계속 생길 겁이다"라고 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티눈 약을 바르고 기다렸다가 떼어냈다. 놀랍게도 의사 말대로 티눈은 같은 자리에 계속 생겼다. 이건 티눈의 저주인가 싶을 정도였다.    

태풍의 눈이 있다면 티눈에도 핵이 있다. 이것이 제거되지 못해서 얼마 안가 다시 자라게 되는 거였다. 말하자면 티눈의 뿌리이자 통증의 진원지다. 이를 발본색원을 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에 나섰다. 말로만 설명해도 되는 걸 굳이 '혐오주의'라고 하면서 사진을 첨부한 블로거들이 많았다. 덕분에 나는 외롭지 않았고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에게는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쾌락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티눈을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티눈과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아니 나 스스로에게 매번 하는 질문이다. 힘들지 않았던 산이 없었고 오르면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상상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걷다 보면 배경은 희미해지고 주인공만 클로즈업되는 영화 장면처럼 나를 둘러싼 사람, 일, 환경이 의식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왔다. 반대로 하나의 생각만 뚜렷하게 떠오를 때도 있다.     

햇볕을 쪼이고 바람을 타고 온 계절의 냄새를 맡다 보면 '이 순간, 이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생겨버린다. 연화관에 가야 영화에 집중할 수 있듯이 산에 와야 자연에 심취할 수 있다. 하는 일이 잘 되어도 계절의 변화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산다면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여유 없는 생활이 지속되면 정신이 피폐해지고 삶의 의욕이 메말라가는 게 아닐까? 우리 몸은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떨어지듯이 정신적인 자원도 줄어드는 것 같다. 뭐든 해보자는 마음보다는 위축되고 주저하게 되는. 약한 체력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정신적인 면도 마찬가지다. 산길을 걷는 일은 이런 정신에 물을 주는 일이 아닌가 싶다.


산을 오르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도 많다. 그러면 가슴이 마구 뛰면서 이 생각을 흩어지지 않게 잘 가지고 가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이 생긴다. 그러다 픽 웃음이 나면서 사는 게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게 재미있다면 나이가 얼마가 되든 계속 신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기도 한다.    

8남매 중 여섯째인 아빠는 어렸을 때 자주 배를 곯았고 세상에서 배고픈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고 믿게 되었다. 아빠의 잠재의식에는 늘 생계에 대한 불안이 있고 그 불안을 동력으로 젊은 시절부터 일에만 매달려왔다. 나는 그런 아빠의 최고의 수혜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였다. 아빠에게 삶은 하나의 트랙 위의 달리기였고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저 끝없이 달리는 것만 필요했다.    

70대가 된 아빠는 더 이상 자신이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TV 보는 일 말고는 어떤 취미도 없는 아빠가 일하지 않는 시간을 앞으로 무엇을 하며 보낼 수 있을까? 아빠의 느낄 당혹스러움과 막막함이 안타깝고 안쓰럽다.

선택할 수만 있다면 나는 자연을 즐기듯 인생을 살고 싶다. 어떤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걸어가는 게 아닌 내 두 발로 산을 오를 때처럼 기꺼이 땀을 흘리고 싶다. 몸에 힘을 주고 다리의 뻐근함을 참으면서 산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내 안에 힘이 채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건 감히 용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코로나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무기력함을 느낀다. 밤이 되면 하루가 이렇게 갈 수도 있구나, 연말이 되었지만 일 년이 이렇게 지나갈 수도 있구나, 하는 허망함이 나를 휘감는다. 어쩌면 산다는 게 이런 허무함과 싸워나가는 일이 아닐까?

책도 안 되는 글을 나는 왜 쓰는지, 밥은 왜 먹고 아침마다 왜 일어나는지, 이런 물음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요즘이다. 남이 볼 때는 엉성하고 주제넘어 보이는 글이라도 나에게는 중요하고 필요하기 때문에 쓴다(고 마음먹기로 했다). 남한테 괜찮아 보이는 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더 깊게 파고들고 싶은 주제의 글을 쓰자고 결심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생각으로 뒤척인 밤을 보내고, 나는 월명산을 올랐다. 7시 35분, 일출이 시작되었다. 언제나 처음처럼 떠오르는 태양이 대단하고 고마웠다. 어디에 있더라도 저 태양을 볼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용기를 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일출 #무기력 #글을 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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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봐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학원밥 18년에 폐업한 뒤로 매일 나물을 무치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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