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11

정공단 아이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다

등록 2020.12.28 10:51수정 2020.12.28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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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기록화 나랏빚을 갚는 일에는 남녀노소, 신분 귀천과 관계없이 참여하였던 전국민적 운동이었다. 하지만 운동의 목적에 비해 구체적 실천방안과 조직이 미흡했다. ⓒ 국채보상운동기념관(대구)

 
국채보상운동, 부산에서 시작하다

당시 대한제국은 식민지가 없는 황제의 절대 권력으로 유지되는 나라였다. 황제의 신하와 백성(신민, 臣民)은 단지 황제의 명령을 받드는 존재였다. 황제는 신민을 국민이나 시민으로 여기지 않았다. 제국의 신민 역시 국민의 자각은 적었다, 최익현의 죽음은 신민의 죽음이었다. 황제가 주권자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면 국민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시대로 전환됐다.

최익현의 장례를 주관한 상무사는 부산의 물상객주가 중심인 단체였다. 1876년 개항 이후 부산이 국제무역항으로 변모하자 많은 객주가 모여들었다. 객주는 물화의 매매를 알선해 주고 흥정을 붙여주고 그 대가로 받는 구문(口文)을 받는 상인이다. 일본 상인들의 활동 범위가 개항 초기에는 전관거류지로부터 사방 10리(5km)로 제한됐지만 1882년 이후 50리(25km)로 확대됐다. 하지만 일본 상인의 내륙 통상은 쉽지 않아 객주의 위탁매매가 성행했다. 당시 부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하단포와 구포, 그리고 부산항을 중심으로 객주들이 활동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 이후 낙동강 포구의 객주들도 물류의 중심인 부산항으로 몰려들었다. 부산항 무역의 10중의 8, 9는 객주의 손을 거쳐 외국 상인과 거래됐다. 부산항 객주들은 주로 일본 전관거류지와 가까운 초량에 모여 상업 무역에 종사했다. 1900년대 초 100여 명의 객주가 활동했다. 때론 특정 생산지역의 독점권과 특정 취급 물품의 독점권 같은 배타적 권리를 보장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자유무역의 원칙에 따라 일반 객주에게 확대되어 배타적 독점권은 폐지됐다. 객주들이 자기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가 1883년 1월 상무회의국(商務會議局)이 설립됐다. 오늘날 상공회의소와 같은 객주 동업조합이었다 1896년 상무사(商務社)로 개편됐다.
  

동래상업회의소 정문(1908) 부산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던 부산항상무회의소의 후신인 동래상업회의소는 훗날 부산조선인상업회의소(1914)로 발전하였다. ⓒ 부산상공회의소(1989)

 
1907년 1월 최익현의 장례식 전후 부산항 상무회 유지들 사이에 나라의 채무 이야기가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에 국권이 빼앗기고 통감부에 의해 모든 일이 진행됐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교육 제도의 개선, 금융기관의 확장 정리, 도로 항만 시설의 개수 확충, 일본인 관리 고용 등 각종 명목으로 고이율의 차관을 들여왔다. 명분은 대한제국의 건설이었지만 실상은 일본 식민지 건설과 침략을 위한 교두보를 위한 것이었다. 즉 대한제국을 일본의 반식민지화하는 데 차관은 사용됐다. 그 금액이 1300만 원 정도였다. 당시 한국 정부의 1년 총예산에서 세입액이 13,189,300여 원이고 세출은 13,963,000원이어서 세출의 부족액이 773,000여 원에 달했다. 이러한 적자 예산으로는 거액의 외채를 상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외채를 상환하지 못하면 우리의 땅이 일본 땅이 될 거라는 위기의식을 부산항상무회 유지들은 느꼈다. 담배를 끊어서 그 돈을 모아 국채를 갚자는 단연동맹(斷煙同盟)을 결성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담배의 천국이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았다. 군인들이 휴식 중에 흡연하는 연기가 마치 밥 짓는 연기와 같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담배를 피웠다. 임진왜란 직후인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유럽에서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에 표착(漂着)했던 네덜란드인 하멜(Hendrik Hamel, ?∼1692)이 <하멜 표류기>에서 "현재 그들 사이에는 담배가 매우 성행해 어린아이들이 네다섯 살 때 이미 이를 배우기 시작해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라고 할 정도로, 17세기 중반에 이미 흡연자가 많았다.

부산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적 역할은 부산항상무회의소 회원들이었다. 국채보상운동 초기에 설립된 '동래부국채보상일심회'의 취지서에 보면, " … 지난번 우리 고장의 부산항 상무회가 국채보상에 뜻이 있어 단연동맹의 선창하매, 이어 대구 광문사가 함께 공포하고 또 경성에서 이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했으니…."했다.

국채보상운동은 부산에서 시작해 대구에서 불을 붙여 결국 전국으로 확대됐다. 부산항상무회의소에서 단연동맹금을 납부한 사람들은 주로 객주나 상업관계자였다. 1917년 3월 16일 1차로 안순극 외 30명, 기생 이화 외 5명, 총 36명이 10원 80전을 의연금을 내었다. 2차로는 안순극 외 77명과 부인회에서 29원 50전을, 3차로는 정자범 외 197명 및 부인회에서 503환 32전을 내었다. 최익현의 장례에 호상으로 참여한 양산의 권순도는 부산상무회원으로 1907년 3월에 각 30전을, 또 5월에 단연동맹(斷烟同盟) 명의로 2회에 걸쳐 권순도는 각 30전을 기부했다.
  

부산상무회의소 국채의연금 1차 명단 부산에서 출발한 국채보상운동은 상인과 기생의 의연금에서 시작하여였다. ⓒ 대란매일신보(1907.3.16.)

 
동래부국채보상일심회 발기 주체는 동래부의 작대청, 별군관청, 장관청 등에 소속됐던 무임 출신들로 조직된 동래기영회 소속원들이었다. 당시의 동래부윤은 김교헌이었다. 1910년까지 부산 전 지역은 동래부 관할이었다. 부산지역은 부산항과 인접해서 문명개화, 계몽자강의 시대적 분위기가 일찍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동래에는 독립협회 경남지부부터 시작해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태극학회, 교남학회 등의 5개 단체 지회가 설립됐다. 즉 한말에 결성된 계몽단체의 지회가 남한에서는 가장 많이 설치된 곳이었다. 아마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제의 경제적 침탈이 급속히 진행됐던 지역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국으로 확산한 국채보상운동, 신민이 국민으로 전환되다
  

국채보상운동 당시 발행된 의연금 영수증 1907년 4월 4일 강화군 하도면 장곶동 주민들이 64원을 냈다는 내용이다. 영수증 아래쪽 ‘yang’은 양기탁의 영문 사인이다. ⓒ 국채보상기념사업회(대구)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은 1월 29일에 시작됐다. 서상돈(徐相敦, 1851~1913)이 "국채 일천삼백만 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국토라도 팔아서 갚아야 하므로 이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피우지 말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갚자"라고 제의함으로써 시작됐다. 서상돈은 자신부터 8백 원을 내놓았고, 회원들도 만장일치로 그의 제의에 찬동했다. 이에 광문사 사장으로 있던 김광제(金光濟, 1866~1920)가 당장 실시하라고 해 연죽(烟竹, 담뱃대)과 초리(草厘, 담뱃갑)을 없애고 석 달 사이 담뱃값 육십 전과 돈 십 원을 의손(義捐)하니 모든 사람이 사장의 결심에 찬성하며 각각 의연금을 출의했는데 당장 2천여 원이 모였다.

발기인인 서상돈은 독립협회의 회원, 만민공동회의 간부로서 자주독립‧자강(自强)‧민권(民權)을 위해 투쟁해 온 인사였다. 그리고 발기단체인 광문사도 황국협회의 기관지로서 보수적 성격을 지녔던 <시사총보(時事叢報)>의 후신이지만 당시의 애국계몽사상가들에 의해 새로이 발족한 출판사로 이곳에서 실학자의 저서를 간행했다.

대구광문사 내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는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했다.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유가 국민의 단결된 힘에 있었다고 했다. 군사에 감사대(敢死隊)가 있어 죽기를 결심하고 백성들은 패물을 팔며 군사 물자를 보태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일본의 5천만 민족의 하나하나가 열심혈성으로 충(忠)과 의(義)를 따랐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이하자고 했다. 황제의 신민에서 주권재민의 국민으로 변하는 운동의 신호탄이었다. 발기인의 취지서는 무능한 정부에 나라의 존망을 맡기지 말고 국민이 단결해 국채보상을 추진시켜 국가 주권과 국민주권을 찾자는 내용이었다. 즉 경제적 자주권을 회복해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자는 운동이었다.
 
"신하와 백성된 자는 충성에 따르고 의(義)를 숭상하면 그 나라가 흥하고 그 백성이 편안하며, 충성하지 않고 의(義)가 없으면 곧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멸하게 된다. … 지금 국채 일천삼백만 원이 있으니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으로, 현재 국고에서 갚을 형편이 못 되니 2천만 민중으로 3개월 기한해 담배 피우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각 개인에게서 매월 20전씩을 거둔다면 일천삼백만 원을 모을 수 있으며, 만일 그 액수가 미달할 때는 일 원, 십 원, 백 원, 천 원의 특별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은 즉 모든 국민이 깨닫고 모두 일어나서 합심 단결해 국채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라."
 
대구지방에서 발기됐던 국채보상운동은 드디어 서울에서 1907년 2월 22일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립하고 회칙을 제정하는 등 구체적 실천 방략을 가지고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국채보상운동 참가자들의 이름과 의연 액수는 제국신문, 만세보,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문, 경향신문에 명단형식으로 실려 있다. 의연자 명단은 2월 18일, 제국신문이 게재한 서울 정동의 고용인(雇人) 25명이 20전씩 의연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908년 10월 31일 황성일보에 실린 황해도 봉산군 사원면의 156명을 끝으로 한다. 위의 5개 신문은 1907년 5월 14일 4,200여 명을 위시해 총 424일 동안 매일 평균 500여 명의 의연자 명단을 일반에 광고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의연 명단을 추정해 보면 총 31만9천여 명이 참여했다. 성인 남성 20명 중 1명이. 또 17가구 중 한 가구가 운동에 참여했다.

모금 총액은 186,164원이었다. 의연 운동은 1907년 2월 약 10일 동안 1,100여 명이 참여했고 3월에는 1만5천여 명, 이후 4, 5, 6, 7월에 각각 4만8천, 6만, 4만, 4만8천 명이 참여했다. 7월 중순부터 고종의 양위가 진행되고 31일 군대해산과 정미의병의 전개되는 등 급격한 정세변환을 거치면서 8월에 3만6천, 9월에 1만4천, 10월에 1만1천, 11월 7천, 12월 3천 명으로 의연자 명단 보도는 급속하게 감소하고 있다.

1907년 통감부의 통치로 나라의 재정이 파탄나는 지경에 이르자 신민들은 인민으로 국민으로, 나라의 주인으로서 국채를 갚는 운동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상인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지만 점차 노동자, 군인, 관리, 학생과 승려, 봇짐장수, 주부, 심지어 머슴, 기생, 백정, 걸인, 창부까지 전 국민이 참여해 재정적 독립을 꾀하자는 국권회복운동에 동참했다. 신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드는 국민운동이었다.

심지어 일본인과 일본 유학생, 미국 동포들도 의연금과 의연서를 보냈다. 당시 신문들은 의연금 명단을 실어 언론들이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의 원동력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토 히로부미조차 "자기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한 마디가 한국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라고 까지 했다. 결국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대한매일신보>의 배설과 양기탁을 배제하는 계략을 꾸미고 신문을 폐간하고 친일 신문인 <매일신보>로 바꾸는 한 계기가 됐다.

광무황제도 2월 26일 "신민이 나라를 근심해 이런 일을 하는데 짐이 어찌 모른 척하겠느냐"면서 궁중에서도 담배를 끊도록 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농공상부의 잔치에 신민들은 분노의 돌을 던졌다. 황태자의 생일날인 춘추경절은 사회단체와 학교가 휴무하고 거리에는 태극기가 펄럭이며 거리에는 등을 달아 밝게 하고 경축가와 만세 천세를 부르며 대한제국의 무궁을 축원했다. 국가 경축일이었지만 주머니 쌈짓돈을 아끼며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신민들이 있는 반면에, 상공부에서 기생과 창부를 불러 함께 놀았다. 이것을 본 병사가 분노하며 "자갈돌이 비처럼 관의 유리창을 난타하며 분쇄하는" 돌팔매질을 했다. 실재 관료들과 부자들은 의연금에 동참을 적게 했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남자들이 담배를 끊으면서 하는 운동에 여성들의 동참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여자도 나라의 주인임을 천명했다. 대구 남일동의 여성들은 "나라 위한 마음과 백성 된 도리에서 어찌 남녀가 다르리요."하며, "여자는 나라 백성이 아니냐."며 각자가 소지한 폐물을 가지고 참여하자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각자의 패물 총 13냥 8돈쭝을 의연했다. 여성도 국민임을 선언한 것이다.
  

부산항좌천리감선의연부인회 취지서 - 여성이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원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바로 국채보상운동이다. ⓒ 대한매일신보(1907.04.19.)

 
여성들은 먼저 국채보상운동 단체를 설립했고, 국민으로서 의무는 남녀가 같기 때문에 국채보상운동에 남성만이 참여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여성이 추진한 국채보상운동은 주로 단체를 통한 기부금 모금과 폐물인 반지와 금장 의연, 절식 운동이 중심이 됐다. 의연 금액을 보면, 여성들의 참여 열의에 비해 평균 의연 금액은 그리 높은 액수가 되지 못했다. 여성의 경제적 활동 참여 미흡과 가부장적 사회 체제 때문으로 보인다.

국채보상운동은 좌천동 마을에도 알려졌다. 당시 부산 좌천동은 일신여학교의 영향으로 진보적 의식을 가진 여성들이 많이 생겨났다. 구국을 위한 활동에는 남녀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경제적 상황이 남자와 다르기에 절제, 절약의 방법이 대두됐다. 그래서 감선(監膳), 즉 밥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여서 그 돈을 아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부산 좌천리에 사는 부인들이 주도해 '부산항 좌천리 감선의연부인회(減膳義捐婦人會)'가 결성됐다.

숙부인 장씨(朴정喜의 처) 등이 중심이 되어 아침저녁 반찬값을 매일 3~4푼씩 아껴서 국채보상금에 더하자는 취지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취지서에서 "나라가 있은 뒤에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은 뒤에 나라가 있는지라. 외채 일천삼백만 원을 갚지 못하면 우리 대한강토 삼천리를 보존하기 어려워라. … 남자만 국토에 사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생명 보채하는 것은 일반이라 충군애국지심이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했다. 방법으로는 "우선 살림에 절용해 조석반선가(조석 반찬값)에 매일 삼 사 푼씩만 줄여도 한 달 정도면 남는 것이 신화 이십 전 가량이나 될 것이니 국채보상하는 데 다소를 가리지 말고 수력구취해 국토를 완전하고 국권을 회복합시다."라고 했다. 발기 당시 20명의 의연금 액수는 4월 90전이었고, 7월 2차에는 16명이 동참해 7환 42전을 의연했다.

좌천리 부인들의 의연 금액은 부산의 다른 지역 여성들에 비해 낮았다. 참여 열기와 국권 침탈에 대한 위기의식은 상당히 높았지만, 이들이 처한 경제적 상황은 어느 지역보다도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단체를 결성해 구국운동에 나서는 첫 출발점이 국채보상운동이었다.

재혁이 서당에서 공부하고 집에 들어가니, 모친 이치수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 중이셨다. 그런데 모친이 작은 항아리에 한 숟갈 보리를 담고 있으셨다.
 
"어머니, 뭐 하세요?"
"응, 수혁이구나. 나랏빚이 많다고 해서 우리 집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어쩌시려고요."
"반찬을 아낄 돈은 없으니 보리쌀이라도 끼니마다 한 숟가락 모아서 의연금으로 낼까 한다."


세상일에 대해 모르실 것 같은 모친도 좌천리 부인회의 감선운동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재혁은 자기도 국채를 갚는 일에 동참하리라 생각했다.

다음날 정공단에 있는 육영학교에 갔다. 육영재에는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봄날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뭉실뭉실 떠다니고 있고 부산 앞바다는 햇살에 반짝거려 눈부셨다. 육영학교 김상하(金庠達)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을 했다.
 
"제군들도 이미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국채보상운동에 대해서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른들은 담배를 끊고 부인들은 감선하고 반지를 내놓고 있다네. 전국 방방곡곡에서 땔나무를 팔고 품을 팔아서도 모금을 하고 있다고 하네. 제군들도 들었겠지만, 부평동의 명월루 기생인 김화일(金化一), 최봉화(奉化) 향란(香蘭), 국향(菊香), 류색(柳色), 추월(秋月), 봉선(봉仙), 명월(明月), 매화(梅花), 도홍(桃紅), 화선(花仙), 농월(弄月)이 각 1원을 의연했다고 하네.

또 망해루(望海樓) 기생인 조영선(조善英), 이윤옥(니윤玉), 운선(雲仙), 명월(明月), 계향(桂香), 초월(初月), 선도(仙桃)는 각 2원을 내놓고, 또 선옥(仙玉), 월선(月仙), 국향(菊香), 산홍(山홍). 도화(桃花), 죽향(竹香), 월향(月香), 옥선(玉仙), 류선(柳仙), 매향(梅香), 계화(桂花), 취동(炊童, 부엌도우미)이 각 1원을 내놓고 또 다른 취동이 50전을 의연했다고 하네. 범어사 승려 94명도 63원 10전을 의연했다. 또 걸인인 김덕이(김德伊)는 40전, 장문필(장文必)과 이월범(니月凡), 백연업(連業), 황양근(黃良根), 이억조(니億兆)는 각 20전을 의연했다네. 무녀도 나서고 있다네. 가장 비천하다고 손가락질하고 천대받는 기생, 걸인, 무녀까지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는데 배움에 있는 여러분도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는가?"
정공단의 아이들은 내심 부끄러웠다. 저번 최익현 장례식에서도 기생 비봉이 제문을 지어 바치지 않았던가. 작년 겨울에는 동래의 기생 류선(柳仙), 소춘(小春), 비봉(飛鳳) 세 명이 여자를 교육하기로 협의해 재산을 출연해 여학교를 설립하지 않았던가. 이 세 명의 기생은 부산항상무회의소단연동맹의 2차 의연금 명단에 있으며 각 30전을 의연했다. 이들은 여성해방을 추구한 부산 사상기생의 선구자였다. 당시 여성 중에서 언문을 깨치고 예술적 재능을 가진 이는 기생들 뿐이었다. 기생은 당대의 교양인이었기에 가장 먼저 선진적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의 삶이 남들이 보기에는 비천했지만 모든 기생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국채보상에 참여한 기생은 아마 창부(娼婦)보다는 예기(藝妓)일 가능성이 높다. 재혁은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나라가 위태로운 데 가만히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제일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김영주였다.

"우리가 돈을 모은다고 해도 얼마나 모으겠어. 우리 짚신을 만들어서 시장에 팔면 어떻겠냐?"
"맞다. 참 좋은 생각이다."


아이들이 모두 맞장구를 쳤다. 그날부터 아이들은 재혁이 집에 모여서 짚신을 만들었다. 먼저 볏짚을 구해서 깨끗하게 추려서 물을 뿌려 촉촉하게 만들어 만지기 좋게 했다. 손바닥으로 싹싹 비벼가며 짚으로 새끼를 꼬는데 마디가 고르게 했다. 때론 손바닥에 침을 묻혀가며 꼬았다. 모두 열심이었다. 아이들은 만든 짚신을 모아서 자성대 근처 부산진 시장으로 갔다. 장날이라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짚신을 파는지 사람 구경하는 지. 아이들은 이래저래 재미있었다. 박재혁, 최천택, 김영주, 백용수 등 정공단 아이들은 반찬값 아끼기. 절미운동, 단연운동, 그리고 짚신 팔기 등으로 모은 돈 21전을 국채보상의연금으로 내었다. 당시 부산육영학교에서는 교장과 중학생 2명, 학동 73명 등 총 75명이 총 15원 80전을 의연했다.
  

부산육영학교 학생들의 국채보상 의연자 명단 - 0 안의 최천택, 박재혁, 김영주, 백용수가 정공단 아이들이다 ⓒ 대한매일신보(1907.05.22.

 
국채보상운동은 각계각층이 참여한 범국민적 운동이었으나 운동의 원리나 체계적 조직적인 지도부가 없었다. 특히 운동의 주도 세력이 사회정치 경제적으로 미약했었다. 무엇보다 사회지도층이나 지배계층, 부자들의 참여가 미흡했고 운동 참여도 지역적으로 편차가 심했다. 예컨대 부산과 동래지역은 총 2,149명이 참여해 1,520,675원을 모았지만, 의열의 지역 밀양은 3,314명이 참여해 1,426,700원을, 경주는 6,361명이 참여해 2,190,427원을 의연했다. 경남 안의면은 1,271명이 참여해 647,190원을 의연했지만, 평양은 64명에 36,725원이었고,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대구는 247명에 1,173,400원이었다.

나라의 주인의식은 상류층보다 하류층에 강했다. 아래로부터의 자각은 신민이 국민이 되는 계기가 됐다. 국채보상운동은 암울한 상태의 한 민족에게 국권회복이라는 목표의식을 분명해준 애국계몽운동이었다. 하지만 지도층은 분열됐고 자발적 모금에만 치중했을 뿐 구체적 외채 보상 방안이 없었다. 통감부는 국채보상운동의 배후에 청년회, 자강회 등의 단체가 있고 궁중도 암암리에 지원하고 있다. 국채 보상을 표방하나 내용은 국권회복을 의미하는 일종의 배일운동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국채보상운동 의연자 및 액수 현황 국채보상운동 참가자는 평범하고 비천한 계층이 많았고 금액도 손때묻은 돈이 많았다. ⓒ 한상구(2015)

 
결국 일제는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대한매일신문의 사장 배설(裵設, Ernest Thomas Bethell)의 추방 공작을 하고, 총무인 양기탁을 국채보상금 횡령 혐의로 구속했다.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왜곡해 국민의 불신감을 높여 결국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 검사는 양기탁의 제4회 공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선고가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일제 통감부의 의도와 다른 구형이었다. 양기탁은 석방됐지만 운동의 순수성은 일제에 의해 훼손됐고 사람들도 참여가 줄었다. 1907년 7월 중순 광무황제의 양위와 군대해산으로 국채보상운동은 그 막을 내리고 다시 의병의 시대로 전환됐다.

1909년 국채보상금 처리회(회장 유길준)를 조직해, 1910년 1월 흥사단 회관에 사무실을 두고 사업을 했다. 각 단체에서 모았던 의연금을 모아 토지를 매입하고 그 이자로 교육사업을 하고 민립대학기성회 기금으로 쓰고자 했다, 1910년 9월 20일 국채보상금처리회는 교육기본금관리회로 개칭됐다. 유길준 등이 관리했던 관리회의 보상금 약 9만여 원은 12월 12일 전부 총감부에 납입했고, 국채보상금총합소장 윤웅렬 등이 관리하던 4만2천여 원 전부를 14일 경무 총감부에 보관했다. 결국 국민의 피땀으로 모은 국채보상금은 총감부에 빼앗기고 말았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폴리뉴스에도 게재됩니다.
#박재혁 #의열단원 박재혁 #국채보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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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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