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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함만 남긴 한-EU 무역분쟁의 결말

최종보고서에조차 언급되지 못한 사회복무요원 강제노동 문제, 우려와 교훈은?

등록 2021.01.28 10:11수정 2021.01.2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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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기사에서 흔히 '공익'으로 불리는 현행 사회복무제도가 국제기준으로 강제노동에 해당하며, 문재인 정부가 비준하려고 하는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지적했다(관련 기사 : 강제노동국가 오명, 꼼수로는 못 벗는다). 2019년 EU는 한국 법제가 노동기본권을 침해하는 점을 문제삼아, 한-EU FTA체결 당시 약속했던 ILO기본협약 비준 노력이 미비하다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무역분쟁을 제기했다. 

그리고 1월 20일, 무역분쟁을 중재하는 전문가 패널의 최종보고서가 나왔다.
  

전문가 패널 보고서 표지. 원래 패널 의장을 맡았던 피넌스키 변호사가 갑자기 사망하여 질 머레이 박사로 바뀌었다. ⓒ 고용노동부

 
아무 설명 없이 판단을 배제한 한국의 강제노동 문제

고용노동부의 25일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전문가패널의 결론을 아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한국정부가 ILO 협약 비준을 위한 노력을 하기는 했으니 FTA 위반까지는 아니다 (satisfy the legal threshold of the provision).
2. 하지만 한국 노동법 중 문제가 있는 부분이 여전히 있기는 하다.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 인정 문제, 노동조합 임원의 범위 문제)
3. ILO 105호 협약은 하필 비준 안하려고 하던데, 조만간 비준할 것을 기대한다.
  
정부가 브리핑에서 아전인수격으로 보고서를 해석한 부분이 없지 않은 것도 논란이지만, 이번 보고서 발표에서 가장 의아한 점은 사회복무요원의 강제노동 문제에 관한 판단이 빠졌다는 것이다. EU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야 충분히 납득이 갈 일이지만, 제기된 문제에 대한 판단을 아예 배제한 건 이상하다.

징조는 지난 2020년 10월에 있었던 심의에서부터 보이긴 했다. 사회복무제도 관련 EU측 질문은 하나밖에 없었고 한국측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현행 병역법 개정으로 사회복무요원들에게 현역복무를 할 선택권을 주므로(!) 강제노동이 아니게 된다는 논리]의 반복으로 일관했다. 오히려 한국측의 관련 질문에 EU는 엉뚱하게도 이 문제를 깊게 들여다볼 생각은 없다는 뉘앙스의 답변으로 얼버무렸다. 첫 제출문에도 없었던 내용이라, 당시에도 특별히 전향적인 판단이 나올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기된 법적 쟁점을 별도의 설명 없이 통째로 고려에서 제외한 것은 절차적인 영역에서 흠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무역과 관련된 노동 문제(trade-related aspects of labor)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노동기본권(fundamental rights) 문제가 이번 분쟁에서 다뤄질 수 있다는 점을 패널들이 보고서에서 천명한 것과는 모순된다.

어쨌거나 최종보고서는 나왔고 분쟁은 종료되었다. 한국은 '노동후진국' 딱지가 붙는 것을 가까스로 회피했지만 현 노동법 체계가 국제기준에 미달한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이 국면에서 제기될 수 있는 걱정과 분쟁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하나씩 짚어보려 한다.

우려 하나, 불법에 익숙해질 정부

먼저 우려. 이런 상황이 정부의 병역법 개정을 정당화시키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전문가패널의 판단을 국제사회가 암묵적으로 사회복무제도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엄밀히 하자면 '판단하지 않은 것'이지만, 정부는 '판단하지 않았다'를 '문제되지 않는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할 것이다.

ILO의 권고에 반하는 노동법 개정안을 내놓고도 이것을 마치 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국내법을 개정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식으로 포장해서 전문가패널들에게 내세우고, 개정안 내용이 막연하고 불투명해서 ILO 기본협약에 부합하는지 판단하지 않는다는 전문가패널의 결정까지(section 195) '협정문 위반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솜씨를 보면 지록위마가 따로 없다.
  

고용노동부 박화진 차관이 1월 25일 전문가 패널 최종보고서에 관해 E-브리핑을 하는 모습. ⓒ 고용노동부

 
결국 잃어도 본전 아니냐, 즉 국제사회에서 지적당하지 않으면 사회복무제도를 유지할 수 있으니 이익이고 지적당한다 해도 시간을 벌면서 버티면 된다는 마인드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어떤 조직이 불법에 익숙해지는 전형적인 패턴이다. 이런 판단 하에서 강제노동협약을 비준할 시, 이집트와 터키의 사례처럼 ILO에게 지속적으로 사회복무요원 문제 때문에 협약위반국으로서 지적당하게 될 수 있다. 과거에는 협약이라도 비준하지 않았었지만, 협약비준까지 한 상황에서는 더 큰 구속력 하에서 제재대상이 될 수 있다. 

교훈 하나, 국제협약은 부차적이다

다음은 교훈. 현 FTA 노동조항이 궁극적으로 노동기본권 향상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노동과 무역을 연계하는 선진국의 통상압력이 개발도상국 인민들의 노동기본권을 위한 것일까? 현실에서 FTA 노동-무역 연계조항은 보호무역주의를 관철할 수 없는 세계화 시대 자유무역 압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3세계 국가들에게 강력한 노동규제를 따르게 함으로써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보호하고 노동조합의 반발을 무마하는 명분으로 활용된다. 한-미 FTA에서 드러나는 미국의 통상정책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한-EU FTA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물론 보호무역 수단으로서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미FTA가 무역제재를 강조하는 반면, EU의 기본적인 접근법은 좀 더 높고 포괄적인 노동기준을 요구하되 대화를 통한 해결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개발도상국의 노동인권 향상을 자국산업의 상대적 이익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상대국의 경제적 잠재력을 높이는 계기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한-EU FTA에서 노동조항 위반에 대해 제재를 규정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까닭이다.

문제는 미국식 접근은 미국 자신이 유별날 정도로 ILO 기본협약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ILO 기본협약 비준 문제로 한국정부를 상대로 FTA 노동조항을 현실적으로 발동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점, 과테말라를 상대로 패소한 경험에서 보듯 실제 제재 발동시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다는 점 때문에 현실에서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정부가 자국의 노동기준을 강화시키고 ILO 기본협약을 비준하는 등의 변화를 통해 보호무역을 관철시키려는 태도를 보인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지만, 당분간은 쉽지 않을 것이다. 최우선 타깃인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동맹국을 상대로 한 무역분쟁은 자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EU의 접근법은 이번 무역분쟁 과정에서 그 한계를 드러냈다. 무역제재가 없다면 적어도 시민사회의 협력과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져 각국 내에서 여론을 만들고 사회적 대화나 시민사회-노동계의 국제교류 등을 통해 내부 변화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같이 국내 산업의 패권을 쥐고 있는 기득권의 지지와 압력에 따라 '중상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정부를 상대로는 쉽지 않다. 자랑할 때는 G10 멤버임을 내세우고 불리할 때는 개발도상국 코스프레를 하면서 자국의 특수성을 고려해달라고 읍소하는 전략을 천연덕스럽게 내세우는 것에 시민들은 익숙하다.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서 강제노동 문제는 아예 배제되다시피 했고, ILO협약 비준을 외치는 시민사회와 노동조합은 코로나 위기 속에서 고립되었다. 결국은 시민사회 내부의 움직임 없이 FTA조항만 가지고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복무요원들의 강제노동 문제 해결은 당사자들이 결집하여 여론을 만들어 내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목소리가 없다면 국제기구 역시 움직이지 않는다. 국제사회의 전향적 판단이 어떤 '계기'나 정당성의 근거를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도라에몽 주머니처럼 원하는 걸 다 갖다 줄 수 있지는 않다. 사회복무요원들의 단체 행동과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협조가 동반되지 않고서 FTA협약이나 국제기구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풍향은 쉬이 바뀌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사회복무제도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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