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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후보님, 제가 '해외 퀴퍼' 좀 다녀봤는데요

내가 4개국 퀴어 퍼레이드에서 만난 정치인과 풍경들

등록 2021.02.27 19:01수정 2021.02.27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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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5일 토론토 프라이드 퍼레이드, 캐나다 자유당(Liberal Party) 부스에서 받은 부채 ⓒ 선채경

 
"해피 프라이드! (Happy Pride!)"

2017년 6월, 토론토에서 첫 끼, 식사한 카페테리아의 웨이트리스가 건넨 인사였다. 직원들은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유니콘 뿔 머리띠나 무지개 두건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성탄절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듯 일 년 중 가장 큰 퀴어축제 날에 "해피 프라이드"라고 인사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토론토의 '무지갯빛 환대'를 만나 푹 빠진 뒤로 매년 여름이면 '프라이드 위크'에 맞춰 여행 계획을 짰다. 북반구에 겨울이 오면 여름을 찾아 남반구로 떠났다.

캐나다 토론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이스라엘 텔아비브, 그리고 호주 시드니에서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봤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퍼레이드가 있는 주를 '프라이드 위크(Pride Week)'라고 부른다. '프라이드 위크'가 있는 달은 '프라이드 먼쓰(Pride Month)'다. 그야말로 온 도시에서 한 달 내내 성소수자의 자긍심(pride)을 뽐낸다는 뜻이다.
 

7~8월 암스테르담은 거리 곳곳에 '프라이드 먼쓰(Pride Month)'를 알리는 깃발이 나부낀다. ⓒ 선채경

 
도시마다 특색도 제각각이다. 암스테르담은 도시의 상징 '운하'에서 워터젯 퍼포먼스를 펼친다. 텔아비브는 지중해 해변을 따라 행진한다. 시드니는 낮이 아니라 밤에 시작한다. 참가자들은 야광과 형광으로 번쩍번쩍한 옷을 입고 각양각색의 조명도 활용하며 마지막은 화려한 불꽃놀이로 장식한다.

지난 2월 18일 안철수 국민의당 예비후보가 TV토론에서 성소수자 축제인 '퀴어 퍼레이드' 참석 여부 질문을 받고 "그런 것들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답을 내놓았다. (관련 기사: 공격 금태섭 "불통·말 바꾸기" - 방어 안철수 "모두 오해" http://omn.kr/1s4rs)

안 후보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퀴어 축제를 카스트로 스트리트라는 곳에서 하는데,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샌프란시스코 남부 쪽에 있다"며 미국 사례를 예로 들었는데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빌 스트리트에서 시작해서 중심 시가지를 가로지르며 시 청사까지 도달한다.

꼭 퍼레이드 진행로가 아니더라도 이 시기에는 공항부터 주요 관광지는 물론 공공기관과 크고 작은 건물들까지 온통 무지개로 도배되어 있다. '거부권'을 원한다면 그냥 여름에는 여행하지 않는 걸 추천한다.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2023년 시드니는 도시의 랜드마크 '하버 브리지'에서 행진할 계획이다. 축제 기간을 확인하고 알아서 잘 피해 가시라.


'서울퀴어문화축제', '집회'에 가는 마음으로

서울퀴어문화축제를 비롯해 한국에서 열리는 퀴어 축제는 반쯤 '데모'에 가깝다. 필히 반대 집회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물리적인 충돌이 많다. 안전을 위해 축제는 가로막힌 차막에 갇혀서 열린다. 그러나 사람은 막을 수 있어도 혐오의 소리까지 막지는 못한다. 그 소리에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투쟁가처럼 결연한 마음을 먹고 가야 하는 곳이 서울시청 앞 광장이다.

오히려 길도 모르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바다 건너 도시의 축제가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곳에도 '혐오 세력'이 분명 있었겠지만 내가 본 건 한 차례에 그쳤다. 2018년 8월, '암스테르담 캐널(Canal 운하) 퍼레이드'가 끝난 뒤 관중이 해산하고 한산해진 거리, 한 피켓 시위자를 본 적 있다. "동성애는 죄악이다"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은 혼자 외롭게 외치고 있었고, 그가 서 있는 다리 밑으로는 퍼레이드 뒤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요란한 무지개 보트가 지나갔다.
 

시드니 마디 그라(Sydney Gay & Lesbian Mardi Gras) 퍼레이드 참가자가 호주 총리 스콧 모리슨을 비판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 선채경


"거기도 '혐오 세력'이 있어?"
"토론토에도 호모포비아가 있냐고? 있지. 근데 힘없는 사람들이야. 우린 일부러 그들 앞에서 결혼반지를 자랑하거나 트월킹(twerking 엉덩이춤)을 추기도 하는 걸!"


한 캐나다인의 대답이다. 이쯤 되면 '혐오 세력'이라고 명명하기도 민망하다. 호모포비아를 우스꽝스럽게 풍자하는 퍼포먼스는 퍼레이드의 하이라이트다. 토론토 퀴어들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머리를 들고 행진했다. 시드니에선 호주 총리 스콧 모리슨을 향해 "(성소수자에 대한) 호러쇼를 멈추라"는 구호를 외쳤다. 스콧 모리슨 총리는 2017년 동성결혼 합법화 투표 당시 반대표를 던졌다.

상처를 웃음으로 승화하는 것, "너희들이 혐오해도 우린 끄떡없다"를 보여주는 것, 퀴어들이 풍자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다.
 

2017년 6월 25일 토론토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서 우리 교민들은 육군의 성소수자 색출사건을 비판하는 피켓을 들고 행진했다. ⓒ 선채경

 
물론 그저 웃고 조롱하는 분위기가 전부는 아니다. 진지하게 사안을 공론화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2017년 토론토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서 한인 교회 교인들은 한국 육군의 동성애자 색출 수사를 알리는 피켓을 들고나왔다. 덕분에 퍼레이드를 보던 100만 명이 이 사건을 알게 됐다.

이렇듯 퀴어 퍼레이드는 정치적 메시지를 퍼뜨릴 수 있는 플랫폼이기도 하면서 유력 정치인이 활동에 나서는 장이기도 하다. 캐나다 총리 저스틴 트뤼도가 매년 앞장서서 행진한다는 뉴스는 이제 놀랍지 않다. 암스테르담 시장 펨케 할세마, 시드니 시장 클로버 무어, 뉴사우스웨일스주 연방의회 하원의원 알렉스 그리니치 등 내가 본 정치인만 해도 일일이 나열하기 어렵다. 아,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샌프란시스코 시장을 지냈고 현재는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개빈 뉴섬도 단골이다.

어디에나 '퀴어 유권자'가 있다
 

2020년 2월 당시 시드니 국제공항의 모습 ⓒ 선채경

 
평생을 한국에 거주하면서 역대 대통령이나 지자체장을 본 일이 없고, 만나본 국회의원도 손에 꼽지만, 잠깐의 여행 동안 오픈리 퀴어 정치인이나 성소수자 인권을 적극 지지 하는 정치인을 여럿 보았다. 이런 곳에선 "축제 장소는 도심 이외로 옮기는 게 적절하겠다" 같은 발언을 한다면 앨런 존스나 트럼프처럼 100만 명 앞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예상한다.

'표심(票心)', 유권자의 마음은 고여 있지 않다.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민감하게 여기는 유권자는 점점 늘어난다. 변화를 좀 따라가 볼 생각은 없을까? 첫 회 70명의 참가자로 시작한 서울퀴어문화축제가 2019년 10만 명(주최 측 추산)을 넘어선 일,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들이 "퀴어 축제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를 질문받은 일, 모든 사건이 변화의 방증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서울특별시청이 서울퀴어문화축제의 메인 스폰서로, 서울시장이 무지개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성소수자 #퀴어퍼레이드 #안철수 #보궐선거 #서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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