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23

박재혁, 중국으로 가다

등록 2021.02.26 14:39수정 2021.02.2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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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의 삶은 조각 맞추기이다

1915년 3월 학교를 졸업한 박재혁은 가을까지 구세단 활동을 하다가 경북 왜관에서 곡물 매매업을 하는 친척 박국선과 동업하며 활동하다가 그해 겨울에 김인태와 함께 중국으로 간다. 김인태는 상해 동제대학에 입학하였다. 김인태의 동생 김병태는 동국역사 배포사건 이후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 금광(金光)중학에 다닌 듯하다. 그래서 1915년 구세단에는 관련되지 않았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관제』, 『조선총독부 지방관제』를 반포하여 10월 1일 이를 실시하였다. 지방제도는 전국을 13도, 12부, 317군을 두고 부에는 부윤, 군에는 군수를 임명하였다. 부산 이사청을 폐지하고, 부산부를 설치하여 동래부 사무를 인계하고 관할하였다. 1914년 4월 군, 면의 통합에 따라 옛 동래부의 일부와 기장군을 합하여 동래군으로 재편하여 경상남도에 속하게 하여 부산부와 구별하는 행정구역이 되었다. 부산부는 부산면·사중면·사하면 가운데 오늘날의 서구·중구·영도구지역을 관할하는 행정단위로 하였다.

부산에 전차가 운행되었다. 1909년 6월 29일 부산궤도주식회사가 부산진∼동래사이에 경편궤도 부설권을 인가받아, 1909년 11월 부산진∼동래 남문간 궤도공사를 준공하여 12월 2일 영업을 개시하였다. 이때 사용한 경철레일과 기관차는 부산 성지곡 수원지를 조성할 때 사용하던 것이었다. 동래선은 전통적인 부산진과 동래의 조선인 시가를 포함하지 않는 일본인 중심의 부산항과 교외인 동래온천장을 연결하는 도시간철도였다. 즉 일본인 온천욕과 휴양지를 위한 시설이기도 했다. 이때의 부산진역은 현재의 수정동이 아닌 범냇골 인근이었으며 경부선과 동래선의 환승역이었다. 조선인 시가를 포함하지 않고 단지 경부선 부산진역과의 연결만을 고려한 노선이었다, 일본인을 위한 전철이었다.

박재혁의 삶에서 1915년은 경찰의 기록에는 공백 상태이다. 오택에 따르면, 구세단 활동과 곡물상을 하다가 중국으로 갔다. 하지만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사건 조사 당시 1915년 졸업 후 1년 동안은 비어있다. 삶의 공백이 1년 동안 있음에도 일경이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다. 곡물상 취업은 오택은 1915년, 경찰은 1916년이다. 여기서부터 박재혁의 중국행과 활동은 기록마다 불일치하여 조각 맞추기를 해야 한다. 오택과 경찰(신문 보도)는 시기가 서로 뒤섞여 불일치하다. 오택과 경찰의 기록 중에 어느 것이 더 정확할까? 경찰과 신문의 기록은 박재혁의 진술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박재혁이 거짓 진술을 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약 경찰이 1915년 구세단 사건을 드러낸다면 덮어두었던 폭탄이 터질 수 있었기에 감추었을 가능성이 있다. 오택의 기록을 신뢰해야 할까? 

박재혁, 전차 차장이 되다
 

장수통 전차 지금의 부산 광복동 거리를 운행하던 전차의 모습. 처음에는 왕복 차선이 아니라 전차보다 걷기가 더 빠른 경우도 있었다. ⓒ 부산박물관

  
상해에 갔던 박재혁은 김인태를 두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두고 온 가족이 걱정되었던 것 같다. 1916년 4월에 박재혁(22세)은 부산조선와사(가스)전기회사의 전차 차장에 취직을 했다. 최천택은 합천금융조합 서기를 그만두고 부산 영도 대교동에서 쌀장사를 하며 상해로 갈 궁리를 했다. 하지만 외동아들을 외국에 보낼 수 없다는 모친의 설득에 주저앉았다.

1910년 4월 24일 마츠다이라 마사나오 외 27명이 발기하여 전차와 전등, 가스 사업의 특허 출원을 부산이사청에 제출하여 5월 18일 한국와사전기주식회사(朝鮮瓦斯電氣株式會社)의 허가를 받았다. 이들은 회사 창립을 위한 준비를 추진함과 동시에 5월 19일 부산전등[주]와 부산궤도[주]를 각각 20만 엔과 5만 5000엔에 매수 가계약을 체결하고, 자본금 300만 엔으로 10월 18일 정식으로 한국와사전기[주]를 창립하였다. 12월 28일 부산진-동래간 경편철도를 운영하던 부산궤도주식회사를 승계하여 전기(電氣)와 와사(瓦斯, 가스), 철도(鐵道)를 모두 갖춘 경남지역 최대의 독점기업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한국와사전기는 1911년 대청동 1가 31번지로 이전하였고, 1913년 3월 조선와사전기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12월 토성동 1가 160번지로 지점을 이전하였다.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는 우선 기존 동래선의 협궤(2)를 광궤(26)로 개선하는 한편, 그때까지 포함되지 않았던 부산진성(부산진 해안과 진시장 포함)과 동래성 등 전통적인 조선인 시가를 적극 포함함으로써 도시전기철도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전철의 연장은 부산항 지역의 일본인의 영향을 전통적 조선 마을인 동래로까지 확장하여 근대 식민도시로 통합하려는 시도였다. 동래온천을 개발하고 일대를 공원화하여 관광지역으로 변화하여 개발이익을 극대화하려하였다. 부산은 점차 동래를 장악하고 도시화, 광역화하여 동래의 부산이 아닌, 부산의 동래가 되었다.

1915년 누적된 적자로 경영진이 퇴진하고 유력 자본가였던 카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郎]가 경영권을 장악하였다. 카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郎]는 긴축 경영을 실시하는 한편으로 과감한 설비 투자를 감행하는 등 구조조정 및 경영 쇄신에 주력하였다.

1915년 10월 31일 오후 2시 부산 동래 온천장 앞 광장에서는 성대한 전차 개통식이 있었다. 전차는 전기를 에너지로 하여 노면에 깔린 레일 위를 달리는 교통수단이라 '전깃불 잡아먹고 달리는 괴물'이라고 여겼다. 우마차나 인력거 대신에 대중 교통이 생겼다. 1899년 서울에서 처음 노면 전차가 개통됐다. 부산진∼초량선이 부설되었고, 부산∼동래간은 경편과 전차를 겸용할 수 있게 건설되어 1915년 11월 1일에 영업을 개시하였다. 시내선은 1916년 9월에 개통·운행되었다. 이런 가운데 박재혁이 1916년 4월 전차 차장이 되었다.

부산이 도시화하면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갈등이 점차 표면화되었다. 전차의 구간제 운영과 그에 따른 전차 요금의 차별 문제였다. 1915년 3구간인 부산~초량간 1구간 과 초량 부산진간 2구간으로 운행되었다. 3구간 총 요금은 9전이었다. 즉 1구간은 3전을, 경부선 부산~부산진간은 6전을 받았다. 교외선인 부산진~좌수영(4전), 좌수영~동래 남문(5전). 남문~온천정(3전)은 3구간에 총 12전늘 받았다. 죽 시내선과 교외선이 동일하게 3구간이었지만 요금은 달랐다. 이는 시내선은 주로 일본인이, 교외선은 주로 조선인이 사용하였기에 결국 요금 차별은 민족 차별로 비치게 되었다.

1916년 9월 13일, 추석 다음날이었다. 사람들은 명절의 즐거움을 누렸다. 좌천동 앞 영가대 정류소에서 출발한 남행 제1호 전차가 동남구 정류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일본인 전차 운전사는 부산경찰서 순사와 잡담을 나누다가 앞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김춘근 일행 5명에 전차 선로를 건너고 있었다. 전차는 그대로 일행을 덮쳐 참혹한 교통사고를 냈다. 김춘실은 목이 잘리고 김춘근 등 4명은 무릎과 어깨에 중상을 입었다. 사고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요금에 따른 민족 차별을 느끼고 있었던 조선 군중은 전차에 돌을 던지고 운전사를 끌어내어 안타를 했다. 결국 전차를 전복시켰다. 이어오던 제7호 전차마저 유리창을 깨고 전복하였다. 부산수비대가 출동하고 현장에서 30여 명이 체포되었다.

전차전복사건 공판이 1917년 3월 8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있었다. 박일득을 비롯한 주모자들은 징역 2년, 선동자는 징역 1년, 사건을 도와준 조력자는 징역 6개월에 처했다. 미성년자만이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런데 대형 사건을 일으킨 일본인 운전사는 벌금 200원을 선고받았다. 심각한 민족 차별이었다. 이런 차별을 부산 사람들은 머리 깊이 새겼다. 
 

부산 경전차 부산에 운행되었던 초창기 협궤 경전차(1910~1930년) ⓒ 부산근대역사관

 
박재혁, 다시 중국으로 가다

박재혁은 전차자장을 그만두고 다시 경북 왜관의 박국선과 함께 곡물상을 운영하였다. 1916년 겨울 박재혁은 부산을 떠났다. 모친에게도 알리지 않고 갔다. 알렸다면 분명 말렸기 때문이다. 다만 오택에게 알리고 모친과 여동생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그때 박재혁은 박국선의 자금 700원을 가져갔다. 중국으로 간 이유는 미국으로 가기 위한 어학 공부때문이었다. 1917년 7월의 상해 영사경찰서 기록에 따르면, 경상남도 부산부 범일동 183번지에 사는 박재혁(朴載赫. 23세)은 1916년 말 어학연구 목적으로 무단가출하여 안동현을 거처 상해로 들어와 중화국청년회관(中華國靑年會館)에서 입학 중이었다. 고향에 있는 실부(實父)가 상해영사경찰서에 보호와 방출을 원해 박재혁에게 1917년 7월 귀향하기를 설득한다. 상해 체류 중에 반일적인 발언은 하지 않은 듯하다. 실부는 아마 박국선일 가능성이 높다. 자기 돈을 가져간 박재혁을 귀국시켜 돈을 받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920년 부산경찰서 조사에는, 1917년 6월에 박재혁은 곡물상 주인을 달래어 704원을 얻어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 경찰조사에 따르면 그는 당시 상해에 체류하고 있는 중이었다. 박재혁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경찰조사에 거짓으로 답한 것이 분명하다.

박재혁, 김인태, 오택은 미국에 가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김인태와 박재혁은 중국에서 영어 공부를 하였다. 오택은 인삼, 고추, 마늘, 명태, 해초 등을 수출하고 그 대금으로 잡화를 수입하는 '조선명물공사'를 만들었다. 미국 교포가 상인이 아니라 1년에 2번 정도 교역하여 여권을 청구할 상황이 아니라 상해에 있는 박재혁과 김인태에게 먼저 미국으로 출발하라고 하였다. 김인태는 1915년부터 2년간 상해 동제대학(同濟大學)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중국 당국으로부터 여권을 발급 받아 유럽 경유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당시 여권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유학하는 경우는 아무런 여권이나 여행비자도 없는 무국적자의 신분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험로를 밟아야 했다. 때문에 이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해로(海路)를 택하거나 아니면 만주와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긴 여정의 육로(陸路)를 택해야 했다. 여권이나 비자도 없이 무작정 떠나는 경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미국행 배에 빈자리가 날 때까지 약 10개월을 상해에서 체류해야 하거나 빈자리가 나도 겨우 사정해서 타야 했고 미국에 도착했어도 불법이민자로 분류되었다. 그렇지만 1918년까지 미국의 경우에는 불법입국자인 한인 유학생들에게 '정치망명유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입국을 허가해 주었다.

하지만 일본 유학에 비해 구미유학은 쉽지 않았다. 친일파 양성을 위한 일본유학생은 1910년대 매년 500~700명에 달했으나 일본 이외 유학생은 총 57명에 불과했다. 구미유학을 막기 위해 일제는 상해주재 영사를 통해 미국 배편을 기다리는 한국인을 체포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험로를 경유해야했고 때론 망명자 신분으로 신변보호에 어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어려움은 유학경비였다.

1917년 상해에 머물던 박재혁이 오택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형, 잘있었는가? 다름이 아니라 내가 참 난처한 입장에 빠졌네. 미국갈 준비가 다되어 승선 전 석별연 겸 주선자에게 접대한다고 상해 요정에서 만찬회를 하였다네. 도미의 꿈이 실현되어 참 기분이 좋았다네. 그런데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네. 여권과 배표, 현금 등을 넣은 양복 상의를 병풍에 걸어두었는데 그것이 문제였네. 수시간 먹고 난 뒤 계산을 하려고 양복을 뒤져보니 아뿔싸. 돈이 없어졌는 것을 알았네. 요정에는 내일 지불한다고 하였지만 난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네. 수년간 기다려왔던 미국행이 좌절되고 나니 앞이 캄캄했다네. 밤새 생각해보아도 갈 곳은 황포강뿐이었네, 다음날 유람선을 탔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더군. 모친과 여동생이 보고 싶더군, 하지만 꿈이 무너졌는데 살아서 무얼하겠나 생각하고 강에 몸을 던졌다네. 그런데 아직은 죽을때가 아닌 모양인지 지나가던 석탄운반선 인부에 구조되어 동재병원에 입원했었다네. 자네에게 늘 신세만 지고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네.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도와주시게. 자살도 여의치 않아 부득이 남양 등지로 가서 유랑하다가 필리핀에서 미국행 배를 타려고 하네. 그러니 인삼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네. 모친과 여동생에게 내가 무사하다고 꼭 전해주시게. 이만 총총."

오택은 박재혁의 편지를 받고 안타까움을 그대로 느꼈다. 편지를 받자 말자 먼저 박재혁의 모친을 방문히여 중국에서 별탈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안심시켰다. 그리고 박명진에게 용돈을 손에 꼭 쥐어주었다. 오택은 인삼 10근을 보내주었다.

박재혁은 인삼 일부를 팔아 홍콩를 경유하여 싱가포르에서 미쓰이 물산(三井物産)지점에 취직 기회를 보고 있다가 필리핀 출장소로 전근하였다. 미쓰이 물산은 대한제국 때 1900년부터 8년 동안 관삼위탁판매계약을 맺었고, 황실은 재정수입의 증대를 기하였지만 직접 생산자와 민중의 궁핍이 심화되었다. 1903년 4월 대한제국은 미쓰이물산을 통해 3400톤급 군함 양무호(揚武號)을 구입하였다. 1909년 삼정물산경성지점은 면포‧기계‧ 밀가루‧설탕‧석탄‧미곡 기타 내외 물산의 무역 및 조선의 명산인 인삼특약판매를 하였다. 당시 박재혁은 아마 곡물상보다 인삼, 잡화 등의 무역상으로 물품을 거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1917년 최천택은 만주 훈춘에서 구 한국군을 거느리고 무장투쟁을 하고 있다는 황병길과 제휴하기 위해, 1917년 김병태과 장지형을 북간도로 밀파했다. 황병길은 1919년 3월 이후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하였다. 김인태는 상해에서 전차 차장 감독을 하며 김원봉과 의열단을 추진하며 때를 기다렸다. 오택은 무역 실적을 올려 정식 여권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사업가로 활동한 김정훈

김정훈은 1917년 4월 부산일보에 부산의 10대 명사에 선정되었다. 고려상회와 해륙물산무역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1916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였다. 1916년 6월 부산 초량동에 인쇄와 서적 출판을 목적으로 한 자본금 5만원의 경남인쇄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경남인쇄(주)는 부산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한국인 제조업체였다. 주주는 양산의 전석준(全錫準), 부산의 이규정(李圭正), 김해의 허발(許撥), 부산의 오영식(吳爃植), 양산의 김정훈(金正勳), 부산의 박기필(朴淇弼)이었다. 초대 사장은 전석준이었다. 1917년 7월에 『태자잡지(泰自雜誌)』를 신청하였는데, 잡지발간 취지는 정치 실업을 주장으로 하여 조선 청년으로 하여금 문명을 촉진케하고 사회에 자기 수완을 발휘하여 입신출세에 헌신핳 목적이었다. 잡지 발간 여부는 알 수 없다. 1917년 8월 김정훈은 취체역(取締役, 사장)에, 윤현진의 형 윤현태는 감사에 취임한다. 1918년 12월 김정훈은 취체역에서 사임한다. 나중에 경남인쇄의 주주와 주주 수는 백산무역회사[117주], 전석준(全錫準)[100주], 백산상회[91주], 윤현태[90주], 박석권[60주], 허발[59주], 이청[50주], 윤병준(尹炳準)[50주], 엄정섭[50주]이었다.

김정훈은 1917년 12월 그는 합자화사 백산상회 설립에 동참한다. 당시 무한책임사원은 안희제(安熙濟, 의령, 28350원)·윤현태(尹顯泰, 양산, 28350원)·최완(崔浣, 경주, 1만원)이었고, 유한책임사원은 최준(崔俊, 경주, 2만원)·허걸(許杰, 동래, 11500원)·성태영(成泰永, 함안, 9200원)‧윤병호(尹炳浩, 남해, 5천원), 김정훈(양산, 4600원), 이정화(李楨和, 창녕, 4600원)·유덕섭(柳德燮, 양산, 4600원)·안담(安湛, 의령, 4600원)·정순모(鄭舜模, 양산, 4600원)·김용조(金容祚, 동래, 4600원) 13명이 자본금 14만원으로 회사를 설립하였다. 1917년 5월에는 양산지방금융조합 설립에 참여한다. 조합장은 전석준, 이사 소산선호(小山善浩), 감사 최상흡(崔商翕), 유덕섭(柳德燮), 김정훈이었다. 또 그는 연초경작도 양산 상삼마을에서 하였다.

백상상회와 경남인쇄 등은 민족 사업가들의 활동이다.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민족자본을 육성하여 그 이익으로 민족 독립운동에 보태는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업을 하는 것은 개인적 이익과 국권회복 자금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역상회와 상점은 바로 독립 군자금을 보내는 비밀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안희제의 백상상회(무역), 박상진의 성덕태상점 등이 그러했다.

1917년 12월 부산 북빈(북항) 대창정에 있었던 고려상회는 개인 경영체제에서 3~4명의 공동 경영으로 바꾸며 자본금을 2만원으로 하였다. 공동인수한 사람은 김철수의 매형이자 엄주태의 장인인 박인표(朴仁杓), 훗날 한글학자로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한 김두봉(金枓奉, 1889~1960), 최태현(崔泰鉉), 김진원(金晉源)이었다. 1921년 고려상회는 박인표가 사망하자 아들 박영출에게 상속된다. 지배인은 양산의 김철수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의열단 #박재혁 #오재영(오택) #최천택 #김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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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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