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거상압기(居喪狎妓)의 진실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 / 17회] 그가 인간적으로 패륜아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기록이다

등록 2021.03.18 17:38수정 2021.03.18 17:38
0
원고료로 응원
 
a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나무위키

 
부안에서 전운판관 일을 하던 해 8월에 어머니 김씨가 돌아가셨다. 아들을 따라 임지에 왔다가 덜 익은 감(생감)을 먹고 체하여 사망하였다. 불운한 여인이었다. 젊어서 청상이 되고 아들ㆍ딸과 며느리ㆍ손자를 잃었고, 막내아들이 관직에서 파직되는 것도 지켜봤다. 전쟁이 아직 끝난 것도 아니었다. 서울에서 유년의 벗으로 문과에 같이 급제했던 강홍립이 내려왔다. 

객지에서 상을 당하다보니 지인들은 물론 인근 고을의 수령들이 찾아와 위로해 주었다. 부모상을 당하면 관직을 내어놓고 향리로 돌아가 3년상을 입는 것이 유교사회의 관례였다. 그런데 허균은 부안에 빈소를 마련한 다음 일정을 수행하고자 익산으로 떠났다.

조정에서 강홍립을 내려보내 조문을 하면서 비록 상중이지만 전운판관의 일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하는 밀지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예교적 법도를 무시한다고 해도 장례를 치른 며칠 뒤 업무 현장으로 떠나고 고을의 벼슬아치들이 베푼 주연에 들어 당연 히 끼어 있는 기생들의 수발을 받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과정이야 어쨌던 이같은 처사는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허균이 패륜과 방탕의 인물로 그려지는 준거가 되었다. 허균은 당시의 일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신축년(선조 34;1601) 6월 가부(駕部), 낭관(郎官)으로 있던 나는 전운판관에 제수되어 삼창(三倉)에 가서 조운(漕運)을 감독하게 되었다.

8월 12일(신미) 점심 때는 금구현(金溝縣)에서 쉬고 저물녘에 전주에 들어가니 방백이 찾아와 인사하였다.

13일(임신) 진남헌(鎭南軒)에 나가 방백과 함께 장간(長竿) 장대놀이ㆍ주승(走繩) 줄타기ㆍ도상(挑床) 높이뛰기 등 여러 가지 재주 놀음을 모두 보여주었다. 저녁 무렵에 대부인(大夫人)이 설익은 감을 먹은 것이 체하여 부축하고 들어가더니 초저녁에 병이 매우 위태로워졌다. 나는 부사 채형(蔡衡), 중군 이홍사(李弘嗣), 판관 신지제와 밤새도록 동헌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14일(계유) 진시(辰時)에 병을 돌이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머물러 상사를 치르기로 하였다.   


15일(갑술)우도(右道, 전라북도) 재차(災差) 강형홍립(姜兄弘立)이 도착하였다. 강형은 어릴 적 친구이자 동년(同年)이라 정이 매우 두터웠는데, 서로 만나게 되어 기뻤다. 그의 숙소에 함께 묵었다. 

16일(을해) 상(喪)은 대렴(大斂)을 마치고 빈소를 마련하였다. 좌도(左道, 전라남도)의 재차(災差)인 김정목이 도착하여 강홍립의 숙소에서 만났다. 

17일(병자) 성복(成服, 상제들이 상복을 입음) 하였다. 나는 김정목과 강홍립 등 두 행대(行臺, 종사관의 별칭)와 이별하고 저물녘에 익산에 도착하였다.  

18일(정축) 비가 와서 머물렀다. 고산(高山)의 원 신순일이 찾아왔다. 저녁에 이유위가 임천에서 찾아왔다.

19일(무일) 진안현감 심인조가 인사하러 왔다.

20일(기묘) 군의 무거(武擧, 무과에 합격한 사람) 소문진의 첩과 그의 집에서 같이 일하는 계집아이가 일에 매우 익숙하였다. 그들이 주안상을 차려가지고 와서 위문하니 광산월도 함께 돌보았다. 종일토록 피리불고 노래하여 즐거웠으며, 이유위는 일어나 춤을 추기도 하였다.

21일(경진) 소랑(蘇娘)의 집을 방문하였다. 술상은 매우 푸짐하였다. 동리 사람들이 구경하느라 꽉 차게 모여들었다. 저녁에 임피에 도착하니 이곳의 원 김요가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22일(신사) 이유위와 함께 소안역으로 윤강길을 방문하니 노래와 피리로 즐겁게 해 주었다. 

23일(임오) 광산월과 작별하고 이유위와 함께 나시포를 건너 한산에 도착하여 태수 한회와 만났다. 저녁에 임천에서 한산에 도착하여 태수 한회와 만났다. 저녁에 임천에서 묵었는데, 서울 집에서 온 소식을 보니 나의 큰형이 전라도 방백(方伯)으로 임명되었다. (주석 6)

  
a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허균의 시. ⓒ 오승준

 
허균에게 붙혀진 심한 욕설 중에 경박성과 함께 '거상압기(居喪押妓)' 즉 상중임에도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비난이 두고두고 이어지고 『조선왕조실록』에까지 등재되었다. 뒷날 반역죄로 처형되면서 그가 인간적으로 패륜아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기록이다.

당시 허균의 행동은 그가 전운판관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판단해야 한다. 전운판관이란 직책은 항상 외지로 떠돌아 다녀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힘들고 외로운 생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전운판관이란 국가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비록 상중이라고 해서 그 책무를 게을리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균은 상기를 최대한 단축하여 성복한 지 3일 만에 임무수행을 위해 임지로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임지에선 국사를 담당하는 그를 소홀히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외로운 처지를 모른 채 할 수도 없어 잔치자리를 마련했던 것으로 보이며, 허균 역시 담담한 자세로 이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당시의 제반 정황을 고려할 때 당시의 허균의 행동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닐 것이다. (주석 7)


주석
6> 「조관기행(漕官紀行)」, 14~15쪽, 이문규, 『허균문학의 실상과 전망』, 358~359쪽, 재인용, 새문사, 2005.
7> 이문규, 앞의 책, 360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거상압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AD

AD

AD

인기기사

  1. 1 군산 갯벌에서 '국외 반출 금지' 식물 발견... 탄성이 나왔다
  2. 2 20년만에 포옹한 부하 해병 "박정훈 대령, 부당한 지시 없던 상관"
  3. 3 광주 찾는 합천 사람들 "전두환 공원, 국민이 거부권 행사해달라"
  4. 4 남자의 3분의1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다고?
  5. 5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두려움에 떨고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