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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백서도, 조율이시도 없는 아버지 제사상

아버지 좋아하시던 새우튀김과 굴전을... 그땐 왜 사랑한다 말을 못했을까요

등록 2021.03.26 13:31수정 2021.03.26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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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어머니께서 갑작스레 병을 얻으셨습니다. 남은 가족이라 해봐야 천지 간에 당신과 나, 둘 뿐입니다. 병중의 어머니를 홀로 둘 수는 없어 제가 모시거나, 혹은 어머니가 절 데리고 살거나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우린 실로 30여 년 만에 다시 한 지붕 아래 살게 됐습니다. 어머니와 곧 이순을 앞둔 아들이 삐걱대며 사는 이야기를 통해 세대 간 소통과 화합의 길을 모색해보고자 합니다.[기자말]
산 자들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한다. 방식이나 풍습은 각기 달라도 그 애틋한 심정만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유교가 백성들의 삶을 오래도록 지배했던 우리나라는 설과 추석에 조상들께 차례를 지내고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에 맞추어 제사를 드린다. 저승의 조상님께 예를 다함으로써 후손들을 보살피고 번성하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은 오히려 그 때문에 일체의 제사를 금한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거역이며, 귀신에게 발복을 비는 미신의 잔재로 치부해서다. 하지만 그들도 각자의 가정에서 종교에 맞는 예배나 미사를 드리며 조상들을 기린다. 어떤 형태로든 망자에 대한 추모는 후손들의 예의이자 가족 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우리 가족은 유교적 전통관례에 익숙하다. 큰 댁 어르신들께서 생존하실 때도 그랬고, 우리만 남은 지금도 그렇다. 물론 우리의 형편상 제대로 격식을 갖추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정성껏 예를 다해 왔다. 우리들은 어릴 적부터 그런 문화를 당연시 해왔고 세상 모두가 의당 그리 하는 것으로 여겨 왔다.

제사상에 담긴 의미

3년 전 아버지께서 영면에 드신 후도 그랬다. 어머니는 그 이듬해부터 제사상을 차리셨다. 으레 그래온 것처럼 그러셨다. 그런데 아버지 기일은 양력 2월 25일이다. 음력설과 바짝 붙어 있다. 대개 1~2주 간격이었다. 물론 내가 돕고, 약식이라 하지만 고령의 어머니께서 연이어 큰상을 차리시는 건 참 고된 일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병을 얻으셨고 수술까지 하셨다. 그런 어머니께 더 이상은 무리였다. 올해 설이 오기 전에 어머니께 미리 말씀 드렸다. 앞으로 차례는 더 축소해서 지내고, 아버지 제사는 내가 알아서 모시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영 미덥지 않은 표정이셨지만 이내 그러라고 하셨다. 내심 그만큼 힘 드셨던 거였다.

나만의 복안은 있었다. 그동안 어머니 어깨너머로 배운 것도 있었고, 재작년부터 당신 몰래 동생 제사상을 차렸던 경험도 있었다. 그는 아버지 떠나신 지 딱 10개월 후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는 가족이 없다. 그렇다고 아들을 가슴에 묻었을 어머니께 그걸 부탁드릴 수는 없었다. 그냥 놔둘 수도 없어 내가 어설프게나마 제사상을 차려 그에게 다녀오곤 했다.
 

아버지 제사상 올해부턴 내가 차리기로 했다. 전 대신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새우튀김과 굴전을 올렸다 ⓒ 이상구

 
그걸 믿고 올 아버지 제사 때 처음 상을 차렸다. 물론 온전히 나 혼자 힘이었다. 동생 제사 때 쓰던 5등분할 접시를 사용했다. 다섯 칸이라지만 그거 다 채우기가 만만치 않다. 일단 고기산적과 조기찜으로 각 한 칸씩 채웠다. 삼색나물을 무쳐 한 곳에 담았다. 동그랑땡 같은 전을 부쳐야 했지만, 그 대신 아버지께선 즐겨 드시던 새우튀김과 굴전을 부쳐 올렸다.


쇠고기 탕국을 하고 하얀 쌀밥을 지었다. 가운데 칸엔 큼지막한 한라봉의 아래 위를 평평하게 잘라 올렸다. 그렇게 꼬박 서너 시간이 걸렸다. 그 모양새가 무슨 소꿉장난이라도 하는 것 마냥 장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나를 기특하게 여기실 것이라 믿었다.

사랑의 표현

그 제사상에는 홍동백서도, 조율이시도 없다. 예의와 법도는 과감하게 생략했다. 그걸 지킬 여력도 없거니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게 무례하고 불손한, 그래서 지탄을 받아 마땅한 짓이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그저 내 처지에서 하는 만큼만 하면 되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진짜 그렇게 믿었다.

물론 터무니없는 자기 변명이라 면박을 줘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나는 격에 맞춘 틀에 박힌 음식들보다는 생전에 당신이 좋아하시던 것으로 모시면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동생의 제사에는 그 빈칸에 스팸구이를 올렸다. 더욱이 지방마다, 집안마다 그 상차림은 다 다르다고 하지 않던가. 말하자면 그건 우리 식 제사상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도 엄청난 신경을 썼다. 수 시간 동안 손수 음식을 장만하며 한 순간도 경건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나물 한 줄기. 쌀 한 톨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세심하게 모든 걸 챙기고 살폈다. 그건 그렇게 내가 들일 수 있는 온 정성을 다 담은 제사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그것에 자부심을 갖는다.

게다가 나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 아버지를 추억했다. 당신이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을 떠올리고 그걸 맛나게 드시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걸 드시며 나누었던 우리들의 대화도 다시 떠올려 봤다. 음식을 준비하는 그 몇 시간 동안 아버지와 나는 마치 함께 있는 것처럼 함께 울고 웃었다. 비록 육신은 곁에 계시지 않으셨지만 우린 그렇게 영혼으로 교감하고 소통했다.

영화 <코코(Coco)>에 그려진 멕시코 사람들의 생각도 그와 비슷했다. 그들이 1년에 한 번씩 벌이는 '망자들의 날' 축제는 의무적인 추모보다는 일상적인 기억으로, 의례적인 형식보다는 마음을 담은 정성으로, 경건하되 무겁지 않고, 신성하되 산 자와 죽은 이 모두가 즐거운 한바탕 잔치다. 아버지 제사상의 굴전과 새우튀김은 다소 생뚱맞게 보일지 몰라도 그런 내 믿음의 상징이었다.

정말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나는 당신 살아생전 사랑한다는 말씀을 한 번도 드리지 못했다. 임종의 순간까지 그랬다. 먼저 떠난 동생에게도 그랬다. 나는, 우리 가족은 그만큼 표현에 서툴렀다. 서로에게 속내를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을 오히려 어색해하고 부끄러워했다. 아버지와 동생의 제사상을 차리겠다고 자청한 것은 그에 대한 속죄의 표현일지도 몰랐다.

이제야 그게 참 잘못이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이제라도 그걸 말하고 싶은데, 그들은 지금 내 곁에 없다. 참으로 안타깝고 후회스럽다. 더 한심한 건 그렇다고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런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는 거다. 어머니는 지금 내 곁에 계신데, 매일 마주치며 살고 있는데, 나는 아직 당신께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아닌데.
#제사상 #사랑의 표현 #사랑합니다 #망자들의 날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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