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26

오택과 최천택, 3.1만세운동에 나서다

등록 2021.03.25 16:34수정 2021.03.25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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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 서울에서 삼일만세운동을 하다

1919년 1월 21 오전에 덕수궁 함녕전 서온돌에서 광무황제(고종)가 68세를 일기로 갑자기 사망했다. 뇌일혈 혹은 심장마비였다고 하지만, 아침에 마신 음료에 들어있던 독 때문이라는 설도 있었다. 시신 상태가 남달리 보였기 때문이었다. 의문의 죽음은 3·1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김인태가 파리에서 세계열강을 향해 한국의 현실을 알리고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독립청원운동을 하고 있을 때, 식민지 조선에서는 들불처럼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김인태가 파리로 가기 전에 만나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알았던 오택과 최천택은 적극적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다음은 오택의 3·1독립만세운동 기록을 중심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김인태를 보내고 난 뒤 서울에 올라온 오택은 서울 전문학교에 다니는 재경학우들을 방문하여 거사의 대요를 듣고 연락 부문을 맡아 분주하였다. 2월말경 전국에서 수천만 민중이 3월 3일 광무황제의 장례식인 인산식(因山式) 참관차 상경하여 여관과 가도는 범람하여 거사에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좋은 기회였다. 월말이 점차 다가오므로 매일 밤 취운정(翠雲亭)에 집합하여 각 부문이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보도와 지도가 밤늦게까지 진행되었다.

취운정은 왕이 궁궐을 나설 때 머물렀던 정자였다. 취운정은 1887년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집필한 곳이며, 1894년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이 '갑신정변'을 모의한 곳이기도 하다. 갑신정변의 주역은 이 일대에 모여 살았는데, 취운정에서 '거사'를 모의했으며, 취운정을 갑신정변 '거사 장소'로도 고려했었다. 1909년 겨울 나인영(나철)과 오혁, 이기, 김윤식, 유근 등이 모여 "국조(國祖)를 받들어 민족정기를 세우고 민족독립을 지키기 위한 나라의 정신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역설하며 단군교를 이곳에서 창시하였다. 훗날 민족 독립운동의 중심이 된 대종교로 발전하였다. 또 취운정은 1920년 윤익선이 '경성도서관'을 개관한 곳이기도 하다. 민태호 일가의 별원이었던 취운정은 백락동 마마로 불린 대원군 첩의 거처, 의친왕의 사저, 한성구락원, 조선총독부 점유를 거쳐 조선귀족회 소유가 되었다.

3월 1일 하오 2시 민족대표 33명이 명월관에서 모여 독립선언을 하고, 일반 대중은 파고다(탑골) 공원에서 집합하여 독립선언을 낭독한 후에 만세삼창을 하고 세 무리로 나누어 동대문으로, 남대문으로, 서대문으로 향하여 시가행진하며 외국 영사관을 방문하고 각 본국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여 달라고 위촉하기로 하였고, 대중은 공약 3장을 준수하도록 서로 부탁하기로 하였다. 지방은 각도에 선언문과 교유문(敎諭文)을 인쇄하여 사람의 손을 거처 알리는 전인 파송(派送)하였다. 만세 전날 밤 인쇄물 여러 종류가 집집마다 배부되고 3월 1일 아침 일찍 글자를 아는 사람은 다 알도록 되었다.

변봉금 여사의 하숙생들


당시 오택은 서울 종로 연지동 226번지 부산 출신 집단 하숙집에서 동지들을 만났다. 집주인은 최수련(崔守連)이었다. 최수련은 최천택의 당숙모 변봉금의 딸이었다. 변봉금은 부산 첨사 밑에서 무장을 지낸 변광(卞光)의 셋째딸로 부산 좌천동 출신이다. 19세 때 최상훈(崔尙勳)과 결혼하였으며 통역관이었던 남편을 따라 만주로 갔다. 최상훈은 좌천동에서 1868년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고 26세 때 관내 부주사가 되었다. 한성일어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어, 러시아에도 익숙하였다. 한때 일본군 통역관으로 선발되어 만주 심양에 파견되었으나 안중근 의사의 거사에 부부는 무한한 감격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후 최상훈은 일본군 사령부의 기밀 지도를 가지고 독립운동의 동지와 접촉 합류하였다. 그는 북간도의 군사단체인 의군부 헌병대장에 임명되고(1919). 북로군정서(총사령관 김좌진)에서 이범석과 같이 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다가 약 10여 년간 만주에서 항일전선에서 분투하다가 시베리아 치타지방에 여행 중 일본 밀정에 의해 암살되었다.

변봉금은 국권 피탈 후 남편인 최상훈이 만주 독립군에 참여하면서 소식이 끊어져 홀로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 정착하였다. 만주에서 가져온 돈으로 연지동에 집을 사들여 자리를 잡고 하숙업을 하였다. 그 집에는 강홍렬, 김법린, 김효석 등이 살았다. 연지동 집은 독립운동에 뜻을 둔 경상도 출신 젊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집회 장소처럼 사용하였다.

강홍렬(姜弘烈, 1895~1958)은 3‧1운동 당시 휘문고보 학생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는 보천교 신자로,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독립 선언문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비밀리에 합천 전 지역에 전달 배포했다, 의열단으로 군자금 모집과 제2차 조선총독부 폭파사건을 꾀하다가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모스크바 세계약소민족대표자대회에 참가하였고, 1924년 의열단 자금모집차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때 강홍열은 김원봉이 주도한 의열단에 1923년 7월 가입하고 조선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해 입국할 때 상해 혜령(惠靈) 전문학교 재학증명서를 얻어 귀국하였다. 7월 말 일본 규슈(門司)를 거쳐 부산에 들어와 좌천동 최천택을 만나고 동래 허영조의 동래의원을 방문하고 동지 문시환을 만나 신임장, 협박문, 관공서 사직 권고문, 의열단 선전문을 내주어 자금모집을 하였다.

허영조는 경성의전 4학년으로 3‧1만세 서울 시위에 참여하여 보안법·출판법으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강홍렬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찰관서 등 일제의 주요 관서 폭파 및 고관 암살 등을 계획하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의열단들인 강홍렬은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7개월간 복역하였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가족의 생계가 어려워 합천 사람들이 동정금을 모아 도와주었다. 출옥 후 광복 직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남 내무부장으로 활약하였다. 해방 후 경남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김법린(金法麟, 1899~1964)은 범어사 스님 출신으로 만해 한용운의 지시에 따라 3‧1운동에 참여하고 부산 범어사와 동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21년 파리에서의 유학, 1927년 2월 벨기에에서 열린 피압박 민족대회 참가하였다. 1927년 말 고국으로 돌아와 불교 청년들은 항일 비밀 결사체인 만당(卍黨)을 결성하는 등 불교계 혁신 운동을 하였다. 범어사 불교 전문 강원 학감과 조선어 학회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후 조선불교 총무원장, 문교부 장관, 동국대 총장 등을 지냈다. 김효석(金孝錫, 1895~1966)은 경남 합천군 출신으로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청년운동을 하였으며,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으로 국회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다가 납북되었다.

3‧1운동 재판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연지동 하숙집에 있었던 사람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경성약학교 학생인 박희창(朴喜昌, 朴喜鳳, 1899~1950, 당시 21세), 경남 양산 출신으로 경성의전 4학년인 김형기(金炯璣, 1896~1950, 당시 24세) 등이 살고 있었다. 박희창은 학우들과 함께 3·1운동의 계획에 참여하여, 만세운동 당일에 사용할 태극기 등을 제작하는 한편 동지 규합에 힘을 쏟았다. 그는 학우들과 함께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뒤,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박희봉은 시위행렬의 선두에 서서 보신각과 남대문 등지를 비롯하여 시내 각처를 행진하면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일경에게 붙잡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그 후 박희봉은 조선청년회 연합회의 결성 초기에 참가하여 1920년 7월 7일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의 지방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박창희는 훗날 변봉금과 같이 부산 수영동에서 함께 살았다.

부산 사상 출신의 경성의전 학생인 황용주는 당시 효제동 202번지에 하숙하고 있었다. 김형기, 황용주, 오택은 부산 사상의 사립명진학교 동창생이었다. 훗날 변봉금은 외동딸 최수련이 18세로 요절하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하숙집 부근 일대는 김상옥(1890~1923)이 인쇄물 배부에 철야를 하였다. 김상옥은 광복단, 혁신단과 의열단에서 활동하고 1923년 종로경찰서에 투탄한 독립투사였다. 하숙집 가까이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이었던 용성스님이 세운 대각사가 있었다.

당시 서울의 '북촌'이나 각 학교 인근에 하숙집이 많았는데, 전문 하숙집보다는 지식인층이 운영하는 하숙집이 더 많았다. 서울에 일찍 올라와 자리를 잡은 지식인이 고향 후학들을 하숙생으로 들이는 경우다. 전문학교 교수가 하숙집 주인인 경우도 있었다. 서울에 함경도와 평안도 '전문' 하숙집은 상당히 많았다. 같은 전문학교의 선후배뿐 아니라 서로 다른 전문학교 학생들이 하숙 생활을 통해 동지가 되었다. 3.1운동 과정에서도 같은 하숙집 학생들은 정세를 토론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의기투합해서 시위에 함께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택의 서울 만세운동 참가기

오택은 만반의 준비가 다 된 것을 알고 내일부터 사선(死線)을 출입할 각오를 하고 23세의 청춘이 애석하여 강낙원(姜樂遠, 1882~1960) 형과 내일의 거사를 전망하며 만일을 위한 점까지 서로 부탁하고 정오에 점심을 단단히 먹고 일행 10여 명이 종로로 나가 형세를 살펴보았다. 강낙원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활동한 체육인이다.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경성부에서 공부한 뒤 일본에서 검도를 배웠다. 이후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체육을 가르쳤다. 한국 검도와 유도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3월 1일 오택은 이른 아침부터 출전 군인처럼 경쾌한 준비를 하며 만일을 위한 점까지 서로 부탁하고 정오에 점심을 단단히 먹고 일행 10여 명이 종로로 나가 형세를 살펴보았다. 때마침 인산식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파고다 공원 정문 동쪽 공청(公廳)에 일본 헌병 수십 명이 수비하고 총기 소재를 하고 있으며 헌병 3~4명이 공원 정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택은 속으로 매우 놀랐다. 헌병들이 비밀을 알고 수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여 공원 안을 지나 후문으로 나와 동문 밖을 살펴보니 별로 수비가 없었다. 비로소 안심하고 부근을 배회하다가 2시 정각 10분 전에 원각사지 10층 석탑 앞에 서서 기다리니 세 개의 문으로 운집하는 대중이 질풍같이 몰아들어 5분 전 초만원이 되어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2시 정각이 되자 육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고성으로 낭독하여 수만 군중은 질식한 것같이 정숙하였다. 삼문(三問) 밖에는 원래 기십 배의 군중이 집합하였다. 선언서 낭독이 끝난 후 공약 삼장을 준수하여 달라는 부탁을 하고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낭독자로부터 선창하였다. 군중은 따라 외쳤다. 오택은 삼창 아니 오육창을 하며 비약하였다. 오택은 4, 5척이나 뛴 것 같았다. 그 순간같이 무야몽중(無夜夢中)의 환희는 없었다. 얼마나 뛰고 만세를 불렀는지 10여 분 후 서대문 밖으로 나와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목은 타고 등에는 땀이 가득 흘렀다.

전진(前陳)을 따라 종로를 지나 남대문을 향하니 상점은 모두 문이 닫히고 음료수가 준비되어 있기로 오택은 물을 많이 먹었다. 그 후 조선은행 앞에 이르니 기마대와 혈전을 하고 있고 노상에 일본 상인들은 무슨 이유로 소동하느냐고 묻는다. 조선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는 오늘부터 독립하였다"라고 했더니 그자들은 공포감을 가지고 도주하였다. 오택이 남대문을 지나니 지방 순사가 100여 명씩 떼를 지어 일본인 경찰 간부의 인솔로 입성(入城)을 하는 데 대다수가 조선 순경이라 오늘부터 독립되었다고 선전하였으나 그자들은 들은 척 만 척 끌려가는 강아지같이 눈만 껌뻑껌뻑하고 따라가며 인솔 경찰 간부의 질문과 답하고 만다.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잠깐 머물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더니 3층 창문에서 미국인 남녀 5, 6명이 축하 만세를 부르며 사진을 찍었다.

오택은 남대문 역 광장에 모여 수만 입성자에게 선전연설을 하고 서대문으로 들어가 정동 외국 영사관을 두루 방문한 후 고종 빈전(殯殿)인 덕수궁에 경비를 타도하고 수천 명이 들어갔다. 오택은 빈전 정면 뒷줄에 서서 보았다. 당시 빈전상에는 왕세자와 근친 및 귀족이 다수 서서 무표정으로 보고만 있었고 일본인 사무원 등도 끼어있었다. 시위대 선두에 있었던 한 사람이 큰소리로 광무황제(고종)의 영전(靈前)에 독립 고유(告諭)를 올리고 독립만세 삼창을 한 후 물러 나오니 중도일여조화실(中導日女造花室)에서 푸른색과 붉은색 물을 뿌려 흰옷을 입고 있는 이에게 청홍색을 덮어 씌었다. 이것이 후일 증거물이 되어 검거자가 허다하였다. 오택은 흰옷을 입었으나 체포되지 않았다. 일본인의 간사로운 지혜는 놀랄 만 하였다. 광화문 네거리에 당도하니 수만 군중이 모여, 가는 전차 오는 전차 다잡아놓고 만세를 부르는데 그중에도 벌써 춤추며 대취한 자도 있고 인산 구경 온 농촌 노인들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오택은 대혼잡 중에 포위되어 겨우 종로4가로 나오니 여전히 입추의 여지가 없이 군중은 만세만 부르고 있었다.

겨우 통로를 얻어 하숙에 돌아오니 오후 5시경이었다. 동료 중 대다수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밤에야 전원이 돌아왔기로 각지 노선과 경과담을 교환하고 축하연을 베풀고 축하주를 실컷 마셨다. 그 다음 날은 전신이 피로하여 일어나지 못했다. 3일 인산식에 선두에 참례하여 따라갔는데 동대문 밖 상춘원(常春園) 부근에서 왕세자에게 절하고 땅에 엎드려 통곡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호위자들에게 쫓겨났다. 장례식(인산) 당일은 전시(全市)가 경건하였다.

부부 밀정이 되었던 강낙원 부부

오택과 같이 행동을 했던 강낙원은 이상재의 소개로 만나 2살 많은 오현주(1894~1989)와 결혼했다. 1919년 발생한 3·1 운동 직후 일본 군경의 가혹한 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하였고 무차별 검거로 유치장과 감옥은 차고 넘쳤다. 갇힌 투옥자들을 뒷바라지하는 자선 단체가 생겼다. 장선희(張善禧 : 정신여학교 교사)·이정숙(李貞淑 : 세브란스병원 간호사)·오현주(吳玄洲 : 재령명신여학교 교사)·오현관(吳玄觀 : 군산 메리블덴여학교 교사)·이성완(李誠完) 등 정신여학교 동창들이 중심이 되어 정신여학교 생도들과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규합하였다.
 

부산진일신여학교 부산 최초의 여학교이자 부산 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곳이다. 부산 좌천동은 근대 부산 여성운동의 근원지였다. ⓒ 이병길


그들은 3·1운동으로 갇힌 민족지도자들의 사식 차입과 그 가족들의 생활 구제를 위하여 3·1운동 후 첫 비밀여성단체를 조직하였다.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였다. 오현주의 언니 오현관이 회장을 맡았다. 이후 혈성단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합쳐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로 통합했고, 1916년 6월 '대한민국에국부인회'로 조직이 확장되었다. 회장은 오현주, 언니 오현관은 고문이 되었다.

3·1 운동에 가담하였던 강낙원은 그 후 상해에 갔지만 임정의 독립운동과 군자금 모집에 회의를 느끼고 독립의 가망성에 회의를 가졌다. 희망을 품은 자에게 미래는 가까이 있지만, 회의하는 자에게는 절망의 현실만 가까이 있는 법이다. 그는 부인 오현주에게 애국부인회에서 손을 뗄 것을 거듭 권유했다. 오현주는 강낙원과 평소 잘 알고 지냈던 경상북도 경찰국 고등계 형사 유근수에게 부인회 회원 명단, 인장, 취지서, 본부 및 지부 규칙 등 증거 자료를 모두 주고 애국부인회의 조직과 활동을 털어놓았다. 11월 오현주의 정신여학교 동창생 김마리아 등 애국부인회 관련자 24명이 체포되고 이 사건으로 부인회는 해체되었다. "애국 여성 만세!"를 외치며 재판에 임했던 부인회원들은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강낙원과 오현주 부부의 일회성 밀정 활동은 일제강점기 동안 많은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그들의 남은 삶은 편안했다. 강낙원은 권투와 유술(유도) 경기에서 권투가로 유명한 인도인을 비술로써 용맹하게 이겨버린 인물로 1921년 6월 신문에 보도되었다. 1921년에 한국 최초의 사설 도장인 조선무도관을 설립해 제자들을 가르치고, 1926년 12월 호기풍, 박재영, 여운형, 한진희 등과 민족적 원기(元氣)양성을 목적으로 조선현무회(朝鮮玄武會)를 창립하였다. 1927년 조선씨름협회를, 1934년에는 전조선아마튜어권투연맹을 창립하는 등 한국 체육계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해방 후인 1948년 11월 청총·서청·대청·독청·국청 등 5청년단체가 중심이 되어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이 결성되었는데, 강낙원이 핵심인물이었고 이승만의 배려를 받았다. 1949년에 강낙원, 오현주 부부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었다.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부부 밀정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었다.

최천택, 부산 만세운동에 동분서주하다

김인태로부터 독립 만세운동 소식을 들은 최천택은 그날부터 분주하게 바빴다. 장지형(장건상 조카)에게 만반을 준비하도록 하고 그는 울산, 울주, 포항까지 가서 동지들에게 만세운동을 대비할 것을 알리고 대구에서 3월 1일을 맞았다. 대구의 서병소(徐炳昭), 서병무(徐炳武)에게 궐기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 당숙모 변봉금의 연지동 하숙집을 찾아갔다. 하숙집에서 알게 된 박희창, 강홍렬, 강낙원 등 20여 명의 동지와 함께 투옥자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최천택은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여 목숨마저 내놓은 수감자들의 의연한 태도에 김은 감명을 받았다.

최천택이 서울에 올라간 시점은 오택이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한 시기와 일치한다. 하지만 서로의 만남에 대한 기록은 없다. 아마 오택이 서울 만세운동을 하고 난 뒤 체포의 위험을 느낀 후 도피한 이후에 최천택이 서울에 갔던 것 같다. 최천택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니는 동산(東山) 김형기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반갑네. 그동안 만세운동을 준비한다고 수고가 많았겠네."
"아닐세, 조선사람이라면 당연해야 할 일이지 않겠나. 민족이 스스로 나라를 다스려 가야 하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 지금 조선은 온통 눈물바다가 아닌가? 내가 다니는 경성의전도 민족적 차별이 심하다네."
"그런가. 몰랐네."
"경성의전은 1916년 4월 20일 개교하였지. 조선인(50명)은 시험을 쳐서 입학하지만, 일본인(25명)은 모집 정원에 미달하면 무시험이라네. 세상에 이런 차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또 일본인이 받는 교육과 조선인이 받는 교육이 다르다네. 그리고 조선인은 졸업하면 조선에서만 진료할 수 있지만, 일본인은 일본 제국 어디에서나 진료 자격이 있다네."

최천택은 경성의전에 민족적 차별 교육이 심하였음을 처음 알았다. 당시 김형기는 경성의전 학생대표로 학생단을 이끌고 만세 시위를 하는 주동자였다.
3월 1일의 만세 시위는 학생들의 참여기획과 준비를 한 학생단(學生團)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자 YMCA 간사인 박희도의 주최로 1월 27일 중식집 대관원(大關園)에서 경상의전의 한위건과 김형기,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의 강기덕,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주종의, 경성전수학교의 이공후와 윤자영, 보성전문 졸업생 주익, 연희전문 전퇴생 윤화정 등 10명이 모여 만세운동에 대해 논의하였다. 2월에는 역시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해외 독립운동에 관한 정세를 듣고 학생대표들과 회합하여 만세 시위 운동 계획을 세웠다. 2월 중순쯤 각 학교의 학생 대표자로 경성의전의 김형기, 경성전수학교 전성득, 세브란스의전 김문진, 경성공업전문학교 김대우,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6명이 선정되었다. 이 학생운동의 주도자는 실재 경성의전의 한위건(韓偉健, 1896~1982)이었다.

당시 경성의전은 2월 학년말 시험을 치르기 직전이었고 25일은 예비시험을, 3월 1일은 1학년 학생들의 조직학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다. 학교 당국은 동경 2‧8 독립선언으로 학생들의 통제를 강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4학년으로 경성의전의 대표자인 김형기는 경성의전 학년별 대표를 설득하고 또 학생들 하나 하나에게 만세 시위 참가를 설득하여 시위에 나오도록 하였다. 당시 김형기는 재경 유학생 회장을 맡고 있어 그의 영향력이 컸었다. 그 결과 만세 시위에 다수의 경성의전 학생들이 참가하였고 가장 적극적으로 시위를 하였다. 3월 1일 시위에 김형기는 종로 종각 앞 사거리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5일에는 남대문 인근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1919년 3월과 4월 시위 현장이나 하숙집 등에서 체포된 경성의전 학생은 40명이나 되었다. 독립선언서 및 청원서 관련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심문을 받은 361명 중 경성의전 학생이 38명으로 다른 학교에 비해 가장 많았다. 재판과정에서 김형기는 김형기 외 209인, 김형기 외 24인 등 그는 피의자의 대표로 불리었다.

하숙생들이 검거되자 최천택은 도피하여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에도 독립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부산은 경부선으로 인해 서울의 만세 소식이 빨리 알려졌고 3월 3일 이미 부산 일원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하지만 만세운동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산은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었던 것만큼 경찰과 헌병대, 수비대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시위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산에는 대동청년단과 국권회복단 같은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들이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최천택은 유유진(兪有鎭) 김수홍(金守弘), 백용수(白龍水) 등과 만나 밀의를 거듭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대량 등사하여 각 사회단체에 배부하였다. 한편 같은 좌천동에 있는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3월 11일 의거와 그 후 동료 여학생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투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지원하였다.

3월 11일 오후(오전) 9시부터 일신여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은 좌천동 정공단 거리를 누비며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주민 100여 명도 합세하여 정공단 일대는 태극기의 물결로 넘쳤다. 부산 최초의 만세운동은 밤 11시까지 지속되었다. 여학생 전원과 교사 2명이 체포되었고, 정공단 주변은 일경의 경계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부산진공립보통학교 교사 홍재문(洪在文, 1897~1958)이 학생 배수원(裵守元) 등과 여러 차례 독립 만세운동에 대한 회의를 한 후, 4월 3일을 기하여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의거하기로 하고, 또 민중의 독립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키로 하였다. 4월 3일 오후 2시 30분경, 그는 '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좌천동 거리에 세워두고, 4학년 학생을 이끌고 수백 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며 시위 운동을 벌였다. 정공단 일대에 독립 만세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시위군중은 출동한 수비대 보병과 경무기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부산 정공단 만세 골목 좌천동 정공단 주변 골목은 1919년 3월 만세운동의 함성이 가득한 곳이다. ⓒ 이병길

 
홍재문은 1921년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활약하다가 붙잡혀 11년을 선고받고 두 번의 감형을 받아 7년의 옥고를 치르고 1927년 6월 석방되었다. 출옥 후 밀양 집으로 갔지만 처음에는 집을 찾지 못하였다. 이리저리 집을 찾아갔지만 이미 모친과 동생은 사망하고 형님과 남아있었다. 4월 8일 다시 좌천동 정공단 일대에서 이갑이, 전호봉 등이 모의하여 대중을 동원하여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날 오후 8시 30분 인근 부산진에서도 일신여학교 학생으로 추정되는 50여 명의 여학생의 시위가 있었다. 4월 27일 오후 4시경에는 좌천동 아래 영가대 부근 철로가에서 조선인 청년 약 30명이 부산을 향하여 달려오는 열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또 저녁 7시 25분 당감동 제1철교 건널목에서도 투석 사건이 일어나 특별열차 2등 차창의 이중 유리가 박살이 났다.

부산진지역과 달리 동래지역에서는 동래고보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동래장터에서 시위를 일으켰다. 동래만세시위는 3월 7일 서울에서 온 학생대표와 부산상업학교 학생대표가 동래고보 학생대표인 엄진영, 김귀룡, 고영건 등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것을 계기로 준비 작업이 진행되었다. 또 동래고보 출신 곽상훈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 수학 교사인 이환과 접촉하여 시위 계획을 상의하였다. 당시 부산상업학교 3회 출신인 좌천동의 왕치덕은 3‧1운동 당시 부산 학생대표로 상경하였다고 한다.

동래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 엄진영이 군청 앞 망미루에 올라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작되었다. 약 200여 명의 군중이 참가하여 시가행진을 하였고 일본 군경의 발포와 주도자 검거로 진압되었다. 하지만 18일과 19일에도 만세시위는 이어졌다. 이 시위는 서울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한용운의 밀지에 따라 범어사로 내려온 김법린이 독립선언서를 범어사 명정 학교와 지방학림학생에게 준 것에서 촉발되었다.

동래시장의 만세시위는 학생조직과 불교조직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동래 만세운동의 주역인 엄진영, 엄병영 형제의 친척인 양산의 엄주태는 만세운동을 목격하였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가서 양산공보출신 졸업생인 전병건(전혁)‧박삼도 등과 같이 독립 선언문과 경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할 것을 협의하고 200여 매를 비밀리에 인쇄하였다. 3월 27일 양산읍 장날에 운집한 3000여 민중에게 배포하며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경성의전의 대표 학생이었던 김형기에게 영향을 받았으리라 여겨지는 경성의전의 양봉근의 서울 시위 이후 부산 구포로 내려가 임봉래‧윤경 등 구포청년들을 만나 만세 시위를 주도하도록 한다. 3월 29일 구포장날에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군중은 약 1천명으로 부산지역 만세시위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시위군중 9명, 일본인 군경 3명, 조선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는 큰 충돌이 일어났다. 부산지역의 만세운동은 학생과 종교조직이 중심이었지만 구포와 기장 등지로 확산되면서 시장 상인, 노동자, 농민층의 참여로 확대되었다. 훗날 김형기는 울산에서 병원을 개업했는데 양봉근도 역시 울산병원을 열렀다. 그는 울산 신간회지회(1925!1931)에서 활동하며 지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 후 보건운동과 나병환자 구제를 하다가 대중을 위한 의사로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부산진 정공단 일대의 만세 시위에 배원수, 이갑이, 김애련 등은 부산진공립보통학교 출신이며 홍재문은 교사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정공단 아이들인 박재혁과 최천택, 김영주 등이 다닌 학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하지만 일본인 중심지였던 초량왜관이 있었던 남포동 일대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동래 장날 만세사건의 주모자인 김인호는 단시 부산 학생독립운동의 지원하고 지도한 사람은 최천택이라 증언하였다. 부산 만세운동의 배후에서 활약하였던 최천택은 부산이 잠잠해지자 경북의 포항, 상주, 고령까지 가서 독립만세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는 밤을 세워 험준한 산길을 넘나들었으나 고달픈 줄 몰랐다. 주변에 생사를 같이할 동지들이 있었고 조국광복은 신앙이었던 때문이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의열단 #오택 #최천택 #김형기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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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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