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27

오택, 연통제 특파원 활동을 하다

등록 2021.04.01 16:20수정 2021.04.0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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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 민중항쟁으로 번진 만세운동

1919년 3‧1운동은 한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다. 3월 1일 첫 만세운동 이후 5일 남대문 역(현 서울역) 앞서도 1만여 명의 학생 시민이 모여 학생단 주도의 제2차 대규모 시위 운동이 있었다. 3일 광무황제의 국장에 참례했던 수십만 지방 인사들이 만세 운동을 보았고, 또 직접 참여했고, 독립선언서를 읽고 가지고 고향으로 갔다. 또 10일 휴교령으로 학생들 역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민족대표들의 밀명에 따라 지방에 내려간 독립투사 이외에 국장 참여자와 학생들이 귀향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주체가 되었다. 이제 시위는 중앙 통제 기관의 지령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지역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 미주와 일본에서도 일어났다. 독립운동은 민족지도자와 학생 중심이 아닌 한민족 민중의 독립운동이 되었다.

독립운동은 단순히 독립 만세 시위행진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산중 봉화, 상가 철시, 사망자 운구, 신문과 격문 제작 살포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3월부터 4월 말까지 전국 13개 도에서 1,848회가 일어났다. 물론 작은 규모의 시위는 통계하지 않은 것이다. 경남은 137회 일어났고, 합천 삼가에는 1만 명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시위 진압은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또는 헌병 같은 경무 관원을 동원했지만, 인근 부대의 주둔군과 철도 엄호대도 투입하였다. 일본 거류민들은 자위단을 조직하여 무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소방관을 투입하여 소방 갈고리로 시위를 진압하여 머리 부상과 두개골 관통의 혼수상태에 빠지게도 하였다. 시위진압이 어려울 경우 칼을 휘두르고 발포도 하였고 집단 학살도 하였다. 1919년 6월 30일 「시위 관련 조선총독부 통계」에 보면, 847회의 시위에서 일본 쪽 관헌은 사망 8명, 부상 158명인데 비하여 조선인은 사망 554명, 부상 1,437명이었다. 얼마나 잔혹하고 과격한 진압인지 알 수 있다.

서울에 있었던 오택은 만세운동 이후의 상황을 기록하였다. 광무황제 장례식 전에 매일 밤 두 곳의 대건물에서 화재가 일어나고 북천 일대에서 일본인 시체가 발견되어 야간 통행이 중단되었다. 3월 4, 5일부터는 내란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시내 각 경찰서에서 시위대 검거에 착수하였다. 본정서(本町署), 종로서 뿐인 것을 동대문, 용산 등 세 곳에 경찰서를 신설하여 경쟁적으로 검거하였다. 결국 연지동 변봉금의 하숙집도 독립군 소굴로 판정되어 매일 3, 4개 경찰서의 형사대가 급습하여 가택 수색을 하였다. 낮에는 전부 피신하고 밤에 집합하여 지방 문서 배부, 순회 집회 등 제2차 시위 계획을 하였다. 그 사이 수백 명의 청년 학생이 검거되었다.

3월 중순, 제2차로 대한문 앞 광장 시위는 사전 발각으로 다수가 피검되어 원만치 못했다. 제 3회는 4월 초순 안국동 사거리에서 집합하였다. 수만 명이 집합하여 거사 직전에 군인 1개 대대가 종로 4가로부터 발포하여 습격해와 다수 사상자를 남기고 해산하였다. 병원 입원실은 초만원이었고, 정원에 수십 명 부상자가 누워 가료를 하였다.

4월 이후 민중운동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격서(檄書), 군자금 모금 등이 유행되었다. 개중에 협잡배의 출몰도 있었다. 3월 중순 부산서의 검거 수배로 오재영은 오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서울과 인천을 다니면서 정미군 행세하고 기미통장(期米通帳)을 가지고 다니며 형사의 신체수색 때 제시하여 위험을 모면하였다. 한번은 연지동 하숙집에 쉬는데 오전에 종로서와 서대문서 형사대가 와서 가택 수색을 하고, 오후에 동대문 형사가 와서 오전의 상황을 말하고 별일 없으며 수사 중지를 간청하였다. 그러자 포승을 하며 구속하려 하자, 오택은 유창한 일어로 항변하였다.


"나는 조선의 대판(大阪)인 부산 상인이다. 하루에 수십만 원의 이해 보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시국 관계 구속은 부당하다. 자, 이 정기미(正期米) 통장을 봐라."

오택의 능숙한 일본어 실력과 통장을 보고 일본인 경찰은 선량한 상인을 보호하겠다며 부산인이라 일본인 4촌 되는 것같이 생각하고 그냥 돌아갔다.

오택, 연통제 경남 책임자로 활동하다

1919년 3월 이후 서울에서 발생한 큰 사건은 대동단사건, 경북 유림단 사건, 애국부인회 사건, 청년외국단 사건, 강우규의 총독 암살의거였다. 오택은 이 운동에 다소 간접적인 협조를 하였다. 하지만 전부 국부적이고 체계 있는 전체운동이 아니었다.
만세운동 이후 오택은 상해 임정과 모종의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3‧1운동으로 선언된 독립국으로 대한민국을 운영하기 위한 방책을 모색하였다. 임정은 '연통제(1919년 7월)' 혹은 '지방연통제(1919년 12월)'라는 명칭으로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하였고 그 지방행정관청이 '연통부' 혹은 '독판부'였다. 즉 1919년 7월의 연통부는 임정이 국내와의 연락, 군자금의 모집, 항일투쟁의 조직을 위하여 조직한 것으로 도 단위에는 감독부, 군에는 총감부(통감부), 면에는 사감부를 두었고 대표는 감독, 총감, 사감이라고 하였다. 12월에 조직을 개편하여 도에는 독판부, 부에는 부서, 군에는 군청, 면에는 면소로 개칭하고 대표로 독판, 부장, 군감, 면감을 두었다.

오택은 각도(各道) 동지를 규합하여 연통부(연통제)로 통일운동을 9월 하순부터 새로 발족하였다. 장소는 창덕궁 후원에 있는 취한정(翠寒亭), 삼청동, 화동 등지로 전전 집합하여 13도를 전부 망라하였다. 오택의 기록은 최창익과 강택진의 공훈록과 재판기록을 보면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오택은 후일 발각을 우려하여 도 대표 한 사람이 연석회의에 참가하고 각자 돌아가 지하운동을 지역적으로 하게 하고, 인쇄물은 중앙에서 출간하여 동일한 것을 사용하게 하며 다른 도(道) 사이의 직접 연락은 하지 않기로 하였다.

당시 도무는 상해 임정의 국내 파견 기관으로서 국내 민중에게 교유문(敎諭文)을 수만장 배부하였고, 각도 임정 국내 대의원 한두 명씩 명망 있는 지사(志士)를 추천하여 대의원 증서를 전달하였다. 각 도의 친일 분자 반역자를 조사하여 중앙부에 보고하는데 악질 반역자는 총살하되 각도에 우선 대표자 2, 3명씩 실행하기로 하였다. 또 진정한 성금을 받아 중앙부에 집합하여 국내 운동비로 사용할 것 등이었다. 당시 서로 뜻이 맞아 보조를 일치한 사람은 함북 책임자 최창익, 함남 책임자 윤태선, 경북 책임자 송전도, 경남 책임자 오택이었다. 그 외 각도 책임자들은 다소 진행 방침에 치중점이 서로 달랐다. 오택이 함께한 인물은 현재까지 알려진 연통부 13도 책임자와 조금 다르다.

연통부는 전국을 13개 도(道), 12개 부(府), 215개 군(郡)으로 조직하여 각 1명의 책임자를 임명하였다. 하지만 1919년부터 21년까지 독판부는 10개로 경상도와 강원도는 독판부가 전혀 설치되지 않았다. 독판부를 설치하고 독판을 임명하는 일은 내무총장으로부터 임명된 특파원이 진행하였다. 1919년 12월 5일 기준으로 임정에서 임명한 연통제 도직원(道職員)은 함남 독판 윤화수, 평북 독판 조병준, 평남 독판 이덕환, 전북 독판 이석현, 전남 독판은 기동연이었다. 실제로 경기 이남의 삼남 지방에는 연통부가 실시되지 못하거나 시행되더라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특히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강원도에는 연통부가 실시되지 못하였다. 충청남도와 전라남도, 전라북도에는 독판 임명 이외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경기도도 독판과 인천부 부장(府長)이 임명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택의 기록은 이와 다르며 그는 1920년까지 연통부 관련 활동을 전국적 규모의 조직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기록된 자료에는 현재 오택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는다.

윤태선(尹泰善, 尹台善, 1875~?)의 공훈록과 재판 기록을 보면, 1919년 9월 서울에서 강대호(姜大浩, 개성), 송범조(宋範朝, 경상도), 박풍목(朴楓穆, 朴尙穆, 평안도) 등과 경성부 취운정(翠雲亭)에서 동지들과 만났다. 송범조를 윤태선은 잘 알고 있었으나 나머지 둘은 처음이었다.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동지 규합이 필요함으로 13도 총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또 각도에 지부를 설치할 것을 합의하고 역할 분담을 하였다. 하지만 윤태선은 총무 및 함경북도 지부 설치 담당자가 되었다. 박상목은 평안남도를 담당을 권하였으나 응락하지 않았다. 실제로 취운정 회의 전에 13도 총감부는 성립되었다고 윤태선은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경성에 상해임정의 명령과 지휘를 받는 하급관청으로 13도 총감부를 둔 것은 연통제는 복잡하고 발각되기 쉬우니 13도 통감부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함북 연통제 사건 공판 1920년 임정의 연통제 조직은 면지역까지 조직된 지방자치제도였다. 출처 : 동아일보( 1920.08.22.) ⓒ 동아일보

 
1920년 12월 중순 일본 경찰에 의해 함경북도 연통부 조직이 발각되어 윤태선을 비롯한 47명의 동지들이 재판을 받았다. 당시 이 당시의 재판과정는 동아일보에 대서특필되었다. 동아일보는 '세인(世人)을 경해(驚駭:크게 놀람)케 한 연통제 공판'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온 세상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더욱 당국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라고 보도했으며 당시 재판 기록을 연재하였다. 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하던 신한민보 9월 23일자에도 거의 그대로 실렸다. 1920년 11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윤태선은 47명 중에서 최고형인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윤태선의 기록보다 더 구체적 기록이 있다. 강택진의 군자금 모금 사건의 내용은 실상 임정의 연통부와 관련된 내용으로 오택의 기록과 연관성이 깊다. 1919년 9월의 취운정 모임에는 강택진(姜宅鎭), 박시묵(朴時默), 박상목(朴尙穆), 김일청(金一淸), 이상욱(李尙旭), 송병조(宋秉朝), 윤태선(尹泰善) 7명이 모였다고 강택진의 재판기록과 신문조서에 나온다. 8월 초 강택진을 만난 박시묵은 애국금 수합위원, 상해임시정부 특파원, 애국금 수령서 등을 보여준다. 윤태선이 소지한 문서는 독립운동 유고문(諭告文), 대한임시정부 13도 총감부 명의의 찬의사(贊義士) 임명사령서, 동 명의의 애국금 수금위원 사령서 등이었다. 취운정 모임 이전에 강택진은 박시묵과 아는 사이이고 또 종전부터 면식이 있는 이재영(李在永)에게 계획을 이야기하여 동료로 끌어들여 이재영의 소개에 따라 곽병도(郭炳燾, 羅炳一, 당시 41세, 仁川 米豆거래소중개업), 강천민(康天民)을 만나 의논한 결과 함께 조선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종사하게 되었다.

취운정의 7명은 박시묵의 발의로서 애국금 모집 기관으로 경성에 조선 13도 총감부를 설치하고 총간부 내에는 총무부(윤태선), 노동부(박상목), 교통부(김일청), 재무부(박시묵), 경무부(송병조), 편집부(이상욱), 교섭부(강택진) 등 7부를 두는 것으로 협의 결정하였다. 맹주는 총무부가 되었다. 총감부는 경성에 두었지만 소재지가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부장은 결정되지 않았다. 수금 지역과 담당은 연고지 지방으로 하였다. 함경남북도(경성) 윤태선, 평안남도(성천군) 박상목, 평안북도(의주군) 김일청, 평안북도 이상욱, 경상남도(부산) 송병조, 경상남북도(밀양) 박시묵, 경상북도(영주군) 강택진이었다. 강천민, 곽병도, 이재영은 조선13도 총간부 특파원으로 애국금 수합위원의 사령을 교부하여 애국금을 모으도록 하거나 직접 모았다. 이런 상황을 강택진은 상해에 가서 안창호, 이동휘, 이동녕, 신규식, 이시영 등과 면회하고, 상황을 보고했다.

오택의 기록에는 함북 책임자 최창익, 함남 책임자 윤태선, 경북 책임자 송전도, 경남 책임자 오택이었다. 강택진 관련 자료의 경남 책임자인 송병조(宋秉朝)는 오택의 송전도(宋銓度)와 그 이름이 다르다. 하지만 송전도가 부산 동래 복천동 출신이기 때문에 송병조가 송전도일 가능성이 크다.

송전도(宋銓度, 1891~1978)는 부산 동래 복천동 출신이다. 1907 동래 개양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09년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함경북도 부령군으로 이주하여 남형우, 안희제, 김동삼, 윤현진 등과 같이 국권회복을 위한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였다. 그 후 북경, 상해, 봉천 등에서 애국독립단체 동제회(同濟會)의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길림·북간도·함경도를 오가며 활동하였는데, 함경도 쪽에서는 신간회와 『동아일보』 지국을 맡아 활동하였다. 송전도의 이력에도 연통부 활동 상황은 없지만, 동제회 연락책 활동이 연통부와 관련된 것이 가능성은 크다.

1919년 10월 경 이재영과 강천민은 강택진의 요청으로 애국금 모집을 위해 경북 영주(榮州)지방에 갔지만 성과가 없었다. 결국 애국금 모집 조선 13도 총간부 명의로 유고문이라는 제목에 조선독립의 임무를 설명하고 이것을 완성시키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천명한 서면을 각처에 발송하였다. 11월 곽병도와 이재영은 영주에 다시 가서 정규집(丁奎集)과 정규창(丁奎昌)에게 각 각 300원을 모집하여 박시묵에게 전달하였다. 곽병도와 이재영은 영주에 갔을 때 상해임정 특파원 명함표를 가지고 다녔다. 곽병도에 따르면, 이재영(李在永)은 충청북도 단양군 사람으로서 경성 주소는 경운동 삼산(三山)약국 내이고, 상해에서 파견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재영의 주소와 혐의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체포한 기록이 없다. 역사적 자료에는 검색되지 않는다. 혹시 이재영이 부산 정공단의 오재영, 즉 오택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1921년 5월 25일 강택진은 징역 6년에, 곽병도는 징역 4년을 구형받았다. 6월 3일 판사는 강택진에게 징역 2년, 곽병도는 징역 1년 6개월, 미결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하였다.

오택이 함북 책임자로 지목한 최창익(崔昌益, 1896~1956)은 함북 온성(穩城) 출신으로, 1918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19년 3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그 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21년 7월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경제과 유학 중 학우회를 조직해 강경·전주·군산 등지에서 순회 강연을 하다가 전주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5일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그의 이력에는 현재 연통부 관련 사실이 잆다. 오택의 기록에 따르면, 유학 가기 직전에 연통부 활동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최창익은 1925년 졸업 이후 국내외에서 공산주의자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중국에서 김두봉, 무정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38년 조선의용군에 참여하고, 1942년 조선독립당을 창당하여 부주석이 되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연안파로 활동하였다.

윤태선과 강택진의 재판 기록에는 오택(오재영)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오택의 위장술이 뛰어난 듯하다. 함북의 최창익과 경북의 손전도, 경남의 오택은 연통부와 관련한 역사 기록은 현재 오택의 기록 이외에는 없다. 하지만 강택진의 자료를 통해 볼 때 오택의 기록은 사실성이 인정될 수 있다.

오택은 9월 말 각종 서류를 많이 부산으로 운반하여 좌천동 주택 후원에 묻어놓고 각 군에 한 사람씩 정수분자를 선택하여 책임자를 정하고 중요한 일을 실행하였다. 제일착으로 경남 대표원으로 송전도와 오택은 동래 김병규를 추천하여 13도 간부 연석회의에서 통과되어 임명장을 주려 하니 김병규가 받지를 않았다. 결국 임명장을 집 후원에 묻었다.

김병규(金秉圭, 1880/1887~1962/1960)는 부산 동래 출신으로 1906년 개양학교를 졸업하고 삼락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8년 동래은행 본점 지배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에는 안희제가 결성한 부산예월회 회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회원은 양신의 김철수(부산상사, 고려상회 지배인)와 전석준(무역상, 일금상회), 울산의 송태관(경남은행장, 삼산자동차 중역), 부산의 김종범(조선주조 중역)과 문영빈(백산상회 감사), 장우석(구포은행, 구명학교 설립자) 그리고 경주 최부자집의 최준과 최순 등이었다. 예월회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에 따라 교육제도의 개편 논의에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산업개선 청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아마 연통부에 활동하는 것이 김병규의 사업에 지장이 있었을 것이다. 김병규는 그 후 일제 강점기 지방 관료와 의원으로 활동하였지만 민족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였다.

경북의 대의원으로 곽종학(郭鍾鶴)의 임명장을 송전도가 전달하니, 곽종학은 의관을 정제하고 분향사배 후 정중히 받았다. 그는 나중 경북 유림운동에 적극적이었다고 오택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곽종학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당시 각 지역의 명망가를 추천하였지만 실제 임명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튼 이런 일로 보면 오택은 연통부의 특파원 역할을 한 듯하다. 당시 특파원이 지역 유지에게 '연통제 취지서'를 전달하고 이 취지에 승낙하는 인물들과 상의하여 적임자를 추천받았다. 특파원은 추천받은 적임자를 연통제 직원에 임명할 수 있었다. 특파원은 「임시연통제」가 공포된 7월에 가장 많이 파견되었으며, 이동녕(李東寧) 내무총장 시기까지 모두 32차례 파견되었다. 특파원 중 경의선 연선은 독고감, 경원선 연선은 명제세, 경부선 연선은 김상문(金祥文)이었다. 김상문은 1919년 3월 13일 양산 통도사 신평만세운동의 주모자 중의 한 사람으로 통도사 스님이었다.

1919년 음력 9월 15일 오택은 부산에 온 김두옥(金斗玉, 통영)과 김두현(金斗鉉, 하동)에게 독립운동에 노력할 것을 서약하게 하고, 격문 배포를 통한 인심 동요와 독립 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정에 보낼 것을 협의하였다. 그때 오택은 두 사람에게 윤태선이 보내 준 조선독립에 관한 고유문(告諭文) 10 매을 주고, "본부 찬의사(贊儀使)에 임명한다. 4252년 9월 13도 총감부"라고 인쇄된 사령서를 교부하고 격려하였다. 사령서는 경찰에 발각되면 곤란하므로 불태웠다.

최천택, 상여운구 독립운동을 하다

경남과 경북지역을 오가면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최천택에게 통영 만세운동에 관련된 이학이(李學伊, 1898~1919)가 부산형무소에서 옥사한 소식이 들려왔다.

통영 만세운동의 시발은 1919년 3월 8일 경성 배재고에 재학 중인 진평헌이 귀향, 3월 13일 장날을 기해 남망산공원에서 진평원, 양재원, 권남선, 김형기, 배익조, 모치전, 강세제, 이학이, 허장완, 서상호, 최천, 방중한, 김종원, 신수동 등 청년들이 거사를 결의하면서 시작됐다. 이학이는 당시 통영면사무소에서 면서기(面書記)로 근무 중이었다. 3월 9일 송정택의 사랑방에서 모여 만세 의거를 협의한 데 이어 3월 12일 재차 모임을 갖고 선언서의 기초, 운동의 방법 및 선언서의 배포 등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3월 13일 이학이는 자신이 근무하는 통영면사무소 등사판과 이웃 산양면사무소의 등사판까지 동원하여 동지들과 함께 '동포에게 격(檄)하노라'는 격문을 밤새워 1,200매를 등사하고 태극기도 따로 수백 매 만들었다. 그리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3월 14일 오전 1시 30분경 이학이는 강세제·허장완 등과 함께 등사판을 면사무소에 갖다 놓으려 갖다가 대기 중인 일경에 붙잡혔다. 당시 등사에 필요한 용지 2천 매를 일본인 나카무라 상점(中村商店)에서 구입하였는데, 주인이 이 사실을 일본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이 즉시 수사에 나섰던 것이다. 이에 따라 만세운동 계획이 발각되면서 나머지 6명의 동지들도 오전 3시에 전원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남자들은 검거되었지만, 13일 만세는 사전에 연락을 받았던 부산진일신여학교 출신인 통영사립유치원(진명유치원) 보모인 문복숙과 양성숙, 김순이가 통영중앙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일어났다. 세 처녀의 선창에 장터에 모였던 수천의 군중이 호응해 열광적으로 만세를 호창했다. 감옥에 갇힌 16살의 문복숙은 간수의 옥중 감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너희가 태산을 떠다 옮겨 놓을 수 있을지언정 태산같이 움직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은 떠 옮기지 못할 것이며 또 너희가 강철은 굽힐 수 있으나 강철같이 굳센 우리의 마음은 굽힐 수 없다."

4월 2일 통영 중앙시장에서 다시 만세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통영 기생인 정막래와 이소선이 시위에 참여했다. 3‧1운동 당시 기생들은 '화류계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에게 독립사상을 가르치고 선동하는 독립투사였다. 통영의 예기조합 기생인 이 두 사람은 금반지를 팔아 상장용(喪章用) 핀과 짚신을 사서 다른 기생 5명에게 나누어 주고 같은 복장을 하고 기생단을 꾸려 시장으로 행렬을 지어갔다. 이 둘은 경찰관의 제지에 응하지 않고 최선두에 서서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 군중과 함께 시위를 하였다. 정막래와 이소선는 징역 6개월의 고초를 겪었다. 재판에서 이소선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여자가 간부(姦夫)가 아니라 본남편((本夫)를 찾아 섬기려 함과 같은 이치이니, 무엇이 죄가 된다는 말이오"라고 하였다.

시위를 준비했던 이학이는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4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의 여독으로 가출옥했으나, 1919년 9월에 부산형무소 부설병원에서 순국하였다.
최천택은 이학이의 죽음을 듣고 그의 시체를 인수했다. 부산형무소 앞에는 우국시민, 학생, 상인 등 500여 명이 모여들었다. 부산경찰서 형사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최천택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조의금을 거둬 발인을 했다. 구호금 모인 돈이 600엔에 달했다. 그는 일경의 집요한 요청을 뿌리치고 청년들과 함께 이학이의 영구를 김해까지 운구해갔다. 김해 청년들이 이를 이어 마산까지 운구하고, 마산지사들이 진동과 배둔까지, 통영 청년들이 배둔에서 통영까지 릴레이 운구를 해왔다. 마치 대마도에서 순국한 최익현의 운구를 나른 것과 같았다. 최천택은 이 거룩한 주검의 행렬을 끝까지 앞장서 인도했다.

8일장을 치르는 동안 통영인들이 울분과 독립의 의지로 들끓었다. 통영지역의 사회장(社會葬) 형식으로 치뤄졌으며, 이 지역 인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장례기간 동안 곳곳에서 군중들이 만세를 불러 죽음 이후에도 민족혼을 일깨웠다. 그의 묘지는 원문 가까운 '몰골이 산' 중턱에 안장돼 있고 '조선 이학이지묘' 묘석이 있고 뒷면의 행적들은 누군가 훼손하여 현재 볼 수 없게 됐다.

또 6개월 형을 받은 허장완은 부산형무소에서 마산형무소로 이감, 모진 고문으로 그해 10월 9일 옥사했다. 허 열사의 시신은 마산청년단들이 배둔까지 운구하고, 배둔 청년들은 고성까지, 고성 청년들은 다시 통영까지 운구하는 등 시체를 옮겨 왔으며 운구를 하는 길목마다 주민들이 일경의 삼엄한 경비 아래에서도 민족혼을 과시했다. 
 

통영 이학이 묘비 묘비의 앞과 달리 뒷면의 그의 행적은 훼손되었다. 허장완의 묘비도 마찬가지다. ⓒ 이병길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울산작가회의, 울산민예총 감사로 활동하고 있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의열단 #박재혁 #오택 #연통제 #최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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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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