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32

오택, 송태관을 처단하려 하다

등록 2021.04.23 10:50수정 2021.04.2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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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의 처단 명단에 송태관이 오르다

미국의원단을 보러 간 오택은 서울(경성)에서 13도 간부회의를 하였다. 그전에 그는 연통제를 각 군에 책임자로 배치하고 조사 보고, 문서 배부 등을 진행하였다. 13도 간부회의는 그동안 조사하며 실지 운동한 체험에서 민중의 약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한 도에 한 사람씩 최악자를 선발하여 총살자를 결의하자는 결의와 동시에 한 사람씩 제출하였다. 오택은 경남 부산진의 송태관을 처단자로 제출하였다.
  

김인태 세계일주무전기행 사진 밀양에서 영남루를 배경으로 좌측부터 김인태, 왕치덕, 오택(가장 오른쪽)이다. 이들은 해방 후 김원봉과 같이 사진을 남겼다. -사진출처 :부산출신독립투사집(1983) ⓒ 부산출신독립투사집(1983)

 
오택이 송태관을 처단 대상으로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송태관이 구(舊) 한국말 이토 히로부미와 고종황제 간의 통역으로 출세하여 내장부향(內藏副鄕-시종원 부원)까지 승진하였다. 양무호(揚武號) 군함 매수 때 구전(口錢-거래수수료) 30만 원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 파면되어 귀향하였다. 그 후 무산자를 착취하여 왜정에 아부하여 자진 권세를 부리다가 기미운동이 봉기하자 공포증이 나서 항상 은신하여 자기 집에 즉시 특설 전화를 설치하였다. 당시 부산진은 우체국 이외에는 전화가 없었다. 매일 전화로 부산경찰서에 부산진 동태를 보고하는 동시에 신변 보호를 청하여 순사가 간혹 그의 집에 투숙하기도 했다.

오택이 송태관을 사형 처단토록 추천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친일 반동에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천륜과 인류에 위배됨이 비일비재하였고 무산자 착취가 극심하여 언양 소작인에게 철편을 맞아 반죽음(半死) 당한 자이기에 지정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처단은 13도 간부가 아닌 별동대에게 일임하였다. 13도 간부회의는 전연 집행에는 관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피차 면식도 없게 하였다. 이는 조직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별동대는 만주의 협객(俠客)을 불러오기로 하였다.

그런데 오택이 처단자로 추천한 송태관은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이었을까? 그는 양무호 매입 과정에서 구문을 받아 관직에서 쫓겨났을까? 과연 친일 부왜인이고 무산자를 착취한 자본가였을까?

친일 민족자본가의 삶, 어땠을까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양등마을 출신인 송태관(宋台觀, 1874~1941)은 부친이 11살 때 사망하여, 조모인 평산 신씨가 어린 손자를 업고 선대 묘를 돌보며 키웠다고 한다. 그는 1895년 설립된 부산의 개성학교를 1898년 3월 2회 졸업하고, 1898년 학교 전액 장학금으로 동경상업고등학교에 유학을 갔다. 당시 울산의 김홍조는 1900년부터 1907년까지 동경에서 박영효와 같이 지내고 있었다. 당시 김홍조가 지원한 울산 유학생 중의 한 명이 송태관일 가능성이 있다. 유학생들은 박영효 등 갑신정변으로 망명한 개화파 인사들과도 교류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송태관은 1905년 3월에 재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인 탁지부 주사로 관료 생활을 시작한다.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의 추천이었다. 메가타는 일본인 최초로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인물로 대한제국 탁지부 고문으로 재정 및 경제적 합방을 주도한 인물이다. 송태관은 1906년 4월 토목건축주식회사(자본총액 25만 환, 발행주식 5천 주, 1주 액면가 50원)를 설립하였다. 당시 관료는 사적인 경제활동도 같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태관은 탁지부의 토지조사 사업에서 토목건축 사업으로 이권을 챙겼을 것이다.


송태관이 양무호 거래로 30만 원을 착복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1903년 4월 대한제국이 양무호를 도입한 가격이 총 55만 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쓰이 물산은 1894년 영국으로부터 25만 엔에 사들여 9년 동안 사용했었던 강철 증기 화물선을 200명 이상의 병사가 숙식할 순양함 또는 훈련함으로 개조하였다. 배는 장교를 위한 서양식 침구와 서양 요리기구를 구비하고, 사병 200명의 숙식을 위한 설비 그리고 대구경과 소구경 포 각 4문 등 무기를 설치하였다.

또 군함을 운항할 해군을 양성할 교관단까지 구성하여 인도하였으나 대한제국은 배를 인수하고도 3개월 뒤에 20만 원을 주고 잔액은 2년 동안 나눠 냈다. 이런 와중에 30만 원을 송태관이 중개 수수료를 받았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 송태관은 그런 일을 할 시기나 위치에 있지 않았다. 양무호는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이었지만 도입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일제는 양무호를 강제로 뺏어가다시피 빼앗아 러일전쟁에 징발하었다. 자주 해군의 길은 첫 단추부터 시련 그 자체였다.

송태관은 1906년 1월 육군유년학교 교관에, 3월에 군부 번역관(軍部飜繹官)에 임용된다. 5월에는 궁내부 산하의 시종원 시종 주임관 4등에, 11월에는 종2품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명되고, 칙임관 3등에 서임된다. 궁내부는 고종 시절 조선의 근대화를 총괄했던 곳이다. 송태관은 특사를 수행하여 일본에 가고, 일본에서 온 대신을 영접하였다. 일본어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통역을 한 사람 중에 이토 히로부미도 있었다. 시종원 부경이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 차장의 지위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택은 이런 일로 인해 송태관을 이토의 통역관으로 오해한 듯하다.

현재 울산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인 친일 매국노 송태관'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당시 일본의 공식적인 통역관은 고쿠부 쇼타로[國分象太郞]였다. 그는 박영효가 태극기를 만들어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어학생도(語學生徒)로 영접한 일본인이다. 1894년부터 조선에 건너와 일본공사관 통역관과 비서관을, 1905년 이후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해 통감부 비서관을, 1910년 한일합방 시에는 조선총독부 인사국장, 중추원 서기관장을 맡았다.

1907년 7월 20일 고종황제가 헤이그 밀사 사건 등으로 일본의 압박을 받아 순종에게 왕위를 양위하는 일이 발생했다. 7월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으나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아 식을 거행할 수가 없었다. 양위식을 거부하고 황태자 대리예식에 불참한 박영효와 시종원 관료는 유배형에 처했다. 박영효는 제주도로, 송태관은 진도로 유배당했다. 오택이 말한 양무호 때문에 송태관이 파직당한 것은 아니다. 송태관은 2년 5개월의 짧은 관료 생활은 이렇게 끝났다. 송태관은 시종원 부경으로 대한제국에서는 '훈 4등 태극장'을, 일본 황실에서는 '훈 3등 욱일장'을 받았다.

울산사람 송태관은 1909년 이후 부산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하였다. 1909년 구포저축주식회사 설립 주주로 참여한 후, 구포은행과 경남은행의 주주로 활동하며 1921년 8월 은행장(두취)에까지 오른다. 1919년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이 상해임정 재무차장을 지낸 윤현진이었다.

그런데 1910년대 그의 삶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1913년 9월 울산 언양에서 괴한의 습격으로 머리에 철봉을 난타당해 얼굴과 후두부가 파열되고 전신이 중상을 당해 생명이 위급하였다. 1915년 7월에는 울산 하상면 반구리 그의 집에 7인조 강도가 들이닥친 적도 있었다. 게다가 1915년 9월에는 사기, 무고, 횡령, 절도 등으로 3명에게 고발을 당하여 망신을 톡톡히 산 적이 있었다. 구속을 당하고 재판을 받은 그는 횡령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일본인 변호사는 동경에서 부산으로 와서 변호할 정도로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었다. 그는 재산이 수십만 원이요, 전답이 수십 정보에 달하는 부자였다.

1911년 매일신보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 중 재산총액이 50만 원 넘는 사람이 32명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니 그의 부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울산 언양에서 수확한 곡식을 가마니로 한 줄 세우면 서울(경성)까지 이어진다고 촌로들은 말하기도 했을 정도로 부자였다. 아무튼 이 사건들로 송태관의 이미지는 대단히 부정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오택은 송태관을 처단할 친일분자로 무산자를 억압하는 자본가로 본 것이다.

1910년대의 일련의 사건으로 송태관은 치안이 유지되는 부산에서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을 하였다. 1919년 이후 서울사(주)・송태정미소・조선제과(주)・동아신탁(주)・조선주조(주)・부산자동차(주)・삼산자동차(주)・부산신탄(주)・부산일보사(주)・(주)일본상업통신사 등을 설립하거나 투자하였다. 송태관은 1910년 전후로 대지주로 살아왔다면, 1919년부터 1920년까지는 집중적으로 회사를 설립하거나 투자하여 왕성한 경제활동을 벌였다. 이 사업 중에 울산의 김홍조와 경남은행, 삼산자동차, 조선제과는 같이 동업하였다.

송태관의 육영사업

1910년대 이후 사업을 하는 사람은 친일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경제적 친일이 정치적 친일과 연관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송태관은 경제활동 이외에 육영사업에도 관계했다. 1910년 2월 최해규가 설립한 언양의숙의 재정이 어렵게 되자 송태관은 현금 80원과 지필(紙筆) 4, 5원 가치를 기부하고 직접 찾아가 격려했다. 1911년 9월 공립울산보통학교의 학무위원이 되었다. 또 그는 부산상업학교 상의원으로 김홍조, 박영효 등과 같이 활동했다.
  

울산의 부호 송태관 대한제국의 시종원 부경과 경남은행 은행장을 지낸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자본가였다. 그의 아들이 민속학자 송석하이다. ⓒ 자료사진/재인용

 
1919년 11월 송태관은 임기 2년의 기미육영회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3・1 운동 주역인 청년세대에게 민족 독립과 민족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외국 유학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육영단체 설립에 동참한 것이다. 백산상회 임원을 중심으로 부산에서 활동하던 자본가들이었다. 부르주아 문화운동 조직이었다. 간사는 상해 임정에 군자금을 많이 조달한 백산상회 안희제, 상해 임정 초대 재무차장 윤현진의 형인 윤현태, 조선어사전 편찬에 관계했던 윤병호, 임정 군자금 송금에 이바지한 최태욱 등이었다. 송태관은 5년 동안 매년 100원 이상 부담하는 임기 2년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부산의 민족 자본가들은 1919년 12월 '예월회'를 조직하였다. 회원으로 양산의 김철수(부산상사, 고려상회 지배인, 동경 2・8 독립선언)・전석준(무역상, 일금상회)・윤현태(백산무역주식회사 중역, 일금상회 주임, 윤현진의 형), 울산의 송태관(경남은행장, 삼산자동차 중역), 부산의 김병규(동래은행 지배인)・김종범(조선주조 중역)・문영빈(백산회사 감사, 동성상회 중역)・장우석(구포은행, 구명학교 설립) 그리고 경주의 최준(백산회사 대표)과 최순 등이 있었다. 3・1운동 후 일제의 문화정치에 따라 교육제도의 개편이 논의되었다. 예월회는 조선교육 개선에 관한 건의서를 1921년 5월 제출하였는데 발기인은 송태관, 안희제, 전석준, 송진우, 현상윤 등이었다. 또 산업개선 청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6월 '일선동화 및 차별교육 정책 철폐, 식량・원료・노동력 공급기지화, 상품 판매 시장화' 등 식민정책 폐기를 요구하였다.

1921년에는 부산상업학교가 부산 서면으로 이전할 때 24,550원을, 경주의 최준과 울산의 김홍조는 1,500원을, 안희제와 윤현태는 1천 원을 기부하였다. 송태관의 기부금은 총 기부액 33,550원의 70%가 넘는 금액이었다. 자기를 일본 유학을 보낸 모교에 보답한 것이자, 아들인 송석하의 모교였기 때문이리라. 훗날 조선의 민속학자가 된 송석하는 1920년 9회로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송태관의 인생에 대한 오택의 정보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일부 부정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절에 송태관은 친일 부왜인으로 소작인을 억압한 부르주아였다. 그의 시절에 송태관은 부정적 자본가로 인식되었다. 송태관은 그 후 부산부 도평의원, 부산부협의회 의원, 부산부 학교위원 등을 지냈다. 송태관의 삶에 친일의 그림자는 적다. 하지만 그의 경제적 활동에 친일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을 수 없다. 그 그림자 속에 항일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백산상회와 경남은행은 상해 임정의 독립 군자금의 젖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동청년단원, 백산상회 무한책임사원, 상해 임정의 임시의정원 의원이자 재무부 위원이었던 최완은 경상북도 경주 부호 최준의 남동생으로 상해로 갔을 때 "현금 2만엔"을 소지하고 있었다. 조선의 자본가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구영필과 독립전보 사건

오택이 13도 간부회의에서 결정한 송태관 처단과 관련한 사건이 1920년 12월 발생했다. 사건의 주모자는 일합사 출신으로 의열단원인 구영필이었다. 그는 1920년 8월의 밀양폭탄사건과 진영사건 전후로 밀양에 있으면서 송태관 처단과 관련한 소위 '독립전보 사건'을 일으켰다.

1920년 12월 1일에 정치변혁을 일으키기 위하여 불온문서를 등사판에 인쇄하여 우편으로 부산 부평정(富平町) 부근에 있는 우체통에 넣어서 초량과 영주동 방면에 있는 상점에 배포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부산경찰서에서 탐지하고 즉시 활동을 개시하여 1년을 두고 수색하였다. 1921년 12월 1일 부산 영주동의 김용술(金用述, 25세)을 체포하고, 초량동의 김재현(金在鉉)(44)을 8일에 검거하여 취조한 후 즉시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하고, 12월 21일에 예심을 마치고 기소하였다.

김용술과 김재현의 자백에 따르면, 구영필의 처남인 김용술은 구영필이 경영하는 봉천(奉天) 삼광상회(三光商會)의 점원으로 있었고, 김재현은 청어장사로 그 상점에 자주 드나들었다. 구영필은 대한독립군정서 남선정찰부장(大韓獨立軍政署 南鮮偵察部長)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1920년 8월에 자기 고향인 밀양에 돌아와서 그해 11월까지 머물렀다. 대한독립군정서는 1919년 2월 황상규, 조소앙, 김좌진 등이 결성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部)가 무장독립운동을 추진하며 조직한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 길림군정사)인 듯하다.

군정사를 조직한 황상규는 재무국 회계과장을, 구영필은 군무국 군수과장(軍需科長)으로 교통사장(交通司長)을 겸임하였다. 10월 대종교는 중광단(重光團)을 확대 개편한 대한정의단 산하의 무장단체인 대한독립군정회를 설립하였다. 10월 군정사와 군정회가 연계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가 성립하였다. 12월 임시정부는 군정부를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이 시점에 의열단이 성립되었다. 임시정부와 연계되어 있던 구영필은 대한군정서의 남선정찰부장으로 군자금 모금 등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구영필은 1920년 11월 10일에 대한민국 2월 10일 대한독립군정서 민군총사령관 박용만(大韓獨立軍政署 民軍總司令官 朴容萬)이 성명을 한 "경고어재내동포(警告於在內同胞)"라는 경고서 한 벌과 <독립전보(獨立戰報)>라고 제목한 문서 세 벌을 밀양에서 김재현에게 보이고 그것을 등사하여 조선의 독립운동을 선동하여 인심을 소란케 하고자 비밀히 계획하였다.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은 1904년 구한말 풍운 속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하던 중 1910년 나라를 잃게 되니,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하며, 여러 가지로 독립운동에 몸 바쳐 오다 1928년 10월 17일 48세의 나이로 북경에서 피살되었다.
  

구영필 피살사건 보도 구영필은 밀양출신으로 일합사, 광복회를 조직하고 상해임정의 의정원 의원, 의열단, 길림군정서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신민부와의 갈등으로 피살되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밀정과 독립운동가로 엇갈린다. 출처 : 동아일보(1926.10.18.) ⓒ 동아일보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은 일본 유학 중 망명 중인 박영효를 만났고 1900년 활빈당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그 후 일본의 황무지 개발권 요구에 반대하다 투옥 중 이승만을 만나 의형제 결의를 하였다. 미국에 유학하고 1909년 무장투쟁을 위한 '한일소년병학교'를 설립하였다.

1914년 6월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군단은 해체되고, 의형제인 이승만의 노선 차이, 음해공작, 법정 다툼 등으로 박용만의 하와이 국민회는 이승만의 수중에 들어갔다. 1917년 김규식, 조소앙과 함께한 '대동단결선언'은 임정 수립의 계기가 되었고, 1919년 그는 한성임시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총장(外務總長)에 피선되었지만, 이승만과의 노선 차이로 부임하지 않고, 중국의 간도·길림지방의 독립군들과 더불어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조직하고 총참모로 취임하였다.

또한 1920년 봄 대동단(大同團) 총부(總部) 무정부장(武政部長)으로 임명되었다.그는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군사운동을 주장하며 독립군을 키워서 일본을 축출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무장투쟁론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상해 임정과 대립적이었던 박용만은 1928년 10월 17일 의열단원 이해명이 박용만을 친일파로 몰아 암살을 하였다. 하지만 박용만이 일제에 협력했다는 증거는 전혀 발견된 바 없고 심지어 일본은 끝까지 박용만을 '배일선인(排日鮮人)의 영수', '불량선인'으로 지정해 탄압했다. 역사에는 억울한 죽음도 많이 있다. 신민부와의 갈등으로 암살당한 구영필의 죽음도 그러할 수 있다.

김재현은 등사 원지(原紙)에 문서를 기록하고, 구영필은 등사판을 사용하여 경고서(警告書)와 <독립전보(獨立戰報)> 약 100장을 등사하였다. 11월 30일에 김재현을 밀양으로 오라고 하여 등사 인쇄물을 주어 부산으로 가져가게 하였다. 이튿날인 12월 1일 오전 8시에 구영필은 김용술의 집에 가서 인쇄물을 각각 봉투에 넣었다. 구영필은 김재현이 부산 송태관(宋台觀)과 오인규(吳仁圭, 1871~1937, 국채보상운동 참여・북선창고 이사・부산제2금융조합 사장), 밀양의 손영돈(孫永敦, 1887~1954, 밀양 갑부・구포은행과 경남은행 대주주・1922년 군축회의<태평양회의> 한국청원서 서명)과 진성일(陳盛一, 밀양 부호), 금천의 진교옥(陳敎玉), 대구의 서병주(徐丙周, 1885~1956, 대구 대지주・총독부 중추원 참의), 동래의 김명익(金明益) 등 각 유력자와 부산공립상업학교 등 모두 열다섯 곳으로 가는 봉투를 쓰게 하였다. 인쇄물이 든 봉투를 부산 부평동 부근에 있는 우체통에 넣고 나머지 85장은 12월 20일 밤에 김용술이 부산부내 본정 초량동과 영주동 등지의 각 상점에 배포케 하였다.

김용술과 김재현은 체포되었지만, 구영필은 중국으로 이미 도주한 뒤였다. 왜경은 대정 8년 제령 제7호와 출판법 위반범으로 두 명을 기소하였다. 1922년 2월 김용술은 징역 8개월, 김재현은 징역 1년 6개월, 구영필은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당시 독립운동의 전형적인 방식 중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 즉 유력자에 대한 경고문 발송이나 전단 살포의 형태이다.

정공단 거리의 사람이었던 송태관

독립전보 사건과 연관하여 오택은 부산경찰서 고등계에 불려가 편지 봉투를 내어놓고 "부산진 좌천동 송태관"이라는 습자 시험을 치렀다. 송태관에 보내진 협박서의 편지 봉투 필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당시 처단할 대상에게 보낸 편지는 지역 부호와 유지에게 우편으로 발송하되 각 도(道), 각 부(府)에서 하였기 때문에 오택이 범인으로 지목될 수 있었다. 오택은 자신을 송태관이 지목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송태관도 정공단 거리의 사람이었다. 송태관의 집은 581-1번지였고, 김인태의 집은 좌천동 581-2번지였다. 지금의 부산 동구 좌천삼거리에서 수정터널로 가는 고가도로 밑이다. 송태관은 이 집을 1916년 12월 17일 매입하여 1929년 9월에 매도하였다. 김인태의 가족은 좌천동에 1890년 이전부터 살다가 초량동으로 1927년 이후에 이사한 듯하다. 가끔 오택은 친구 김인태의 집을 드나들면서 옆집인 송태관을 자주 보았을 것이다.
  

대조선국민군단 1914년 6월 10일, 미국 하와이 오아후(Oahu)섬 아후이마누(Ahuimanu)농장에서 독립군 사관 양성을 목적으로 박용만(朴容萬)이 주도하여 만들어진 군사 교육 단체였다. ⓒ 자료사진

 
송태관 역시 좌천동에서 한약방을 했던 오택 집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서로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택은 당시 보도를 통해 접한 송태관을 친일 부왜인으로 여겼던 것은 분명하다. 역사에서 진실을 찾기 쉬운 일은 아니다. 당대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정보로 판단을 내리지만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정보는 때론 사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민족해방투쟁에서 독립투사가 밀정 혐의로 죽은 경우가 있다. 이름 없이 죽은 사람은 더 많았을 것이다.

송태관은 1920년대 이후의 경제적 활동무대는 충남 서산군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하였다. 그 결과 많은 농민이 농사지을 땅을 확보하고 그는 부를 또한 얻었다. 그는 1940년 4월 25일 중풍으로 사망했다. 송태관의 부를 통해 아들 석남 송석하(石南 宋錫夏, 1904~1948)는 조선 민속학을 연구할 수 있었다.

송석하는 주로 공연 민속을 연구하였다. 농촌 오락, 즉 공연 민속의 현대화 방안으로 난장의 폐지, 대동놀이 위주의 공연 활성화, 예술적 오락과 체육적 오락의 존속, 사행적 오락의 폐지, 기업가들의 후원 등을 주장하였다. 사진을 이용한 현지조사(field work) 방법과 사진 자료관리를 하였다.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카메라를 이용해 사라져가는 민속을 사진으로 담아냈고, 민속 사진을 수집하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사진 자료수집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체계적으로 분류·관리하였다. 그래서 그를 한국 최초의 영상 민속학자, 한국 최초의 아키비스트(archivist, 기록관리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석남사가 가까이 있는 고향을 사랑했기에 호가 석남(石南)이었다.

* 작가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부산경찰서 투탄 #의열단원 #박재혁 #구영필 #송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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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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