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공단 친구들, 거사를 모의하다

[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34

등록 2021.04.30 16:13수정 2021.04.3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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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공단 친구들과 거사를 모의하다

박재혁은 김영주, 최천택과 함께 동래 온천으로 갔다. 거사를 앞두고 마음을 모질게 다짐해야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투탄 거사자로 지목된 것이다. 폭탄은 심지에 불을 붙이거나 안전핀을 뽑거나 한 후에 상대방을 향해 던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시간적 여유가 문제였다. 언제 불을 붙일 것인가 혹은 언제 핀을 뽑을 것인가? 사람의 얼굴에 던질 것인가? 빈 곳을 향해 던질 것인가? 친구들도 폭탄을 다루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혈기 왕성함을 가진 열혈 청년이었을 뿐이었다. 온천장에서 세 명의 친구들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혁아. 걱정되지. 근데 뒷일은 우리에게 맡겨놓고 걱정하지 마라."

김영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쉽지 않은 말이다. 거사가 끝난 뒤 가장 걱정거리는 남겨진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천택이도 거들었다.

"그래, 재혁아, 걱정하지 마라. 명진이가 졸업할 때까지 학비는 내가 댈 거니까. 걱정말거라!"
 

박명진 학적부 박재혁의 여동생 박명진의 동래여고(2회) 학적부에 보호자(보증인)로 최천택으로 기록되어있다. 최천택은 박재혁 순국 이후 그의 모친과 동생을 도와주었다.- 자료제공 : 이손녀 김경은 ⓒ 김경은

 
박명진의 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학적부를 보면, 최천택은 보증인으로 숙부, 직업은 상업종사자로 기록되어 있다. 박명진은 1923년 부산진일신여학교를 입학하여 동래 일신여학교를 1927년 3월 22일 2회 졸업하였다. 1925년 6월 10일 일신여학교는 부산진에서 동래 복천동으로 이전하였고 박명진과 모친은 복천동 188번지로 이사를 하였다.

1925년 박재혁의 친구 김영주의 여동생 김남정(1905년생)이 복천동 188번지에 사는 조근호와 결혼을 한다. 김남정은 박명진을 동생같이 생각했었기에 김영주와 같이 재혁의 가족을 돌보기 위해 복천동을 여러 번 방문 하다가 조근호와 인연이 닿은 것은 아닐까? 세상일은 참 우연이 많다. 친구의 동생 집이 사돈의 집이 되는 인연은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우연적인 필연이 있었다. 박재혁은 두 친구가 가족을 돌보아준다는 말에 다소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박형!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김영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천택도 다소 우려 섞인 목소리로.

"그래, 아무래도 서울(경성)은 거사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 자네가 서울 지리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또 서울에서 도와줄 동지도 지금은 없잖아!"

박재혁은 일전에 만났던 김기득이 체포를 당하지 않았다면 그와 함께 거사를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런 도움 없이 조선총독부에 투탄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김원봉과 약속했던 부산경찰서에 투탄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은 미국의원단이 지나간 뒤라 경계도 풀린 뒤였다. 밀양폭탄사건으로 거사를 도모했던 의열단이 전부 체포되었기에 부산의 심장부인 경찰서에 감히 투탄하리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부산은 일본의 안방 같은 곳이라 투탄 거사가 일어나지 않으리라 안심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문제는 고서적상을 가장하고 갈 것인가? 폭탄을 어떻게 가지고 들어갈 것인가? 의열단의 행위임을 알 수 있게 선전 유인물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등등의 문제가 남았다. 이런저런 생각과 논의는 쉽게 하루 이틀 동안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재혁의 몸 상태도 긍정적이지 않았다. 오택이 준 돈은 정양하면서 거사를 도모하라는 것이었다. 기침과 가래가 자주 나왔다. 모친에게는 범어사에 가서 약수나 먹고 복약이나 하겠다고 하고 나섰던 재혁이었다. 오택은 아마 자신이 상경하여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는 것으로 알고 경비 마련에 분주하리라 생각했다.

박재혁이 온천장 등지를 전전하며 친구들과 거사 계획을 짜고 있을 때, 오택은 국내 투쟁에 희생하기로 하였다. 오택은 박재혁의 총독부 투탄 계획에 따라 박재혁을 만난 이후부터 국문(國文)과 일문(日文) 신문을 구독하여 요인왕래와 총독 동정을 조사하였다.

사나흘 후 부산경찰서 고등계 일본 형사 사가이(坂井)가 찾아와 여러 가지 근황을 수소문하다가 박재혁의 입국 이유와 경로를 질문하였다. 오택이 "박형이 입국하였으면 부산에 왔는가?" 하고 모른 척 반문하자, 형사는 평소 오택의 인격을 존중하였는데 정직한 회답이 아니라면 화를 내고 돌아갔다.

박재혁과 헤어진 뒤 오택은 박재혁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오택은 동래경찰서와 부산경찰서가 서로 연락하며 내탐 중이라고 생각하고 온천장의 여관 서너 곳으로 전화를 하니 박재혁은 최천택, 김영주 등과 해운대 온천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오택이 박재혁의 집에 가니 모친이 "범어사에서 약수나 먹고 복약이나 하여 보겠다" 하고 나갔다고 했다. 즉시 범어사로 사람을 보내었으나 박재혁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도대체 박재혁과 친구들은 어디로 잠적했을까?

악몽을 꾸다

박재혁이 중국인 옷을 입고 고서를 넣은 봇짐을 짊어지고 부산경찰서로 들어갔다. 형색을 보면 영락없이 중국인이었다. 경비는 엄격하지 않았다. 박재혁은 경비원에게 하시모토(橋本秀平) 서장에게 면회를 요청하며, 서장에게 고서적을 팔러왔다고 하였다. 고서에 관심이 많은 하시모토는 쾌히 면회를 승낙하였다. 경비도 서장에게 평소 고서적상들이 왔기에 의심하지 않고 들어가게 하였다. 내심 속으로 박재혁은 진땀을 흘렸다. 초가을 날씨지만 더웠다.

박재혁은 하시모토를 처단할 때 어떤 말을 할까 되뇌었다.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들을 붙잡아 모진 형벌을 가했으니 용서할 수 없다."
"네가 우리 동지들을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려 한다."


영화 대사처럼 몇 번이나 외웠던 말이지만 쉽게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긴장되었기 때문이다.

박재혁은 하시모토와 서장실에서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두 사람 이외는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박재혁은 작은 탁자를 하나를 격하여 서장과 마주 앉은 그는 몇 마디 한가로운 수작이 있은 다음 진기한 고서를 구경시켜주겠다고 하고 마침내 봇짐을 풀었다. 박재혁은 중국말투의 일본말로 중국 고서를 소개하며 봇짐에서 고서를 꺼내었다.

하시모토는 어떤 책이 나올까 봐 궁금증을 가지며 쳐다보았다. 고서들이 한 권 두 권 나왔다. 그때마다 하시모토는 감탄하며 좋아했다. 자기가 이제까지 구하지 못한 책이었다. 고서는 모름지기 오래된 것일수록 가치가 높기 때문이었다. 책을 넘기자 묵은 세월의 냄새가 났다. 하시모토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봇짐 가운데에 숨겨두었던 전단과 폭탄이 있었다. 박재혁은 먼저 전단을 뿌려야 할까, 아니면 폭탄을 먼저 터트릴까 잠시 망설였다.

박재혁은 먼저 전단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호통치듯이 말을 했다.

"나는 상해 임정에서 온 의열단원 박재혁이다. 너희 왜놈 침략자들 때문에 조선의 많은 백성이 고초를 얼마나 겪었는가를 이미 알 것이다."

하시모토는 놀란 토끼 눈을 박재혁을 쳐다보았다. 그때 폭탄을 꺼내 들었다. 폭탄은 심지를 붙여야 하는 도화선식 폭탄이었다. 폭탄에 불을 붙이면서 박재혁은 하시모토에게 다시 말을 했다.

"하시모토! 너는 일본 침략자들을 대신하여 속죄하는 마음으로 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지 말고 너희 침략자 무리를 미워하시오."

하시모토는 갑작스러운 박재혁의 행동에 당황했고, 손에 든 폭탄을 보고 "어~! 어~!"만 연발하고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도화선에 불을 붙일 성냥에 불이 켜지지 않았다. 성냥이 불량인 듯하였다. 박재혁은 당황하였다.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오고 손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럴수록 성냥은 불이 붙지 않았다. 성냥을 긋고 말을 하고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려니 쉽지 않았다. 하시모토는 갑자기 책상 아래로 숨으며 엎드렸다. 성냥에 불이 켜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치지직~" 하며 도화선이 타들어 갔다. 연기가 함께 났다. 박재혁도 깜짝 놀랐다. 자기 자신도 폭탄에 불을 붙인다는 것은 알았지만 언제 던져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박재혁은 의열단원이었지만 폭탄 사용법을 숙지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 그는 폭탄 던지는 법이 아주 서툴러서 폭탄에 불을 달아 놓고 도화선에 불이 붙기를 기다리다가 불을 달아 놓고 불이 급히 달려지기를 기다리다가 불이 달리자마자 폭발되었다. 결국 엉겁결에 놀라 폭탄을 던졌다기보다 놓친 것이었다. 아니 폭탄은 겨우 3척(1미터) 정도 던졌을까? 폭탄은 탁자에 숨은 하시모토에게 간 것이 아니었다.

"쾅!" 하며 폭탄이 터졌다. 전단이 하늘을 날고 서장실은 먼지로 자욱했다. 폭탄 파편은 박재혁에게 날아들었다.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박재혁이 꿈에서 깨어났다. 옆에서 자던 최천택과 김영주도 깜짝 놀라 잠에서 깨었다. 재혁의 꿈은 악몽이었다. 땀범벅이었다. 거사를 앞두고 불길한 징조 같았다. 재혁의 꿈 이야기를 들은 두 친구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박재혁이 중국 고서적 상인을 가장하여 부산경찰서로 갔다고 김원봉은 증언하였다. 중국에서 김원봉과 논의할 때 중국 고서적상으로 위장하여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해방 후 김원봉의 증언에 따라 기술한 박태원의 책 <약산과 의열단>에 "진기한 고서" "전단"이란 문구가 있다. 하지만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관련한 당시의 신문과 법원, 경찰 기록에는 고서적상이나 전단 관련 사실이 없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한국 신문에는 도화선식 폭탄인 듯한 표현을 하였지만, 일본 신문에는 명확하게 안전핀식 폭탄이라고 보도하였다. 당시 부산경찰서 안에서 이루어진 상황은 도화선식보다 안전핀식 폭탄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리고 대부분의 의거는 도화선식보다 안전핀식 폭탄이었다. 3대 조선 총독 사이코 마코토(齋藤實)에게 강우규가 사용한 폭탄은 영국제 밀스봄 수류탄이었다. 현대 수류탄의 원형으로 안전핀을 빼면 4~5초 이내에 폭발하며 반경 5m 이내에 있는 사람은 즉사에 이를 수 있고 주변인들은 중상을 피할 수 없고, 파편은 폭발 순간 100m까지 날아갈 수 있는 살상력을 가진 폭탄이었다.

박재혁의 경성복심재판문에 따르면, 박재혁이 "14일 자택에서 폭탄을 터뜨리는데 필요한 장전(裝塡)을 시행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탄피와 화약이 분리된 것으로 박재혁이 폭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면 도화선식 폭탄일 가능성도 있다. <기려수필(騎驢隨筆)>의 '박재혁' 편에는 "뇌관(雷管)에 불을 붙여 던졌"다고 하였다. 밀양폭탄사건에서 압수된 재료를 합하여 폭렬탄을 만들어 실험한 적이 있다. 합성된 폭약을 탄피에 진충(塡充)하여 도화선에 의해 점화, 폭발하도록 만들었다.

"그 위력을 실험하였더니 (1) 단편(斷片)은 30m 권내(圈內)에서 사람과 가축에 대한 살상효력이 충분하다. (2) 단편은 150m 부근에서도 사람과 가축에 대한 상해 능력이 있다. (3) 단편은 6개 중 2m의 거리에 세운 두께 1촌(寸)의 송판을 관통할 수 있는 것이 1개이며, 기타는 전부 심도 약 3분에서 8분으로 구멍이 나는 것에 그쳐 파괴하지는 못하므로, 목조 구축물에 대해서는 이를 근접시켜 폭발시킬 경우 외에는 파괴적 효력이 미약하다. 그러나 일본 가옥에 대해서는 때로는 불태우는 효력을 야기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만약 박재혁이 도화선식 폭탄을 만들어 사용했다면 그의 집이나 친구들 집에서 관련 탄피, 약품, 폭탄 부속품 등이 발견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완제품이었다면 폭탄의 위력이 부산경찰서 투탄의 결과를 볼 때 파괴력이 유사한 (3)에 해당했다. 김원봉은 1차 의거 준비과정에서 만든 폭탄 위력이 미흡하여 헝가리인 마쟈르를 통해 폭탄을 제조하게 되었다.

거사 계획을 다시 짜다
  

1920년대 부산 범어사 원효암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알려져있으며 범어사 소속으로 금정산 금샘 아래쪽에 있다. 1906년 선원이 개설된 이후 참선 수행의 도량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범어사의 조실(祖室) 승려 지유도 이곳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을 하였다. 출저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다음날 아침 세 명의 친구는 범어사 뒷산 금정산에 있는 원효암으로 올라갔다. 범어사는 통도사, 해인사와 함께 영남 3대 사찰로 알려져 있다. 신라 문무왕 18년(678)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금빛나는 오색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금샘의 전설이 깃든 금정산(金井山) 기슭에 세워졌다. 범어(梵魚)는 깨끗한 물고기란 뜻이다.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고 정진 수행하는 스님의 상징이다. 범(梵)은 불경을 기록한 언어이니 불경을 수행하는 사찰이 곧 범어사(梵魚寺)가 된다.

산길을 걷는다는 것, 사찰을 걷는다는 것은 비움이다. 오로지 한가지 생각, 화두(話頭)만 가지고 오르는 길이다. 헛된 망상과 욕심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길때마다 버리면 결국에는 하나의 얻음이 있게 된다. 재혁은 거사만 생각했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이다. 간밤의 흉몽은 오히려 길몽으로 여겨졌다. 거사가 실패할 수 있고 자신이 다칠 수 있음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꿈은 생생하였다. 성찰의 길은 짧았다.

원효암은 원효대사가 창건한 암자로 작았다. 작은 삼층 석탑이 아담하게 있었다.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원효석대(元曉石臺)는 뽀족한 바위들이 삐죽삐죽 있었다. 바위에 오르니 멀리 금정산이 눈 앞에 있다. 저 멀리는 원효대사가 천명을 깨달음에 이르게 했다는 양산의 천성산이 보인다. 산을 내려오면서 세 친구는 다시 거사 계획을 생각한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재혁이었다.

"만약에, 내가 잡히면 절대 모른다고 해야 한다. 형사들이 알고 있는 것만 답하고 나머지는 모른다고 해야 한다. 이 거사는 나 혼자 하는 거다."

다짐하듯 재혁은 두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들이 다치지 않아야하기 때문이다. 거사가 끝난 후에 분명히 체포될 것이고 형사들의 취조는 고문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모른다는 것만이 친구들이 무사할 것이다. 최천택과 김영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착찹했다.

"어젯밤 꿈이 거사 계획을 수정하라는 것 같았어."
"야, 그것 개꿈이다. 신경쓰지마라, 잘 될 것다."


영주가 괜한 것에 관심을 둔다며 위로했다. 그런데 최천택은 다르게 반응했다.

"그래, 폭탄을 던지는 것과 전단을 던지는 것을 한 사람이 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맞네, 전단을 던지는 사람과 폭탄을 던지는 사람으로 역할을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총각인 천택이 니가 전단을 던지라!"


영주가 농담처럼 천택이 보고 거사에 동참하라고 했다.

"아니다. 이번 거사는 혼자해야 한다. 괜히 천택이까지 하면 정공단 친구들 모두 다칠 수 있다. 전단 살포는 없는 것으로 하면 된다. 그리고, 중국 고적상 그것도 좀 어울리지 않는다. 당당하게 거사를 하고 싶다."

재혁이가 중국인으로 위장하는 것을 거북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중국에서 생활도 했기에 복장이나 언어에 이상한 점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한국 사람이 중국인 행세를 하며 거사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러면, 고서적상 흉내도 내지 말거라. 조선사람이 조선 옷 입고 당당하게 하는 것이 좋지."
"맞다."


천택이도 영주 말에 맞장구를 쳤다. 실상 중국 고서적상을 위장하며 봇짐이나 책 괘짝을 들고 들어가는 것도 짐스러웠다. 단출하게 해야 폭탄을 던지고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단을 살포하기 위해서는 전단을 제작해야 하는데 당장 등사기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구하려면 구할 수 있지만 체포될 경우를 생각한다면 또 다른 친구들이 연루되기에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다. 거사는 영화처럼 멋진 것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하는 행동이었다. 이제 처음 계획했던 모든 것이 수정되었다. 가장 단순하게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재혁아, 너 하시모토 서장 얼굴은 아나?"

갑자기 영주가 뜬금없이 물었다. 하시모토 그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박재혁은 '동국역사 배포 사건'과 '구세단 사건'으로 부산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기에 얼굴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 서장은 1864년생으로 미야기현 시다군 카와쵸(宮城縣 志田郡 古川町) 출신이다. 1890년 10월 미야기현(宮城縣) 경부(警部)로 임명되어 1906년까지 근속하였다. 1906년 12월 한국통감부 경부로서 조선으로 건너왔다. 1908년 충청북도관찰도 청주경찰서 경시(警視), 1909년 11월 함경남도 원산경찰서장 경시, 1910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회계계 경시, 1911년부터 1917년까지 부산경찰서 경시로 있었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는 창덕궁경찰서 경시로 있다가 1920년에 다시 부산경찰서 서장으로 부임했다. 한일강제벼압이후 하시모토 서장은 한국에서의 경찰 생활 대부분을 부산에서 지냈다. 그러기에 박재혁이 동국역사 배포 사건과 구세단 사건으로 부산경찰서에 잡혀갔을 때 하시모토와 대면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박재혁은 하시모토 서장에 대해 안면이 있었다고 경찰과 <기려수필>은 기록하고 있다. 하시모토 역시 박재혁이 요주의 인물이라 알고 있었다.

김영주 집에서 모의를 하다

박재혁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9월 13일까지 동래 온천, 해운대 온천, 범어사와 원효암 등을 다녔다. 친구들과 유흥하며 즐겼다. 심리적 압박을 벗어나고자 했으며, 심신의 피로를 회복하고, 또한 거사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해운대는 최치원이 지었고 "해운(海雲)" 명문이 지금도 바위에 새겨져 있다. 누에머리와 같이 생긴 잠두봉은 두충나무와 전나무 그리고 동백나무가 많이 있는데 봄과 겨울 사이에 동백꽃이 이쁘게 피어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곳이라고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소개하고 있다. 해운대 온천은 부산에 살던 일본인 와다(和田野茂)가 1905∼1906년에 밭 가운데에서 온수가 용출하자 이를 개발하여 욕장(浴場)을 건설한 것이 시발이었다.

1913년 조사에 따르면, 온천물이 무색투명하고 입욕하기 최고로 적당하며, 인근은 청송백사가 있어 풍광이 좋고 해수욕하기에도 최적지고 교통도 좋아 온천으로 유망하다고 보고가 되었다. 이에 이완용, 송병준, 조중응 등이 땅을 사려 하자 평당 1전 내외의 황무지가 2원 내지 3원으로 폭등하였다. 작은 별장들이 들어서고 경전철이 개설되었고 버스(자동차)가 1일 4회 왕복 운행을 하고, 해운대행 마차도 운행하였다. 일본인 의전(依田)과 도변(渡邊)이 거액 10만 원을 투자하여 해운대 온천 여관과 해운루가 1916년 7월 개업하여 이 일대가 관광지로 번성하였다. 1917년 7월 낙성을 목표로 암영미길(岩永米吉, 이와나가)과 의전선육(依田善六)이 1만 2천여원의 공사비로 대욕장을 건설하여 온천욕을 즐기게 되었다.

해운대 온천은 탐령단(探凉團)이 올 정도로 유흥지로 관광지로 발전하였다. 이광수는 해운대 온천을 하고 나서 "얼른얼른하는 화강석 위에 앉아 말끔하니 전신을 씻고 나서 백설 같고 양모 같은 수건으로 몸을 씻고 하얀 모래, 푸른 소나무 사이로 솔솔 불어오는 청풍을 쐬면 육신의 먼지뿐 아니라 정신의 먼지까지 씻어지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 온천은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지 한국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의 목욕문화와 온천은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유흥의 공간이었다.

거사 계획을 논의하면서 당시 가장 주목받지 않는 집이 김영주의 집이었다. 김영주는 당시 잡화점을 운영하였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러드나들어도 경찰의 주목을 받지 않았다. 김영주의 잡화점은 당시 의열단의 연락거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거사 뒤에 경찰은 김영주 집을 수색하고 다수의 불온 문서를 발견하였다. 오택과 최천택은 경찰의 요시찰 인물의 핵심 대상이었다. 오택은 상해임정과 연관을 맺고 연통제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가장 조심해야 했다. 박재혁의 거사 모의로 인해 오택과 연관된 독립운동 조직이 적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택이나 박재혁 모두 매사 신중해야 했기에 박재혁은 오택과는 거사 직전까지 만나지 않았다. 잘못하면 숨겨둔 폭탄까지 적발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천택은 당시 만세운동 이후 이학이 장례를 거행하고 난 뒤 청년운동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일제의 문화통치로의 전환으로 국내는 청년회 운동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던 시기였다.
 

1930년 해운대 지도와 동래 온천장 부산의 동래와 해운대는 온천으로 유명하였고 일본인들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았다. - 출처 : 대일본직업별상세도, 제194호 신용안내 조선남부, 부산부(1930) ⓒ 대일본직업별상세도

 
거사 계획을 하는 동안 동래 온천, 해운대 온천, 범어사와 원효암 등지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경찰의 불심검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유흥을 즐기는 청년으로 보이도록 행동했다. 하지만, 여관은 불심검문을 당할 수 있기에 밤이 되면 김영주 집에 모여 거사를 논의하며 밥도 먹었다. 김영주의 직계 외손녀 최미수 여사(1948년생)에 따르면, 당시 김영주 집에서 모여서 거사를 모의했다고 한다. 최미수 여사는 김영주의 장녀의 3남 3녀 중 4째이며 막내딸로 김영주의 부인 박상순 외할머니와 평생 같이 살았다. 김영주가 사망(1930)하고 난 뒤 두 딸을 데리고 사는 박상순을 최천택과 김범부가 찾아오곤 하였다고 한다. 최 여사의 둘째 언니 남편 집안이 바로 부산 동래만세운동의 주역인 엄진영, 엄병영이다. 김영주와 엄진영은 동시대의 사람으로 부산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선 분들이다.

김영주의 부인 월성박씨 박상순은 음식솜씨가 좋았다. 박재혁이 먹는 밥이 이승에서의 먹는 마지막 밥이 될지 몰랐다. 거사 전 날 맛나게 박재혁이 밥을 먹는 모습에 월성박씨는 눈물을 훔쳤다. 박재혁은 모친이 걱정할까봐 당시 집에는 가지 않았다.
월성박씨는 부산 만덕의 부자집 딸로 자랐지만 시집을 잘못 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다른 동서는 그 당시 자가용 타는 집에서 시집을 왔기에 주눅이 들어 살았다. 남편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가슴이 짝 펴지는 느낌이 들었다.

김영주의 집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두 동생은 모두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었다. 김영주는 장남으로 집안을 돌봐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집안일보다는 늘 바깥일에 더 바쁜 양반이었다.
 

의열단원 김영주 박재혁의 친구로 의거 당시 숙식을 제공하고, 의열단과의 연락거점 역할을 한 듯하다.- 사진제공 외손녀 최미수. ⓒ 최미수 제공

 
월성박씨 입장에서 남편의 안위가 무척 걱정되었다. 독립운동으로 자기 남편에게 어떤 운명이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점쟁이한테 가서 친구들의 사주를 뽑아보았다. 집 인근에 사주쟁이가 살고 있어서 가끔 심심풀이로 가곤 했었다. 다행스럽게 가장 명이 짧은 사람이 박재혁이었다. 남편은 박재혁보다 길게 나왔고, 가장 긴 사람이 최천택과 오택이었다. 미신이었지만 월성박씨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결혼을 했고 박재혁은 아직 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차마, 가장 명이 짧은 사람이 박재혁이라고 말은 하지 못했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그래서 박씨는 평소보다 더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렸다. 그런데 월성박씨가 29살에 과부가 된 이래로 점괘는 절대로 믿지 않았다고 한다. 집안 행사나 결혼에서 점괘를 보고 결정한 적은 없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의열단 #박재혁 #오택 #최천택 #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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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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