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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35

등록 2021.05.03 14:56수정 2021.05.0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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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 신사 부산의 상징 용두산에 신사는 일제 침략의 상징이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용두산 공원에 오르다

9월 13일 거사 전날이었다. 박재혁은 최천택과 같이 용두산 공원에 갔다. 용 머리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부산에 초량왜관이 설치되었을 때, 왕래하는 이들의 안전을 위해 용두산에 금평신사(琴平神社)가 세워졌었다. 그 후 금도비라신사(金刀比羅神社)였다가 1894년 거류지 신사로, 1899년 2월 4일 용두산 신사로 불리게 되었다. 과거 부산시청(현 롯데백화점) 자리인 용미산에도 신사가 있었다.

용두산 신사는 1916년 공원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부산 타워로 옮겼다. 신사 아래의 광장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일본인들의 중요 의례와 신사참배의 공간이었다. 용두산 신사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다른 신사들을 경내에 부속시키며 규모가 커지다 1936년엔 경성 신사와 함께 조선총독부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국폐사(國幣社)로 승격하게 되었다. 용두산은 일본인 거류지, 부산항과 영도가 한 눈에 보였다. 그 아래에 부산경찰서가 있었다. 신사는 해방 후인 1945년 11월 17일 화재로 소실되었다. 신사 앞에 있던 사자상을 1948년 김철수 경남도지사가 역사의 의미를 묻지 않고 양산 춘추공원에 옮겨와 삼조 의열단을 지키는 석상이 되었다가 지금은 철거되었다.

박재혁과 최천택은 경찰서 주변을 정찰 후 기념사진 촬영하였다. 사진은 해방 후인 1946년 3월 1일 <민주중보>에 처음 공개되었고, 박재혁의 유족이 보관한 것이다. 함께 찍은 최천택 후손은 사진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거사 직전에 찍은 사진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후손들이 독사진이 없어 사진을 찢었다가 붙여서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박재혁과 최천택 박재혁의 후손이 가지고 있는 사진. 후손이 박재혁의 사진이 필요하여 찢어서 보관하였던 것을 붙여서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다. -사진 제공 이손녀 김경은 ⓒ 김경은

 
최천택은 자전적 기록에서 이때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15세 때 동지 박재혁이 싱가포르에서 귀국 도중 상해에서 입수한 폭탄을 민족 해방을 위하여 투탄할 계획과 설계 숙의한 후에 그 장소를 일제 관문인 부산경찰서에 투척하기를 결정하고 9월 1일(거사 일을 착각하고 있다.) 이를 실행하였더니 불행히도 계획에 어긋나서 박 의사는 자기 오른쪽 다리에 상처를 입고 즉석에서 체포되고 나는 40분 후에 피검되었다."

최천택 자신의 기록에는 용두산 공원과 사진 촬영에 대한 기록은 없다. 김홍주의 <투사 최천택>(1984) 넌픽션 이후 이 내용이 사실인 듯 유포되었다. 실제 오택의 기록 내용이 최천택의 내용으로 바뀐 부분도 있다. 최천택은 박재혁이 중국 고서적상으로 가장하여 부산경찰서를 투탄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생전에 최천택이 확인한 사실이라면 그의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박재혁은 중국 고서적상으로 가장한 것이 아니다. 박태준이 쓴 <약산과 의열단>의 박재혁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게 소설과 같이 썼다. 그 이후 사람들은 그 영향으로 박재혁의 투탄 당시를 사실보다 많이 소설화했다. 심지어 학자들도 반론하지 않았다. 1982년 박재혁의 여동생 박명진은 투척 사건의 유일한 공범은 최천택이 아니라, 오택이라고 증언하였다. 비록 학교 다닐 때 자신을 도와준 최천택이었지만 분명히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박명진은 오택과 박재혁이 자성대 집에서 밤새 서로 수군거리며 뭔가를 모의하는 것을 어릴 때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박재혁을 떠나보낸 이후 오택은 연일 긴장된 날이었다. 형사가 골목길 어디에 잠복하며 재혁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하여 골목길을 기웃거리기를 여러 날이었다. 혹시 나에게 알리지 않고 상경한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 잠겼다. 오택은 박재혁으로부터 무슨 소식이 올까 고대하다가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

박재혁이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공중으로 날아다녔다. 사람들은 모두 쳐다보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혹시나 떨어질까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아~" 하며 걱정스러운 탄식을 내질렀다. 일본인들은 괴변(怪變)이라며 손가락질하며 총살하라고 하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찰들이 박재혁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박재혁은 피를 흘리며 떨어졌다. 오택은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으악!" 소리를 지르며 오택이 놀라서 깨었다. 온 전신에 땀이 흠뻑 젖었다. 불쾌했다. 또 마음으로 무척이나 불길했다. 부인 김정수 여사도 그 이야기를 듣고 같이 잠에 깨어 잠들지 못하고 밤새 우울했다.

오택은 박재혁이 동래로 가고 난 뒤 만일을 알 수가 없어 야간은 물론이고 주간에도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오로지 박재혁을 도울 궁리만 하고 있었다. 오로지 하는 일이란 신문을 보며 박재혁한테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폭탄을 맡겨두었기에 상경하기 전에 반드시 올 것이라 믿었다.
  
박재혁, 정공단에

9월 14일, 화요일 비 오는 날이었다. 어제부터 가랑비가 내려 오전까지 가을비가 오락가락하다가 오후에야 겨우 그쳤다. 갑자기 오택 집 문전에 자동차 소리가 나더니 박재혁이 불쑥 들어왔다. 오택은 반갑기도 하면서 걱정이 되었다.

"별일 없었나?"
"응. 천택이하고 영주하고 다니면서 잘 지냈다. 네 돈 때문에 편히 지냈다."
"근데, 어젯밤 2시에 최종 결심을 했다."


오택은 박재혁이 결심했다는 말에 비장감을 느꼈다.

"동래서도 해운대서도 왜경의 불심 조사를 당했어. 범어사 원효암까지 피신하여 심사숙고하였으나 도저히 호기를 고대할 수 없었다."

잠시 재혁은 숨을 돌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차일피일하는 동안에 만일 사전 발각이 되면 나의 계획은 수포가 되고 악형만 남을 것이니 차라리 대상의 대소를 불구하고 나의 결심을 단행하는 것이 본의라고 단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재혁아! 조선총독부를 투탄하는 것은 무리 같아!"
"맞아, 부산경찰서를 투탄하려 하네. 내가 가장 잘 아는 곳이니까?"


박재혁은 냉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고, 오택은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친지에게는 추호(秋毫)도 피해가 없도록 단독 책임을 지겠네. 자네도 그렇게 알고 있게. 만약 체포되는 일이 있다면 절대로 나와의 관계를 부인하시게. 나는 단독범임을 주장할 걸세."

박재혁은 오늘 거사하겠다면서 시간이 절박하다며 전일 맡겨둔 물건을 내 달라고 독촉하였다. 조심조심 부인인 김정수가 떨리는 손으로 폭탄을 들고나왔다. 김정수 여사는 생전에 그날을 분명히 기억했다. 박재혁의 폭탄은 다른 곳이 아니라 오택의 집에 숨겨져 있었다.

폭탄을 싼 종이를 벗겨서 백색 수건에 곱게 싸니 폭탄은 흡사 병자의 약병처럼 보였다. 폭탄은 손에 쥘 정도였다. 박재혁이 일본에서 가져올 때 폭탄은 수건으로 싸 허리에 매달고 들어왔을 정도로 폭탄은 크지 않았다. 박재혁은 거사 후 체포되었을 때 폭탄의 보관장소로 오택의 집을 절대로 지목하지 않았다. 경찰 조사는 다음과 같았다.
 

오택과 김정수 결혼 30주년 기념사진 오택의 부인 김정수 여사가 박재혁이 맡긴 수류탄을 보관하고 있었다. -사진제공 : 오택 외손자 박윤수 ⓒ 박윤수

 
"범행 전날인, 즉 13일까지 최천택(崔天澤)과 김영주(金永柱) 이 두 명과 동래온천 등으로 놀러 다니다가 범행 당일 집으로 돌아와서 폭탄을 꺼내 가지고 이를 결행한 것이었다."

타고 온 자동차가 밖에 기다리고 있었기에 둘이 함께 타고 가까운 정공단으로 갔다. 비석 앞에 나란히 서서 정중하게 경례했다. 박재혁은 목숨을 걸고 거사에 성공하겠다고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정발 장군과 부산진성에서 임진왜란 때 순국한 부산진성 선열들의 애국 기운이 재혁의 몸에 들어오는 듯 느꼈다. 박재혁은 다짐했다.

"이제 왜놈 아가리로 나는 들어간다.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인지 모른다. 하지만 대한의 아들로 태어나 노예와 같은 식민의 사슬을 끊는 데 내 한 몸을 바침에 두려움이 없다. 노예의 삶보다 독립과 자유의 삶을 원한다. 죽지 않으리라. 살아 돌아와 저들의 멸망까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리라."

오택과 최후의 악수를 청한 후 비감(悲感)한 어조로 가족을 부탁하였다. 오택은 부지중 석별의 눈물이 앞을 가리고 말문도 닫혔다. 박재혁은 "잘 있으시오!" 하고는 차에 올랐다. 시간은 오후 1시 30분이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빨리 가버렸다. 오택은 혼자서 오륙도를 바라보고 우상같이 한참 한숨만 하고 서 있었다. 박재혁과 헤어진 오택은 집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정공단 인근의 부산진교회에서 열리는 시민대회 도일(度日) 노동자 봉쇄반대 토의장으로 들어갔다.

정공단에서 부산경찰서까지는 약 5km 정도이고, 도보로 1시간 20분 거리이다. 당시의 자동차로 30분 내외가 정도 걸렸을 것이다. 최천택은 박재혁과 동행했다고 하지만 경찰 기록에는 없다. 박재혁은 경찰서로 들어가기 전에 주변의 상황을 관찰하고 침입과 도주의 길을 나름 파악하였다. 담담하리라 다짐하였지만, 가슴은 두근두근 북 두드린 듯하였다.

박재혁,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1910년대 부산이사청과 부산경찰서 일제 강점기 부산권력 기관의 핵심 장소로 사진으로 보면 한가하다. 부산경찰서 현판이 뚜렷하게 보인다. -제공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박재혁은 마침내 9월 14일 오후 2시 30분경 부산부 금평정(琴平町) 부산경찰서로 들어갔다. 부산경찰서는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으로 인한 근대 개항이 되면서 1880년 4월 현 영주동 봉래초등학교 자리의 옛 초량객사를 청사로 사용하였다. 1894년 개성학교(훗날 부산상업학교, 현 개성고)를 설립한 선각자 박기종이 오늘날 부산시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부산항 경무관을 역임했다. 부산경찰서는 1897년 현 중구 광복로 85번길 15(동광동 2가 10-5)로 이전했다. 이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자 1905년 새 청사를 지었다. 신축 건물은 2층 규모로 서구식 목조 건물로 건축되었다.

외벽(外壁)을 널빤지를 따닥따닥 포개어 이어 붙인 비늘판 붙이기로 꾸며 놓았고 서구식 창문에다가 일본식 팔작(八作)지붕으로 지었다. 건물 위쪽에는 부산이사청이 있었다. 그래서 1906년 부산이사청 경찰서로 개칭되었다가 1907년 부산경찰서로 개칭되었다.  이후 부산경찰서는 1924년 6월 9일 현 중부경찰서 자리로 신축 이전했다.

1910년대 찍은 사진을 보면 경찰서 입구에는 경찰이 경비를 서는 모습이 있지만 다소 한가롭다. 경찰서라지만 경비가 다소 허술한 듯하다. 이는 아마 부산이 가장 친일적인 활동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보면 이동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다소 한적한 공간이다.

조선옷을 입은 박재혁은 부산경찰서 앞에 도착했다. 경찰서 경비는 의심하지 않았다. 박재혁은 다만 맨몸으로 폭탄 하나를 품고 뚜벅뚜벅 대담하게 경찰서로 들어갔다. 마음대로 경찰서 계단 아래의 사무실 안에 침입하였다. 조선인 옷을 입은 박재혁은 어떠한 안내도 없이 서슴없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누가 보아도 당당했다. 마치 공무가 있어서 온 사람같이 보였다.

유자명은 "경찰서 대문 앞에는 문을 지키는 경찰 하나가 서 있었다. 박재혁은 그 경찰에게 '나는 경찰서장에게 직접 드려야 될 비밀 정보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경찰은 박재혁을 경찰서장이 있는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라고 했다. 경찰서장은 경찰서의 다른 직원과 함께 사무실 안에 있었다. "당시 하시모토 서장은 사무실에서 공문서를 적고 있었는데, 조선인 옷을 입은 연령 26, 7세의 조선인이 어떠한 안내도 없이 서슴없이 사무실로 들어와 서장 앞에 잠시 멈춰 서서 면회를 요청하였다."

박재혁은 하시모토 서장의 오른쪽 가까이 접근하였다. 업무를 보고 있던 하시모토 사장을 붓을 멈추고 박재혁 쪽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박재혁은 주머니 아래에 가죽띠로 감아 손수건으로 폭탄을 감싸있었다. 하시모토 서장에게 접근하면서 순간적으로 안전핀을 벗겨 서장 의자 사이로 내던졌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박재혁은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트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는 것이다'라고 말을 할 틈도 없었다. 박재혁은 경찰서에 들어온 후 10여 분을 지나 거사를 했다. 그때가 2시 40분경이었다. 오로지 박재혁은 폭탄을 터트리는 데 집중했다.

박재혁의 폭탄은 도화선을 사용하지 않은 러시아식 자폭 폭탄이었다. 폭탄은 철과 놋쇠 통에 들어있었던 것으로 작열 소요 장진을 한 지름 약 2촌(寸, 6cm), 높이 약 4촌(12cm)의 주철(鑄鐵)로 만든 원통형 폭탄이었다. 박재혁은 폭탄을 투척하면 부산경찰서 청사를 파손하는 것은 물론 경찰서장을 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또 이에 따라서 지방 민심의 동요(動搖)를 초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김원봉에게 받은 폭탄은 1902년식 폭탄이었다. 김원봉이 폭탄을 실제 제조한 것은 헝가리인 마자르(Magyar)와 1920년 말 혹은 1921년 초 상해에서 였다. 마자르가 만든 폭탄은 제2차 중국과 국내 암살·파괴 계획 때 사용한 폭탄이었다. 1920년 3월 제1차 국내 암살·파괴 계획을 위한 폭탄은 상해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박재혁의 폭탄은 마자르가 만든 인명 살상의 성능이 좋은 폭탄이 아니었다. 김원봉이 준 폭탄의 구입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본 경찰은 간도 지방 또는 상해나 러시아 방면에서 입수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1902년식 폭탄이라면 제조한 지 오래되었고 사용법이나 성능도 긍정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폭탄을 가지고 연습을 한 적이 없었던 박재혁은 폭탄 투척 방법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박재혁은 하시모토 서장 근처 마룻바닥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 투척 현장은 하시모토 서장 책상과 수부(受付) 계원석과의 중간부였다. 박재혁은 폭탄을 투척한 다음 연기가 자욱한 순간을 틈타 도주하려 했다. 엉겁결에 폭탄을 던졌으나 멀리 던지지 못했다. 겨우 3척 정도, 1m 앞이었다. 폭탄을 하시모토에게 던진다고 하였으나 하시모토가 앉은 의자의 다리를 맞고 폭탄이 도로 박재혁 쪽으로 굴러왔을 가능성이 있었다. 수류탄의 폭발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던진 찰나 박재혁의 발밑에 굉연한 음향과 함께 푸른 연기가 자욱했다. 폭탄은 굉음을 내면서 터지고 폭탄 파편은 사방에 날려 흩어졌다.

폭탄의 위력은 컸다. 안전핀식 수류탄은 그 위력이 큰 것은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정했다. 파편 하나는 하시모토 서장 가까이 있던 모(某) 경부의 걸상을 부수고 사무실 구석 벽을 뚫고 더욱이 사환 방에 손상을 입힐 정도였다. 폭탄 파편은 서장이 있는 중형 평상 안락의자의 오른쪽 다리를 분쇄하였지만, 한편은 또 천장을 관통하여 2층 사법실 마루판을 관통하여 마침 집무 중인 와다(和田) 사법주임의 의자, 책상 등을 파괴하였다. 폭탄 투척 때문에 사무실 내의 의자, 탁자, 서적궤 및 유리창 등 다수의 집기가 파괴되었을 뿐 다행히 경찰서 직원과 기타 사람들에게는 상해를 입히지 않았다. 폭발 정도가 맹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는 것은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다.
 

박재혁 의거를 보도한 대판조일신문 국내 신문과 달리 일본 신문은 박재혁이 안전핀식 폭탄을 사용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박효혁이라 잘못 보도하였지만 이내 박재혁으로 수정하여 보도하였다. -대판조일신문, 1920.10.04. ⓒ 이병길

 
폭탄이 터지자 하시모토 서장은 놀랐지만 자기 앞쪽에 선혈이 낭자한 조선인이 쓰러져 있었다. 현장은 범인의 부상으로 인해 심한 출혈로 마룻바닥을 피로 물들여 처참은 극에 달했다. 자신의 몸을 살펴보니 오른쪽 무릎 관절에 파편을 맞아 경상은 입었을 뿐이었다. 오후 3시 30분, 폭탄으로 입은 하시모토 서장의 상처는 오른쪽 다리에 폭탄의 파편을 맞고 출혈은 흰 바지를 물들였기는 하였으나 니시무라(西村)와 스자쿠(朱雀) 두 의사의 진찰에 의하면 그렇게 중상은 아니었다. 서장은 붕대를 감고 사무실에서 사건에 관한 지휘명령을 하고 있었다.

경찰서장은 오른쪽 발과 무릎 관절부에 팥알 크기의 상흔을 입게 되어 살해의 목적은 이룰 수 없게 되었다. 하시모토는 정신을 차리고 사태 수습을 위한 지휘를 하였다. 박재혁은 경찰서와 불과 700여 미터에 떨어진 옛날 지석영이 일본인으로부터 우두법을 배웠던 제생병원이었던 부립병원으로 곧바로 단가에 태워 옮겨졌다. 박재혁의 상처는 오른쪽 다리와 복부를 심하게 다쳐서 출혈이 심하여 매우 중태이나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는 듯했다.

폭탄이 터지는 참사 돌발과 동시에 부산경찰서는 곧 비번 순사를 소집하여 일대 경계를 함과 동시에 부산지방법원검사국에 급보하고 부산지방법원검사국에서는 오오무라(大村) 검사장과 쿠보타(窪田) 검사와 서기 수 명이 2대의 자동차로 현장에 출두했다.

현장을 살펴보니 해당 청사의 천장 창문과 요판(腰板, 벽이나 문에 허리 부분까지 붙이는 판자) 등 여러 군데가 훼손되고 파괴되었다. 폭탄은 매우 강렬한 폭탄이었으며 흉행(凶行)의 현장에 방치한 손수건 면포에는 사용한 폭탄의 형상이 붙은 녹이 붙어있었다. 오택에게 건네받아 손수건으로 감싼 그 폭탄이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부산경찰서 투탄 #의열단 #박재혁 #오택 #최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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