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36

박재혁과 정공단 동지들 수감되다

등록 2021.05.04 14:55수정 2021.05.0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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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의거 호외 부산경찰서 투탄에 대해 신속하게 당시 부산일보는 호외를 뿌렸다. 오택(오재영)은 이 호외를 해방 후까지 경찰의 압수수색에도 걸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다.


정공단 동지들 검거되다

사건이 터진 그 날 부산일보에서는 신속히 호외를 발행하였다. 부산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부산경찰서 투탄 소식이 알려졌다. 하지만 경찰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보도 통제를 일본은 10월 3일, 국내는 10월 4일까지 하였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경무국에 의해 보도 통제가 해제되자 그때부터 신문들은 앞다투어 박재혁의 의거를 보도하였다. 가장 먼저 매일신보가 "부산서에 폭탄 투하- 아주 서투르게 던져서 전진 자도 중상을 했다"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후속 보도가 연일 이어졌다. 정공단 친구들의 검거와 심문 소식도 10월 6일부터 보도되었다. 10월 13일 『상해시보(上海時報)』에도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절혁(樸截赫)으로 거사가 보도되었다.

박재혁과 헤어진 오택은 부산진 교회 토의장에서 부산시내 쪽에서 오포(午砲)와 흡사한 대포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박재혁이 던진 폭탄이라 여겼다. 온몸이 굳어지고 다리가 와들와들 떨렸다. 그러나 오택은 한편으로 이상하게도 춤이라도 추고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교회 앞뜰을 배회하던 중 대회는 폐회됐는데 교회 문전에 난데없이 자동차 한 대가 섰다. 부산경찰서 형사 5, 6명이 뛰어들어 오택과 그의 친근자 4, 5명을 포박하였다. 잡혀가는 길에 오택은 집에 들렀다. 이미 집은 가택 수색으로 천장 부엌할 것 없이 전부 파괴되어 있었다. 부모와 처에게 대략 말을 하고 의복도 단단히 갈아입고 "시일은 모르나 무사 귀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마디 남기고 차를 타고 경찰서에 들어갔다. 의거 후 40분 후에 경찰서 인근에 있었던 최천택도 붙잡히었다.

오택이 검거되어 오후 3시경 부산경찰서에 당도하니 폭약 냄새가 넘치고 아래층 사무실은 유리창이 전부 파괴되고 의자는 전복되어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중앙 쪽 서장 의자 판지 위에 선혈(鮮血)이 낭자하여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광경을 보면 오택은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유치장에는 수십 명의 행인이 검거되었다. 상인배로 경찰서 부근 청년 통행자였다. 경찰서 부근을 지나든 행인, 상인 등 젊은이 수십 명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들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부터 통행인 구속자를 일일이 심문 후 전부 석방하고 부산진 5, 6인만 유치장으로 갈라 넣어 두었다. 당시 박재혁 연루자로 체포된 사람은 최천택, 김영주, 오재영, 백용수, 김작치, 강필우 등 6명이었다. 미체포자는 김성일(김원봉), 김병태, 김기득, 박창수 등 4명으로 대부분 중국에 있는 사람이었다. 검거된 연루자의 주소와 직업, 명단은 다음과 같다.

- 부산부 좌천부 469번지 부산 경신상회 점원 하역 최천택(崔天澤, 25세)
- 부산부 좌천현 잡화상인 연루자 김영주(金永柱, 25세)
- 부산 좌천동 29번지 인삼상인 오재영(吳哉泳, 24세)
- 부산 좌천동 215번지 부산주일상회 점원 백용수(白龍水, 24세)
- 부산 좌천동 552번지 김작치(金作致, 24세)
- 경남 울산면 성안동, 당시 부산본정 5정목(丁目) 최태욱(崔泰旭) 방(方) 부산공태상회 점원 강필우(姜弼又, 26세)

체포된 6명 중 강필우를 제외하고 모두 정공단 좌천동 사람들이었다. 이중 부산상업학교 출신은 박재혁, 최천택, 오택, 백용수이었다. 3, 4일지나서 배후 관계와 박재혁과 평소 우의관계 및 금번 공범 혐의가 농후한 오택과 최천택, 김영주 세 사람만 남기고 다른 친구는 모두 풀려났다.


박재혁, 취조를 당하다

판검사 임석회의에 이번 사건은 조일인(朝日人) 차별 없기 위하여 전례 없이 조선인 사법부에 일임되었다. 당시 부산경찰서는 일본인만 책임을 가진 와다( 和田) 사법 주임이 있고, 조선인만 전문 책임을 가진 한석명(韓錫明) 조선인 사법주임이 있고 그 부하에 조선인 부에 취조주임인 유진후(兪鎭厚, 1888~1951)이라는 맹한(猛漢)이 있었다.

한석명(韓錫命, 1890~?)은 관립한성법어학교와 독일협회 중학교를 졸업하여 신학문을 익힌 뒤 대한제국 말기에 내부 소속 통역관으로 임용되었다. 경찰서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한 것을 계기로, 1910년 이후 경상남도 창녕군과 부산부 등지를 거쳐 경남 도경찰의 고등과 형사로 재직했다. 1925년에는 경시로 승진하여 정치범이나 사상범을 다루는 직책인 경상남도 보안과장에 임명되었다. 경찰 근무 당시 다이쇼대례기념장과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8년부터 사천군수, 동래군수, 하동군수를 역임했다. 일제로부터 훈6등 서보장(瑞寶章)을 받고, 종6위 훈6등에 서위(敍位)되었다. 그의 딸로 자매 소설가로 유명한 한무숙과 한말숙이 있다. 한말숙의 절친한 친구가 소설가 박완서(朴婉緖)이고, 남편은 유명한 가야금 연주가 황병기(黃秉冀)이다.

유진후(杞元春盛)는 "경남 일대의 애국지사를 해친 자"로 반민특위에 검거, 수감되었다. 그는 부산경찰서 창설 초기부터 26년간 근무하여 경부(警部)까지 올랐으며 수많은 애국지사를 투옥, 고문하였다. 1920년에는 상해 임정 내무부 서기 정해구(鄭海九) 투옥, 부산경찰서 폭탄 사건의 박재혁 체포 투옥, 동아일보 장덕준(張德俊) 기자를 투옥하였다. 1923년 관동지진으로 민족의식 배일사건으로 최천택・심두섭・전성호 투옥, 1928년 부산진청년회 간부 최천택 외 9명 투옥, 1931년 대구 지역에서 일본의 침략 전쟁 반대 유인물 살포한 조선공산당 부산지부장 이승엽 등 5명 검거 등 그 죄상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1934년 일본 정부로부터 경찰로 훈8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고, 1935년과 39년에는 동래읍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1년 5월에는 경상남도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부산경찰서 투탄 사건은 유진후가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경상남도 부산경찰서 경부보(警部補)였다. 당시 한국인과 자연스럽게 대화할 일본인 경찰이 많지 않았기에 조선인 경찰을 사건 담당으로 배치한 것이다. 박재혁은 어느 정도 치료를 하였지만 무릎 아래의 부상은 심하여 걷지를 못하는 상태였다. 부상으로 제대로 말을 할 형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후는 박재혁을 조사했다.

"박재혁, 배후가 누구야?"
"배후! 배후는 조선 총독이고 일본 왕이다. 자주독립을 위한 조선사람이 나의 진정한 배후이다. 왜놈들이 이 땅을 식민지하지 않았다면 결코 독립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너, 이번 밀양폭탄사건 의열단과 관련이 있지?"
"나는 모른다. 하시모토 서장은 어떻게 되었나?"
"서장은 죽지 않았다. 네가 던진 폭탄으로 건물만 파손되었을 뿐 사람은 죽지 않았다. 너는 실패했다."

유진후는 박재혁에게 사실 그대로 알렸다. 어차피 알 것이기 때문이다.

"건물이 파괴되고 사람 몇 죽는다고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재혁은 상처로 기력이 없었다. 다만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그래도 할 말은 했다.
"비록 내가 사람을 죽이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왜놈들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그것으로 나는 성공한 것이다. 조선사람들이 절대로 왜놈들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의거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나중에 오택이 출옥한 뒤에 각 신문을 보니 국내 신문은 비겁하여 사실 보도도 똑똑지 못하였고 대판매일(大阪每日), 대판조일(大板朝日) 등은 대자특필(大字特筆)하였다.

"선일(鮮日) 양(兩) 민족(民族)의 융화는 근본적으로 실패다. 그 이유는 평양이나 경성에서 폭탄사건이 발생한 것은 괴이(怪異)치 않다. 이는 일본의 위대(偉大)를 모르는 무지한 자의 횡포니 오히려 당연시 하였지만, 이번 부산 사건은 천만의외라 이야말로 동경 한 가운데에 투탄한 것과 동일시할 수밖에 없다. 부산은 300년 동안 일본의 거류지(居留地)이고 현재 일본의 제2 대판(大阪)이고 부산의 조선인은 개화도(開化度)가 일본인과 동일하다. 범인은 부산 태생으로 생후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일본 국력과 일본인을 잘 이해하는 자로서 이러한 배일사상이 내포된 것을 보아서 금후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고 선일융화(鮮日融化)는 단념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것이다."

유진후는 재혁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다그치며 취조를 하였다. 박재혁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붙잡으며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절대로 친구들을 사건 공범으로 끌어들이지 않겠다. 둘째로 국내에 없는 사람은 검거 불가능하니 말하겠다. 셋째로 저들이 조사한 것은 마지 못해 고개만 끄덕이겠다. 마지막으로 의열단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박재혁은 이 네 가지를 의식에서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의열단의 존재는 밀양폭탄사건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아직 중국과 국내에 남아있는 동지들을 보호해야 했다. 또 친구들은 향후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주어야 했다. 자기 자신만 희생되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친구와 조직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리에서 전해오는 고통은 상상외로 심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도 정상이지 않은 듯했다. 유진후에게 자기가 이제까지 있었던 삶에 대해서만 간신히 진술했다. 박재혁의 조사 결과는 보도가 해제된 10월 5일 보도되었다.

"원적 부산부 범일동 183번지, 현주소 335번지에 사는 박재혁(朴載赫, 26세)은 본래 부산부 공립상업학교 출신으로 대정 5년(1916) 4월에 잠시 부산와사전기회사의 차장이 되었고, 그 후 다시 경부선 왜관지방에서 무역상에 고용하다가 대정 6년(1917) 6월 중에 그 주인을 달래어 704원이나 되는 돈을 도득(圖得, 꾀하여 얻음)하여 가지고 상해로 건너갔다. 그다음 해(1918) 6월에 고향에 돌아와 두어 달 지나, 두 번째 다시 상해로 건너가 즉시 싱가포르까지 멀리 가서 무역회사에 종사하였다. 금년(1920년) 4월에 상해로 돌아와 7월까지 두류(逗留, 체류)하였다. 그때 상해에서 머물러 있었던 조선사람[김원봉]으로부터 독립운동의 부탁이 있었으나 그의 집안일로 말미암아 그때는 거절하였다. 그달 19일 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지난 8월 초순에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이전부터 간담(懇談), 서로 정답게 이야기함)하든 그 친구[김원봉]를 만나 조국 독립의 최후 성공을 굳게 상약(相約, 서로 약속함)하고 즉시 폭탄 1개와 돈 300원을 얻어 폭탄과 돈 50원을 수건에 싸서 가방에 넣어 가지고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거사하기 전날까지 여러 친구들과 같이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마침내 틈을 타서 이런 위험한 일을 실행하였다. 그 공범한 자도 다수인듯하다."

박재혁은 김원봉의 실명을 밝히지 않고 다만 중국 상해에 있는 '조선사람'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김성일'이라 증언했다. 김원봉을 보호하기 위해 가명으로 조작한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 이름은 실명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공단 친구들은 요시찰대상이었기에 거짓으로 말해도 금방 들통나기 때문이었다. 다만 친구들과 만나서 술 먹고 노는 유흥을 즐겼다고 했다. 거사와 관련한 어떠한 진술도 하지 않았다. 특히 오택에 대한 진술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박재혁은 초인적 인내로 유진후의 취조에 최소한의 정보만 진술했다. 유진후가 다리 상처를 건드리는 고문을 할 때마다 이를 악물고 자기 자신에게 다짐했다.

"육체적 고통은 한순간이지만, 내가 발설하면 친구와 조직은 죽고 붕괴한다. 내가 죽는 것은 잠시이지만 친구와 조직을 배신하는 것은 내 삶의 영원한 치욕이다. 한 번의 배신은 천추만대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는 일이다. 죽음이 가까이 와도 마음은 무쇠와 같이 변하지 않으리라."
  
정공단 친구들 취조를 받다
 

1926년 부산 서구 동대신동 부산형무소 당시 부산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일본인 범법자를 가둔 부산형무소가 가장 시설이 좋았다.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부산경찰서에 잡혀 온 사람들 수십 명을 한 방에 몰아넣어 앉아서 잠을 잤다. 사람들에게 수소문해보니 직접 목격자는 없었다. 다만 고막이 파열될만한 폭탄 소리만 들었고 부근을 지나던 행인 전부가 노상에서 쓰러질 정도였다고 한다. 경찰서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했을 것에 오택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당시 부산경찰서는 1층은 유치장이고, 2층은 사무실이었다. 밤새도록 2층 사무실에 많은 사람을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숙직자에게 물어보니 관공서 대표의 위문객이고 법원장 이하 판검사의 현장조사와 수뇌부 회의라고 한다.

오택은 전날 박재혁의 불길한 꿈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재혁에게 분명 나쁜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는 듯했다. 다음날 새벽 4, 5시경 숙직 순사들이 교대하며 저들끼리 대화를 듣고 정공단 친구들은 안심하였다.

"자네 어제 부산일보 호외를 보았는가?"
"응, 범인은 부산상업학교 출신인 가정부원 같다고 하네."
"범인은 폭탄 다루는 것이 서툴러 자기가 다쳤다네. 현재 부립병원에 입원했지. 죽지는 않았는가 보더라."
"서장도 조금밖에 안 다쳤다며. 하늘이 복을 준 사람이야."
"그렇게 말이야. 경상자는 많은데 이는 폭탄 소리에 놀라 졸도한 사람들이라 위독한 사람은 없어."
"그나저나 오늘부터 비상 근무라네. 참, 귀찮게 되었어!"
 

1915년 부산부립병원 지석영이 종두법을 배웠던 재생병원은 1920년 박재혁의사가 치료한 병원인 부산부립병원이었다. - 출처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잡혀 온 정공단 친구들은 서로는 모르는 척했지만, 남몰래 서로 다짐을 하였다. 요지는 분명했다. "우리는 모른다", "우리 그냥 친구로서 같이 오랜만에 왔기에 어울린 것뿐이다", "만약에 조사 결과를 가지고 묻는다면 그냥 인정할 것만 하자", "절대 회유에 넘어가지 말자"라는 것이었다.

잡혀 온 사람들이 이튿날이 되어 모두 석방되고 오택, 최천택, 김영주 세 명만 남았다. 각자 격리되었다. 정공단 친구들은 체포된 지 4~5일부터 본격 심문을 받았다. 하루 2~3시간씩 취조를 받았다. 조선인 취조주임인 유진후는 교묘하게 회유하듯 간청하였다.

"여러분은 내란죄라 사형범이다. 담배와 인단 고급 점심 등을 제공하니 잘 먹고 기왕이면 남자답게 진상을 자백하여 고문을 안 받게 하라."

친구들은 박재혁이 위독한 것을 알기 때문에 자백할 리 없었다. 매일 심문에 친구인 것은 사실이나 범행은 사전에 몰랐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거사 전에 최천택과 김영주는 박재혁과 온천장 등에 같이 있었다. 오택은 박재혁에게 1천 원을 제공하고 박재혁의 폭탄을 집에 두었다는 사실은 경찰도 알고 있었다. 이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아무튼 재혁이 말하고 형사들이 조사한 것만 인정하기로 하였다.

오택은 매일밤 한 두 시간 밖에 자지 않고 알리바이를 구상하였다. 1천 원 용도에 대해 심문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 활동에 관해 묻는다면 인삼장사라서 서울(경성)) 등지를 다닌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오택은 무죄 방면으로 풀려나는 유치장 사람들을 통해 부모님에게 한석명, 유진후, 와다 등 각각 요인을 통하여 매수 정책을 하도록 하였다. 매수 운동이 성공한 탓인지 오택에 대한 취조는 완화하여지고 시일은 여유가 있게 되었다.

오택을 유진후는 대강 심문하고 한석명에게 넘겼다. 한석명은 유진후보다는 좀 더 유화적으로 대했다. 유진후보다 직급이 높은 것도 있지만 인품이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한석명은 매일 4~5시간씩 2층 숙소에다 불러놓고 담배, 인단, 점심 등을 충분히 넣어주었다. 오택은 현금 1천 원 제공 이유에 대해 박재혁 노모에게 생활비로 500원, 박재혁이 병이 있어 치료비로 1천 원을 빌려주었다는 거짓 자백의 논리를 만들었다. 또 폭탄에 대해서는 신문 뭉치 한 개를 맡기기에 물으니 박재혁이 '떡이다'하여 중국 아편을 떡이라 함으로 박재혁이 아편 장사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숨겨주었다. "귀국할 때 비밀리에 가지고 온 것으로 생각하고 후일 속히 가져가라고 부탁하고 받아서 열어 보지도 않고 암실에 숨겨두었다가 6~7일 후 와서 떡을 내어달라고 하기에 오택은 무심히 내어주며 주의하라고 부탁하였다고 하며 그것이 과연 폭탄인 줄은 사후에 추측하였다고 말하고 한석명에게 정식 조사서 작성을 청하였다.

오택은 자신의 모범 답안에 안심하였다. 직접 조사서를 작성하고 도장을 찍었다. 이 정도의 진술이라면 악독한 판사라도 체형까지는 내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유치장에 들어간 지 오택은 보름 만에 처음 대변을 보았다. 위급한 상황에 '똥줄이 탄다'라는 말을 실감하였다. 한 시간 반이나 용을 썼는데 겨우 수십 개의 양분(洋糞)만 누고 말았다. 일주일 이상 매일 한 끼씩 밥을 먹었으니 극도로 노심초사한 것이다.

오택과 달리 최천택과 김영주는 박재혁의 귀국 이후 1주일 동안 계속 같이 생활했기에 집중적 취조 대상이 되었다. 최천택은 부산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후 4일 만에 사법실(취조실)에 불려갔다. 오택의 취조 담당이 조선인이었는데, 최천택 증언에는 그의 취조는 일본 형사가 담당했다. 경찰은 13일 용두산에 간 일을 물었다. 박재혁과 유흥하고 돌아다녔다고 진술했기에 취조할 내용이 없을 수도 있었다. 포악한 일본인 형사는 최천택의 손톱과 발톱을 뽑는 등 엄청난 고문을 가했다. 고문이 심하면 심할수록 최천택의 가슴 속에선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활화산처럼 분출되었다. 최천택은 끝까지 모든 것을 부인했다. 박재혁도 자백할 리가 없고 만약 자백한다면 단독범행을 주장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최천택에게 부산경찰서 조선인 사환이 붓 대롱을 떨어뜨려 놓고 갔다. 박재혁이 입원한 부립병원 간호사가 박재혁의 부탁을 받고 동생의 친구인 경찰서 사환을 통해 편지를 보낸 것이다.

"천택아, 고생이 심하겠구나. 너희들은 이 사건을 모른다고 해라.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

편지를 읽은 최천택은 뼈가 부서지고 살이 으깨어지는 고문을 묵묵히 이겨냈다. 때론 역사에는 소설 같고 영화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유치장에서 취조 중인 김영주, 오재영 등은 가택 수색 결과, 주범자 폭탄투하 사건에 대해 직접 관련이 있는 서류는 없어도 왕복한 불온 문서가 다수 발견되었다. 하지만 박재혁 의거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이었다. 김영주의 집에서는 불온문서가 많이 나왔지만, 이번 사건과 직접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다만 김원봉(김성일)이 김병태를 통해 김영주에게 박재혁의 여비 100엔이 송금된 사실이 드러난다. 이 일로 김영주는 혹독한 심문을 당했다. 최천택은 직접적으로 상해와 연결된 증거가 없었지만, 김영주는 돈이 오고 간 증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세 친구 중에서 가장 심한 취조와 고문을 당한 사람은 김영주라고 할 수 있다. 김영주에게 집중된 질문은 당연히 김성일과 김병태의 정체였다. 그리고 송금된 돈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때에도 있었는가였다. 김영주의 잡화상이 중국과 연결된 부산의 고리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김영주의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일로 김영주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검사국에 송치되다
 

오택과 최천택 두 사람은 부산상업학교 출신으로 박재혁과 정공단 친구들이다. 하지만 최천택의 청년 시절 증언은 오택의 삶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 이병길

 

3주일 후 기소가 되었다. 이날이 10월 5일이다. 박재혁 의거에 대한 보도 통제가 해제되어 신문보도가 된 날이다. 박재혁과 공범자에 대한 조사가 끝났기 때문이다. 박재혁은 "폭발물 취제벌칙 위반과 살인미수죄"로 부산 감옥에 갇혔다. 정공단 친구들도 검사국으로 송치하는 데 부산 초유의 사건이라 특별대우를 하여 당시 부산 제일 고급자동차에 생화를 꽂고 일본인 와다 사범주임이 죄수 호송자가 되어 부산 검사국으로 갔다. 당시 표독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호리다(窪田) 검사는 주소, 성명과 듣고 사건 내용은 언급도 하지 않고 수감 명령을 내렸다.

정공단 세 친구는 감옥행 검은 자동차를 타고 생전 처음 옥문을 들어섰다. 간수들도 대사건의 주인공이라면 특별대우하는 듯했다. 그만큼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투탄사건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도 특별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주목받았는지 사건 발생부터 박재혁 순국까지 당시 신문에 30여 차례 보도가 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지문을 날인하고 절차를 마치고 미결감으로 부산 감옥에 들어갔다. 당시 부산 감옥은 일본인 죄수가 삼 분의 일이나 있으므로 설비, 위생, 대우, 식사 등이 전 조선에서 제일 좋았다. 정공단 친구 일행은 옥문 밖에 가족이 직접 밥과 반찬을 만들어 세끼 때마다 쌀밥과 고기를 차입시켜 주었다. 또 대사건 주인공이라 하여 교도소장 이하 간수장이 매일 문안을 오고 후대(厚待)함으로 별 고통은 없었다. 당시 일제는 부산경찰서 투탄이 의열단 최초로 성공한 사건이고 일본인 경찰 서장이 부상 당한 사건이므로 민족적 차별이 없는 동화정책의 하나로 보고 수감자들을 특별 대우한 듯하다.

1주일 후 두 번째로 검사국에 출정하여 호리다 검사를 만났다. 검사는 온정적이고 질문도 유리한 점만 기록하게 하였다. 오택은 부모의 매수 운동이 검사에게까지 영향이 미쳤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정공단의 친구들에게 별다른 혐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표면적으로 최천택과 김영주는 1주일 동안 박재혁과 같이 유흥을 즐기고 정양했을 뿐이고, 오택은 단지 1천 원의 치료비와 보관된 물건을 준 것뿐이기 때문이다.

10월 16일 갑자기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은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1심 재판이 시작하는 날이었다. 거사가 일어난 지 한 달여 만에 연루자로 지목된 최천택, 김영주 외 4명은 동시에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불기소 방면되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호리다 검사는 정공단 친구들에게 준엄한 설유(說諭-말로 타이름)를 하고 나가라고 하였다.

"여러분은 물심양면으로 박재혁의 투탄 방조가 확실하여 극형에 처할까 하였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 특별히 호의로 해석하여 특히 용서하여 기소유예를 한다. 앞으로 다시 이러한 행동이 재연할 때는 이번 죄를 부활 가형(加刑)할 터이니 회개(悔改) 천선(遷善)하라."

정공단 친구 일행은 형식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여러 친지의 마중을 받아 귀가하였다. 그러나 구금 이후 일수는 불과 한 달 남짓이었으니 모두 극도의 노심초사를 겪어서인지 피골이 상접하고 수년 동안 앓은 중병자같았다. 그날 밤 오택은 부친이 다수 요인을 매수 노력하느라고 수만 원의 금품과 노력이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출옥된 후에 오택이 신문보도 등을 확인해보니 오택이 병 치료비로 1천 원을 주었다는 내용만 보도되었고, 오택 집에 폭탄을 보관하였다는 내용은 빠져있었다. 어쩌면 혐의가 하나도 없었다. 박재혁은 일관되게 폭탄은 자기 집에 보관하였다고 진술한 것이다. 만약 오택의 집에 보관한 사실이 경찰이 보고했다면 오택은 절대 석방되지 않았을 것이다. 폭탄에 대한 혐의가 없다면, 박재혁의 귀국에서 거사까지 오택은 귀국 첫날과 거사 당일만 만났기에 경찰로서도 특별하게 조사할 것이 없었다. 또 오택 부모의 매수 운동이 성공했기 때문인지 체포된 이후의 신문보도에 오택에 관한 내용은 한 줄도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 최천택과 김영주의 조사 사실도 아주 단순해서 법적 처벌을 받을 내용이 없었다. 그것은 실재 박재혁과 같이 거사를 도모하였지만, 구체적 물증이나 행동이 없었기에 기소하여 처벌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혐의가 있다면 오택의 경우는 폭탄 은닉, 자금 제공 등의 혐의가 있었다. 김영주는 불온 문서 은닉과 불법 자금 거래 혐의가 있었다. 최천택은 불령선인 김기득과 박창수를 만난 혐의가 있었다. 이 모든 혐의가 실상 범죄로 처벌받을 구체성은 없었다.
9월 6일 귀국 후 1주일 만에 일어난 거사이고 사건 조사 결과 치밀성이나 연루자들의 연관성 등을 고려해볼 때 단독범행 이외의 어떤 협력자도 찾을 수 없었다. 이는 박재혁 자신이 친구들과의 사건 자체를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연관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공단 친구들도 몇 가지 혐의가 있었지만, 구체적이고 행동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택 부모의 요인 매수 노력을 위한 수만 원의 금품과 노력의 산물로 무마된 것 같다. 사건의 파장에 피해가 가벼웠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부산경찰서 투탄 #의열단 #박재혁 #오택 #최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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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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