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청산리전투', 어떻게 만들어졌나

[봉오동전투를 다시 생각한다③]

등록 2021.05.10 16:09수정 2021.05.1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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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하성환 시민기자는 논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대한 신화, 그 왜곡된 집단기억'(밀양문학 제33집)을 썼습니다. 이 글은 해당 논문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편집자말]

독립전쟁의 두 영웅 홍범도(왼쪽)와 김좌진(오른쪽) 고등학교 미래앤 출판사 <한국사> 교과서 286쪽에 독립전쟁의 두 영웅이라는 해설과 함께 <봉오동전투=홍범도>, <청산리전투=김좌진>을 연상시키는 개인영웅사관에 기초한 역사서술이 눈에 띈다 ⓒ 하성환

 
'봉오동전투=홍범도'가 신화이듯이 '청산리전투=김좌진' 역시 대중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신화이다. 청산리전투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단독으로 성취한 전투가 아님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송우혜님(시인 윤동주의 사촌 송몽규의 조카)은 이미 1991년 권위 있는 학술지 <역사비평>에 청산리전투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따라서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이 점을 반영하여 홍범도 연합부대와 김좌진의 부대가 공동으로 승리한 전투로 기술돼 있다. 그럼에도 '청산리전투=김좌진'이 머릿속에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크게 두 가지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김좌진의 오른팔 이범석 장군이 쓴 두 권의 책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범석은 본래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김좌진의 초빙을 받아 북로군정서로 영입된 인물이다. 

그는 중국 백화문으로 쓴 <韓國的 憤怒(한국적 분노)>(1941)에서 청산리 전투를 '대첩'으로 표현했다. 이 책은 해방 후 1947년 <한국의 분노>로 번역돼 출간되었다. 이범석은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내무장관을 역임한 바 있다. 

그러다 일제관헌 문서를 압수해 간 미국에서 1960년대 말 기밀문서를 해제하였다. 그러자 1970년 국회도서관장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청산리전투에 대한 역사자료를 입수했다. 이에 이범석 역시 발 빠르게 1971년에 <우둥불>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우둥불>은 <한국의 분노>보다 분량이 무려 4배나 많다.

청산리전투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단독이 아니라 홍범도 부대, 안무 부대, 최진동 부대 등을 언급하면서 최초로 연합부대의 존재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초점은 북로군정서와 이범석 자신에게 맞추고 있는 책이다. 특히 <우둥불>에서 일본군 2만 병력을 5만 명으로 과장하고 있는 것이나 일본군 기병소대를 공격해 전멸시킨 것을 기병중대를 전멸시킨 것으로 표현한 것은 과장의 정도가 눈에 띌 정도이다.

문제가 있는 대목은 홍범도 부대를 비롯해 최진동 도독부, 안무 국민회군 등이 일본군 총공세에 미리 지레 겁먹고 새벽에 야반도주했다고 기술한 부분이다. 게다가 천수평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가 고립돼 구출해 주었는데 함께 싸우지 않고 홍범도 부대가 줄행랑을 친 것처럼 기술한 부분도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부대가 어랑촌 전투에서 일본군에 포위됐을 때 이를 구출해 준 부대가 용맹스러운 홍범도 부대였다. 실제로 일본군이 가장 피하고 싶어 했던 부대로 홍범도 부대를 꼽았다. 그만큼 홍범도 부대는 용맹스러웠고 빨치산 투쟁 경험이 풍부해 전술에 능했다.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는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 그리고 최진동 부대와 안무 부대 등 여러 연합부대의 연합작전의 승리였다. 특히 홍범도 부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광복회 부사령이자 만주 책임자, 북로군정서 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김좌진 장군은 아나키스트였다. 대한광복회가 북로군정서로 확대 발전되면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무관들과 함께 1920년 청산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29년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해 주석에 취임했다.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국가보훈처

 
다음으로 해방 후 남북 분단과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은 남북 모두 경직된 채 역사 사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하는 사례로 표출되었다. 그중에 하나가 아나키스트 김좌진 장군 암살 사건이다. 아나키스트 김좌진 장군을 살해한 자는 코뮤니스트 박상실이란 청년이다. 그는 30년대 동북항일연군으로 참가해 일본군과 교전 중 장렬히 전사했다.

항일전쟁 시기,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의 충돌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일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했고 그런 잔혹함을 경쟁적으로 유감없이 발휘했다. 아나키스트 백야 김좌진의 죽음이나 김좌진의 사촌동생 시야 김종진의 죽음에는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의 해묵은 충돌이 깊숙이 개입돼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 노선상의 차이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의 대결과 충돌은 빈발했다. 항일독립군들끼리 살상행위를 자행한 자유시 참변(1921)은 군지휘권을 두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갈등에서 빚어진 참극이었다. 

심지어 같은 민족주의 계열 항일독립지사들끼리도 살육전이 존재했다. 복벽주의 항일지사 전덕원은 공화주의 계열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를 살해했다. 통의부가 참의부로 분열되는 과정에서도 비극은 발생했다. 백서농장 학감을 지냈고 통의부 1중대장 백광운과 5중대장 김명봉은 통의부 6중대장 문학빈에게 피살됐다.

백범 김구는 1920년대 초반 국제정세에 가장 탁월했던 항일독립지사 김립을 얼굴과 가슴에 무려 12발을 쏘아 현장에서 즉사시켰다. 백범 김구의 지시를 받고 김립을 직접 살해한 인물 역시 김구의 제자 오면직이다. 오면직 역시 아나키스트 열혈 항일독립지사로서 일제에 피검돼 국내로 압송된 후 해주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서 1938년 처형됐다.

김좌진 장군을 공산주의자가 암살했다는 사실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부각시킨 것에는 남북한 이념 대립과 체제 경쟁에서 비롯된 측면이 컸다. 김좌진 장군을 살해한 인물이 공산주의자인 탓에 독재권력이 김좌진의 죽음을 크게 증폭시키고 정치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국민 다수는 김좌진 장군이 아나키스트였음을 잘 모른다.

마치 신채호 선생이 항일독립운동 당시 아나키스트로서 활약했고 아나키스트로서 피검되고 감옥에서 죽어갔음에도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 항일독립운동가였음을 학교교육을 통해 일부러 가르치지 않았던 것과 같은 논리이다. 모두 냉전시대 이념의 논리에 휘둘린 탓이다. 어떤 사실은 애써 감추고 어떤 사실은 집중적으로 크게 조명함으로써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흐리게 했다.

청산리전투 역시 홍범도 장군의 위용과 함께 통합부대의 승리였음을 사실에 기초해 서술해야 할 것이다. 
#김좌진 #청산리전투 #아나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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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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