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혁 의사, 1921년 5월 11일 단식 순국하시다

[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40

등록 2021.05.10 17:04수정 2021.05.1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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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천택, 박재혁을 최후로 면회하다

사형이 확정된 박재혁은 대구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건강 상태도 점차 좋아지지 않았다. 의거 당시의 부상 악화와 더불어 또 다른 증상이 나타났다.

대구 감옥의 교도관들도 박재혁을 특별히 대우하였다. 사형수이기도 했지만, 그의 투탄 행위 자체가 일반인으로 감히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투탄을 밖에서 던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박재혁은 직접 경찰서 안에 들어가서 폭탄을 던졌다. 그 자신이 인간 폭탄이 된 것이다. 대구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대기 중인 박재혁을 최천택이 면회하러 갔다. 여전히 부상으로 힘든 상태였다.

"일본인 손에 죽기 싫어서 오늘까지 4, 5일간 단식 중이다. 왜놈들이 주는 것을 먹지 않겠네."
"박형, 자네 몸도 온전치 못한데..."
"아닐세. 저들의 손에 죽어 치욕을 당하니 내 목숨을 끊음으로 정의를 실현하겠네."
"박형, 교수대에 자네가 죽는 것을 나도 찬성을 하지 않네."
"내 목을 저들에 맡기는 굴종적인 노예가 되지 않겠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죽음보다 저들의 더러운 손에 내 목숨을 맡기는 것이 싫네. 왜노(倭奴)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단식하여 내 생명은 내가 끊어버리겠다고 결심했네."
"그러하다면, 나도 찬성하네."


최천택은 박재혁의 결심을 어찌할 수 없었다. 찬성은 했지만, 친구의 죽음이 멀지 않음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일본인 관리에 죽임을 당함은 나의 본의가 아니네. 대한 남아로서 내 목숨을 스스로 거두어 저들의 잘못을 내 죽음으로 다시 알리고 싶네. 죽어서도 나라의 자주독립을 끝까지 염원하겠네."

박재혁은 기침을 콜록거리면서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굴종적 죽음보다 자유인으로 죽기를 원했다. 죽음까지 식민지 주인인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순국함으로 마지막 항거를 하고자 하였다.
  
나의 죽음을 민족해방 제단에 바친다 
 

박재혁의 도장 현존하는 박재혁 의사의 유일한 유품인 도장이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발견되었다. - 사진 제공 이손녀 김경은 ⓒ 김경은

 


대구 형무소 창살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별이 반짝이는 밤이었다. 박재혁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죽음을 결심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 27년의 세월이 한순간임을 깨달았다. 박재혁의 삶에 가장 빛나는 날은 부산경찰서 투탄의 시간이었다. 별이 되는 날이었다. 어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기로 했다. 보낼 수도 없는 독백의 편지였다.

어머니!
제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어머님이 끓여주신 미역국 먹던 날이 생각납니다.
이제 저는 어머님 곁을 떠납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갑니다.
제가 떠난 뒤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슬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울지 마십시오.

어머니!
대한의 아들로 태어나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당당하게 죽으렵니다.
저 간악한 강도 같은 왜놈들이 이 땅에서 집어삼킨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어린 날에 일본이 부러웠습니다.
그들의 문명이 행여 우리의 문명이 되리라 기대했습니다.
나라의 위부터 아래까지 부패하여 희망이 없는 대한제국이었습니다.
전통과 개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문명은 와해하였습니다.
민족은 쇠약하여 애국심도 고갈되기 직전이요, 관료는 부패가 극에 달하였지요.
희망을 아무리 짜고 짜도 나올 듯하지 않은 혼돈의 시절이었지요.
외국의 간섭이 유일한 희망인 듯 보였습니다.
힘없는 나라를 힘 있는 나라가 개화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일본의 놀랠만한 진보 발전은 커다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은근 일본이 통치해주기를 바라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친일 매국노는 합방이 당연하다고 박수하였습니다.
박수는 아닐지라도 욕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
하지만 10년 세월이 지나자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오해 망상을 참회하고 땅을 치고 통곡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칼 찬 교사 일본어로 수업하고 일본어로 교과서를 만들고 일본어 과목을 배웁니다.
우리말 우리글 우리 역사는 있지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한국의 정신 우리의 혼이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우리 땅의 쌀은 저들의 쌀이 되었습니다.
동양척식회사가 잠입하는 곳에는 반드시 한국인은 축출을 당하였습니다.
조선 놈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면 태형(笞刑)으로 살상의 통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면서 검열은 한 자 한 구절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경축일만 되면 길거리 상점마다 강제로 일본 국기를 게양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은행에서 돈을 찾아도 내 돈인데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정치의 자유, 교육의 자유, 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도 없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 한국의 공기조차 맘대로 쉴 자유가 없습니다.
저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한 일이란 우리의 고혈(膏血)을 짜서 일본으로 가져간 일뿐이었습니다.

어머니!
우리는 동화(同化)하기를 원하지 않아요!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살고 싶어요!
우리의 언어, 풍속, 습관, 종교, 우리 고유의 문화를 따르며 살고 싶어요!
저들 제국의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
삼천리강산 이천만 동포들이 노예 아닌 노예가 되었습니다.
왜놈이 지배한 이래로 우리의 삶은 비극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기미년 만세 소리가 삼천리강산 곳곳마다 청천벽력같이 울렸지요.
합병 이후 무기란 무기는 모두 빼앗겼지요.
하지만 한국인은 열 배 천배 이상의 용기를 가지고 외쳤지요.
모두가 맨주먹 전사(戰士)가 되어 두 팔 자유롭게 펼치며 마을마다 골목마다 다녔지요.
양반도, 상민도, 남녀노소, 학생도, 종교인들도 모두가 하나같이 외쳤지요.
친일 모리배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외쳤지요.
산을 넘고 강을 넘어 바다 건너 만세 소리가 울렸지요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가 어디 우리 땅에서만 울렸나요,
바다를 건너 일본에도 구라파에도 미주에도 울렸답니다.
한국인의 자유를 향한 절규는 세계 곳곳에 약소국 식민지 백성들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요.
10년 동안 유린당하였던 자유와 정의를 외쳤지요.
오랫동안 참고 견디어온 분노를, 원한을 마음껏 드러내었지요.
어머니,
대한 독립 만세!
그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이 역사적 순간을 저는 내 나라 땅에서 하지 못하였습니다.
원통합니다.

어머니!
우리 땅은 우리 스스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주야로 소원하는 바는 바로 '독립'입니다.
한국인에게 독립은 이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우리의 멱살을 잡고 놓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왜놈들이 우리에게 공헌한 점은 딱 하나가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독립의 꿈을 주었고 투쟁적 정신을 주었고 대동단결을 하게 하였습니다.

어머니!
독립운동의 전선에 물러서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독립을 얻기 전까지 최후의 한 사람까지 결코 투쟁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불의무도(不義無道)한 저 강도 왜놈들을 그대로 참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상해에서 기미년 만세운동으로 독립이 되지 못함을 깨달았습니다.
파리강화회의에 갔던 김인태가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지만, 강대국은 외면했습니다.
세계 문명국들도 저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강도 일본과 한패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다 함께 손잡고 세계 평화와 약소국의 해방을 위해 발맞추어 나가야 하지만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우리의 독립은 우리의 손으로 이루는 것이지 남의 손을 빌려 이룰 수는 없습니다.
강도 일본과 총칼로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군대가 없다면 단신으로 의열의 정신으로 온몸이 폭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렬하게 저들의 심장부에 제 한 몸 불사르리라 다짐하고 다짐하였습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늘 저를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어머니, 더 많은 누이동생의 눈물을 조금이라도 멈추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부산경찰서에 투탄하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었지만 끝내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이 약해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잔혹한 왜놈에 애국심도 고갈될 수 있습니다.
저는 등잔불에 붓는 기름이 되렵니다.
그리하여 독립의 불길이 해방되는 그 날까지 꺼지지 않는 마중 기름이 되렵니다.

어머니!
꿋꿋하게 견디세요.
저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저들의 잔악함에 분노하십시오.
저는 민족해방의 제단에 감히 저를 바치기로 했습니다.
생명이 사라진다는 것, 죽어 사라짐은 분명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저 왜놈들에게 내 목숨을 맡기는 것은 더 치욕입니다.
저들에 사형당하느니 차라리 제 손으로 제 목숨을 끊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살하여 저를 지옥에 보낸다고 하여도 절대 왜놈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렵니다.

어머니!
그러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백 년을 살기보다 단 하루라도 조국의 해방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내 이름 석 자에 오욕을 남기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민족해방의 그 날이 나로 인해 하루라도 당겨진다면 더덩실 춤을 추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신라 황창랑(黃滄浪)처럼 나의 죽음 뒤로 수많은 황창랑이 생길 겁니다.

어머니!
절대로 절대로 민족해방이 되기 전에는 죽지 마세요.
나는 비록 짧은 생애이지만 어머니 생애는 고래 심줄 같아야 합니다.
두 눈 부릅뜨고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기다려주세요.
나의 죽음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지켜봐 주세요.
저는 죽어서도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켜보겠습니다.

어머니!
정공단 친구들에게는 절대로 죽지 말라고 해주세요.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끝까지 살아서 해방의 그 날을 맞이하라고 하세요.
한 번의 독립운동으로 독립, 해방은 날은 오지 않으니 끊임없이 투쟁하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친구들에게 정공단의 정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만수무강하세요.
사랑하는 어머니.


박재혁, 1921년 5월 11일 순국하시다

1921년 5월 11일. 박재혁은 최천택이 면회를 하고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순국하였다. 대구 감옥에서 시체를 가져가라는 전보를 받았다. 급거(急遽) 대구에 가보니 박 의사는 자진(自盡) 절명(絶命)한 뒤였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다.

박재혁의 제적부에 따르면, 박재혁은 대정10년(1921) 5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대구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5월 11일이 사망일로 나왔다. 다른 신문에는 5월 13일 또는 14일을 순국일로 기록하였다.

<한민족독립운동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사>는 박태원의 기록에 따라 투탄 9일 후인 9월 22일 단식 순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충원 비석에는 4월 23일로 새겨져 있었다. 5월 12일 사망 보도는 해방 후 1946년 3월 1일 박재혁의 추모제를 보도한 <민주중보>였다. 아마 기록 대부분은 이 신문 보도를 사실로 받아들인 듯하다. 당시 신문 보도는 최천택의 증언에 따른 것이었다. 부산어린이대공원 박재혁 동상, 부산진초 비석에도 순국일을 5월 12일로 기록되어 있다.

순국일을 4월 23일로 기록한 현충일은 2020년 투탄 100주년을 맞이하여 5월 11일로 수정하였다. 이런 오류는 당시 신문이나 박재혁의 제적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이다. 순국 100주년이 되는 현재도 박재혁의 기록은 오류가 몇 가지 있다. 뻔한 오류를 수정하지 않은 것은 고인에 대한 모욕이다.
 

박재혁 제적등본과 동아일보 사망 보도 박재혁은 공식적으로 1921년 오전 11시 20분 사망하였다. 당시 신문에는 단식 순국이 아닌 병사(病死)로 보도하여 박재혁 의사 최후의 항거를 왜곡하였다. ⓒ 이병길

 
당시 <동아일보>는 박재혁이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 감옥으로 가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중에, 그전부터 신음하던 폐병(肺病)으로 지난 11일에 감옥에서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하였다. <매일신보>나 <독립신문>도 폐병으로 사망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일제는 박재혁이 단식으로 순국한 사실이 알려지면 당시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있을 수 있기에 폐병 죽음이 원인이라고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설사 폐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하더라도 박재혁 의사가 왜적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기보다 스스로 자진 순국을 선택한 것이 더 중요하다. 그의 단식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단연 신문은 아사(餓死)나 자진(自盡) 절명(絶命), 순국(殉國)보다 병사(病死)로 보도하였다.

박재혁의 노모가 대구 감옥에서 온 전보를 가지고 최천택의 집(좌천동 496)에 찾아왔다. 박재혁이 단식 끝에 11일 새벽 5시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서둘러 박재혁 노모와 함께 시체를 인수하러 대구 감옥에 갔다. 이때 한 간수가 통곡하면서 최천택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박 선생님은 자기의 명을 알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실은 오늘 12시에 박 선생님을 사형하라는 일본 사법성의 전보가 왔습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5월 11일 박재혁이 대구 감옥에서 사망하였다는 소문들은 모씨가 유족 되는 박재혁의 모친을 방문하였다. 박재혁 집은 본래 형세가 빈한하여 곤란하게 지내는 중에 뜻밖에 자기 아들의 일을 당하여 걱정으로 세월을 보내며 그 아들이 방면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모는 오늘 이 같은 급보를 접하였다고 자기 팔자만 한탄하며, 한편으로 장사를 준비해야 하는 데 돈 한 푼이 없다고 하였다.

박재혁의 영구는 기차에 실려 14일 하오 고관역(부산진역)에 도착했다. 부산진역은 호국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남녀노소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부모와 기타 친척, 친구들이 다수히 나왔고, 부산경찰서에서도 경관 몇 명이 출장하여 엄중히 경계하였다. 경관들은 두려운 듯 폭탄 범인의 시체까지 경계하였다. 과부(寡婦)의 독자(獨子) 박재혁의 노모는 정신을 상실한 듯하였다. 부산진(釜山鎭)에 있는 박재혁의 본가를 방문하니 과수의 몸으로 어려운 살림으로 더불어 싸워가며 다만 하나인 외아들 재혁을 길러서 늙게 영화나 보려 하던 그의 노모는, 눈물을 흘리며 기자를 붙들고 정신을 수습지 못하며 말하였다.

"행여나 자식이 방면되기만 바라고 있다가 천만뜻밖에 이 지경이 되고 본즉 참으로 하늘이 무너진 듯합니다."

노모의 우는 정경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박재혁은 오늘날 증대산성 인근에 있었던 좌천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목비로 '박재혁지묘'라 세웠다.
 

해방 후 박재혁의 무덤 앞에서 오택 - 해방 후 박재혁의 무덤 앞에 앉은 오택- 부산진 공동묘지는 현재 좌천동 증대산성 주변이었다. 박재혁의 묘지 사진 상단의 박재혁 사진 밑의 문자는 <4253.5.12.>로 박재혁의 사망일, 아래는 <을미 5월 17일생>은 박재혁 출생일이다. 오택도 박재혁의 순국일을 잘못 알고 있었다. - 출처 부산출신독립투사집(김삼근, 1982) ⓒ 부산출신독립투사집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부산경찰서 #박재혁 #의열단 #오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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