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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업이 설마 농협보다 더 지랄같것나"

[프로골퍼의 좌충우돌 마을기업 도전기 4] 갑론을박

등록 2021.05.31 07:30수정 2021.05.3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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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나와 남편이 마지막으로 밤을 출하한 날이 10월 15일이었다. 그날 우리는 이틀 동안 산을 헤매고 다니며 모은 밤을 농협에다 내고 10만 7600원을 받았다. 말없이 1t 트럭을 운전만 하던 남편이 내게 물었다.


"우리가 얼마 동안 다람쥐로 변신한 거지?"
"9월 3일부터 밤 주웠으니까, 43일째네."
"코인은 얼마나 채굴했어?"
"오늘까지 더하면 이백. 육십. 칠만. 사천. 오백 원."

 

우리 부부의 2020년 마지막 밤출하명세서 ⓒ 노일영

 
운전대를 잡은 남편의 얼굴이 갑자기 이상하게 굳어졌다. 호탕하게 껄껄거리려고 했는데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내게 쿨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안면 근육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우리의 노동량과 수입이 조화롭지 못한 비례 관계에 있듯이 남편의 마음과 육체도 따로 노는 듯했다. 어쨌든 남편은 약간 괴상하고 가엾은 표정을 얼굴에 방치해 놓고, 그리고 나도 남겨 두고, 별안간 다른 세계로 넘어가 버렸다. 차 안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소심하고 겁 많은 내가 마을기업을 한번 해보자는 남편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한 건, 남편의 그 복잡한 표정 때문이었다. 슬픔과 불안을 잘 버무려서 절망의 깊은 맛을 진하게 우려낸 뒤 (시골살이는) 바로 이 맛이야, 라고 외치는 그 얼굴. 온갖 혼란스러운 감정들의 무늬로 아로새겨진 바로 그 얼굴 때문이었다.

집 앞에다 트럭을 세운 남편은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마을기업 할 거지?"


남편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동네에서 처음으로 마을기업을 해보자고 권유한 귀농인의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멀어져 가는 남편의 뒷모습에다 대고 내 귀에도 안 들리게 싫어, 라고 고함을 질렀다.

마을 회의 소집

2020년 10월 20일에 '2021년 경상남도 마을기업 모집 공고'가 함양군청 홈페이지 군정소식란에 떴다. 모집 공고의 첫 부분에 나오는 문장이 마을기업이라는 사회적경제 기업을 간략하지만 거의 완벽하게 정의하고 있었다. 그 문장은 이러하다.
 
경상남도에서는 지역 주민이 각종 지역 자원을 활용한 수익사업을 통해 공동의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소득 및 일자리를 창출하여 지역 공동체 이익을 실현할 마을기업을 아래와 같이 모집합니다.

마을+기업에서 마을이 의미하는 공동체성·공공성·지역성 등은 지역 주민, 지역 자원, 지역 문제, 공동체 이익 실현이라는 말들로 드러나고, 기업이 뜻하는 이윤 추구·기업성·기업가 정신 등은 수익사업, 소득 및 일자리 창출 같은 단어들로 명확하게 설명된다.

어쨌든 모집 공고를 보니 마을기업 사업신청서 접수 기간은 2020년 10월 21일부터 11월 3일까지였다. 나와 남편이 마지막으로 농협에 밤을 출하한 날이 10월 15일이었으니, 사업신청서를 작성하기에는 시간이 좀 빠듯했다. 더구나 마을기업 관련 서적을 몇 권 읽은 것 이외에는 사업신청서에 관해 우리가 준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10월 21일에 마을 회의를 소집했다. 우리 마을만이 아니라, 소문을 듣고 다른 마을에서도 밤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참석하는 바람에 마을회관에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내가 살고 있는 음천 마을을 중심으로 내천과 양천 마을의 농부들도 참여한 것이다. 모집 공고가 발표되고 바로 다음날 회의가 열린 것은 마을기업을 시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민들의 의견을 빨리 들어 봐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남편과 마을기업을 제안한 분이 마을기업에 관해서 개괄적으로 설명했고, 토론이 이어졌다. 사회적경제 기업인 마을기업은 나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도 생소한 개념이라 짧고 부족한 설명만으로는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 영농조합법인인동 뭔동 한다 캐가꼬, 출자도 하고 인감도 찍어줬다 아이가, 근데 돌아오는 거는 아무꺼또 없더라꼬. 니미, 출자증서도 몬 받아가꼬···."
"마을기업에 선정되고 나면, 우리는 법인을 설립해야 합니다. 저희는 영농조합법인이 아닌 협동조합으로 법인을 설립해야 합니다."

"영농조합법인인동 협동조합인동, 그게 그거 아이가. 뭐가 다르다꼬."
"네, 그래도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출자금에 상관없이 조합원이면 누구나 1인 1표의 의결권과 선거권을 가진다고 법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주민들이 함께 일하고 공동으로 소유하는 회사를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랄 염병하고 자빠졌네. 마을기업인동 뭔동 회사를 차리뿌먼, 창번이 저 양반이 또 한자리 해묵을라꼬 사람들 술 사주고 밥 멕이고 별 지랄을 다 떨낀데. 그카고 나먼 그 회사는 창번이 저 양반 꺼가 되는 거 아이가."
"마을기업은 그런 식으로 운영되는 방식은 아니구요. 대표는 무기명투표를 통해 투명하게 선출할 거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내는 돈 안 받고 곁가지로 거들어줄 수는 있는데, 출자금은 몬 낸다. 너거가 띠묵을지도 모르는데 뭘 믿고 돈을 맡기노."
"이노무 영감 할마시들아, 고마 쫌 캐라. 여기 젊은 양반들이 동네 살리 보겠다꼬 저캐 샀는데, 도와주지는 몬하고 생지랄을 다 해샀네. 나는 할 끼다. 나도 마을기업인동 뭔동 해가꼬 손자놈이 사달라 카는 게임기 쫌 사줄란다."

"나는요, 합니다. 마을기업 하자 카는 저 양반이 측량을 해가꼬 내 땅을 빼사 갓다 아임니꺼. 저 양반이 마을기업인동 지랄인동 할라 카는데, 무신 꿍꿍이가 인는동 내가 감시를 쫌 해야겠다 이 말 아임니꺼."
"밤을 쪼물딱거리가꼬 묵는 거로 만들먼, 우리가 농협에 밤 내는 거보다야 뭐 목돈은 안 만지것나. 나도 할란다. 올 가을에 농협에 밤 내고 나이까네 살기가 싫어졌다 아이가. 마을기업이라 카는 기 설마 농협보다 더 지랄같것나."

"아이구야, 중평댁까지 한다 카이까네, 우리 박 영감도 해야것네. 박 영감은 밤마다 중평댁 들락거리는 밤 고양이 새끼 아이가. 박 영감도 할 끼제?"
"김 영감 저 쌔끼는 중평댁 얘기만 나온먼 꼭 내를 찍어 붙이네. 욕본다, 이노무 쌔끼야. 우쨌든 무조건 내도 한다. 중평댁하고 상관없으이까네 괜히 갖다붙이지 말고, 이노무 쌔끼야."
"저노무 박 영감이 한다 카이까네, 나는 절대 안 한다. 밤으로 황금을 만들 수 있다 캐도, 나는 저 영감탱이하고는 같이 안 한다. 너거끼리 잘 묵고 잘 살아삐라."


2시간 정도 회의를 하고 나니, 마을기업 회원으로 참여하겠다는 주민이 18명으로 결정되었다. 지리산의식주연구회는 법인이 아니라서 1차년도(신규) 마을기업으로 지원할 수는 없고, 예비 마을기업에 도전해야 함을 밝히고, 다음날인 10월 22일부터 예비 마을기업 사업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내가 넣고 싶었던 정관 2조

지루할 수도 있는 얘기를 잠깐 해야겠다. 내가 '좌충우돌 마을기업 도전기'라는 글을 쓰려고 마음먹은 것은, 현재까지 우리 조합이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전문가들도 예측하지 못한 실수까지 모조리 저질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준비한 실수 종합선물세트를 받아들면 어느 순간 슬그머니 올라간 입꼬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에 처음으로 과자 종합선물세트를 손에 쥐게 되었을 때처럼.

앞으로 나는 우리 협동조합이 진행할 밤 가공식품의 개발과 판매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자세하게 '좌충우돌 마을기업 도전기'에 기록할 생각이다. 이제 곧 전개될 마을기업 활동에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기상천외한 실수와 착오가 발생할 것이라 예상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합이 이미 저질렀고, 조만간 범하게 될 다양하고 황당한 오류와 실수, 잘못을 호호, 깔깔거리며 즐겼으면 좋겠다. 다만 즐기시되 우리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기를 희망하기에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것은 공동체의 구심점을 잃고 경제적 위기에 빠진 농촌의 작은 마을들을 되살리려면, 협동조합이나 마을기업을 통해 공동체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농촌의 코딱지만 한 동네에서도 협동조합이나 마을기업 같은 사회적경제 기업 활동이 펼쳐진다면, 머지않아 주민들이 들판에 핀 코딱지나물(광대나물)의 보라색 꽃들을 함께 음미하는, 어느 평화롭고 넉넉한 봄날을 맞이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은 마을기업과 협동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점잖게 시행착오라고 쓰고 개고생이라고 읽어야 할 경험을 많이 했다. 마을기업 사업신청서를 작성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지만, 협동조합 설립을 준비할 때는 잘못 작성한 서류를 하루 종일 찢어발기느라 손톱이 빠질 지경이었다.

사실 협동조합 설립을 준비할 때 서류를 법무사에게 맡기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 조합의 출자금이 쥐꼬리보다 짧아서 법무사에게 지불할 여윳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세 번째 이유도 없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 하는 게 이 바닥 혹은 이 세상의 생리. 잘못 작성한 서류를 그냥 기계처럼 찢고 찢고 또 찢었다. 그때 알았다. 한 사람도 아니고 거의 모든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거구나.
 

지리산의식주연구회의 협동조합 정관 작성 모습 ⓒ 노일영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협동조합의 정관을 우리 조합원들의 손으로 직접 정리하고, 창립총회를 열어서 정관 승인과 임원 선출 등 여러 가지 안건들을 심의·승인하는 과정을 절차대로 진행했다. 조합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직접 만든 우리 조합의 정관 제1장 제2조를 보자.
 
제2조(목적)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은 자주적·자립적·자치적인 조합 활동을 통하여 구성원의 복리 증진과 상부상조 및 지역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에 기여하고, 조합원이 생산과 판매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조합원의 소득을 증대시키고, 지역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어디서 많이 본 서류용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 느낌, 맞다. 다른 협동조합들의 정관에서 그럴싸한 문장이란 문장은 다 끌어왔으니까. 사실은 제2조(목적)에 이렇게 쓰고 싶었다.

'조합 활동을 통하여 마을 식당을 열어서 매 끼니 걱정에서 주민들을 자유롭게 만들고, 실직을 한 무산댁 아들에게 밤 가공식품 관련 일자리를 주고, 소평댁 손자에게는 제일 재미난 게임기를 사주고, 측량으로 땅을 잃어버린 이현승 씨에게는 밭 백 평을 기부하고, 공동 작업을 파괴로 몰아간 문제의 잃어버린 낫을 대신해서 김 영감 아저씨에게 낫 100개를 선물하고, 중평댁과 박 영감 아저씨 사이의 '썸'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정관의 제2조(목적)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작성할 수는 없었다. 협동조합의 정관이란 것이 그래도 공적인 문서니까. 그래서 다른 협동조합들의 정관을 기웃거렸고, 아무리 둘러봐도 거기서 거기인 내용 중에서 대략 의미가 통하는 문장들을 짜깁기했다. 다른 협동조합들은 어떤 방식으로 정관을 만드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마을기업 사업신청서에 관한 내용과 우리 조합의 신청서 작성 경험을 얘기하고 나면, 협동조합 설립과 관련된 그 많은 서류와 의사록 공증, 설립 등기, 사업자등록 등 모든 절차에서 우리 조합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오류를 숨김없이 공유할 예정이다. 그러니 다시 마을기업 문제로 돌아가 보자.

지리산의식주연구회는 10월 22일부터 예비 마을기업 사업신청서 검토·작성에 들어갔는데, 서류 작업을 마친 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서류 작성만으로도 숨통을 죄는 극한의 육체적·심리적 고통이 발생 가능하다는 것과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보니 사업계획서는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놈이었다.
덧붙이는 글 노일영 기자는 프로 골퍼로 KLPGA 정회원입니다. 현재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 이사장과 마을기업 대표, 함양군 백전면 음천마을 이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주간 함양>에도 실립니다.
#마을기업 #협동조합 #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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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다가 함양으로 귀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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