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월동 묘역, 41년 전 그 거리에 선 기분입니다

등록 2021.05.17 15:58수정 2021.05.17 16:1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김창승


이팝나무는 이미 지고 없었다. 망월동 묘역에는 궂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때도 이른 꽃은 오늘처럼 빨리 졌고 눈물 같은 비가 내렸다. 41년 전 그날의 그 거리에 나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노란 리본에 마음을 썼다.

'5·18 그날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21살 도망자의 고백이다. 그날 금남로 거리를 떠나온 이후로 몸은 낯선 골목 유배진 곳에 있었으나 마음은 늘 그 골목에 있었기에 오월이 되면 온몸이 아팠고 괴로웠다. 마음에 새겨 긴 수인 번호처럼 그날을 기억하며 살았고 그날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 김창승



분향탑을 지나 용기를 내어 묘역으로 들어섰다. 41년만의 만남이다. 박현숙, 박관현, 박금희, 강해규, 이광술, 윤상원, 박기숙, 최미애, 김완봉, 전재수… 그때 뜨거운 오월 광주 어떤 거리에서 함께 했던 이름들이다.
 

ⓒ 김창승

 
얼굴 없는 무궁화 영정이었던 전재수 열사는 지금 나이로는 52살,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박현숙, 박금희 열사는 지금은 60살, 중학생이었던 김완봉 열사는 55살, 당시 임신 8개월의 스물여섯이었던 최미해 열사는 67살, 전남대 학생회장으로 민주화 횃불 성회를 주도했던 광주의 아들 박관현 열사는 68살, 끝까지 광주의 오월을 지킨 시민군의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는 지금 살아있다면 71살이다.

무겁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참회의 참배를 했다. 민주의 문 앞쪽 이팝나무 아래에는 전재수의 형, 재룡씨가 손수 쓴 글이 걸려 있었다.
 
재수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형을 잘 따랐던 동생이다. 며칠 전이 마침 봉급날이어서 어머니께 재수 고무신 한 켤레 사주라 했다. 재수는 1980년 5월 24일 오후 1시 광주 남구 진월동 마을 동산에서 친구들과 놀다 참변을 당했다. 당시 11공수여단은 광주 외곽에 있다가 재 진압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이때 아이들이 "군인 아저씨, 군인 아저씨" 하면서 손을 흔들었는데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효덕초등학교 4학년이던 재수는 총소리에 놀라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다 아버지가 생일선물로 사준 고무신이 벗겨져 주우러 돌아섰다가 총에 맞아 숨졌다.
 

어릴 때 이렇게 사망한 재수 군은 사진이 없어 묘비에 영정사진 대신 무궁화를 새겨 넣은 '얼굴 없는 희생자'로 남아 있었다. 그의 형 재룡씨는 2021년 1월 부친의 기일을 맞아 아버지가 남기신 유품과 사진 앨범을 정리하다가 전군이 나온 가족사진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8년 전군의 초등학교 입학을 기념해 새 옷을 입은 재수 군과 아버지, 고모 3명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 한 장으로 2021. 5. 5일 어린이날 재수 군의 얼굴 없던 무궁화 영정은 얼굴 있는 영정이 되었다.

재수를 유난히 사랑하셨던 그의 어머니는 1984년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2000년 64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셨다. 거의 모두가 그랬다. 본인만 죽은 게 아니었다. 부모님이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형제나 자매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 김창승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희생자 898명 중 얼굴 사진 대신 무궁화 사진이 걸려 있는 묘비는 모두 48개다. 재수 군과 같은 5·18 학생 희생자는 17명, 미성년 실종자는 15명이다. 이들 부모님과 형제도 재수 군의 경우와 같을 것이다.

1980. 5. 18 그날로부터 41년이 흘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고 했다. 어찌 그들만의, 유가족만의, 광주만의 아픔이겠는가. 시대에 눈 맞추고 세대와 발맞추는 함께하는 오월이어야 한다. 아픔을 넘어 통일과 평화의 오월이 되기를 소망한다.

저 멀리서 아픈 소리가 들려온다. 미얀마! 5월과 똑같은 미야마! 그때 우리는 '하느님도 새 떼도 없는 광주'라 절규했다. 그들도 그럴 것이다. 그들의 아픔과 피 흘림에 마음이 아프다. 아, 꽃도 너무 아픈가 보다. 그래서 망월동 쌀밥 꽃은 이렇게도 빨리 저버렸나 보다.

#모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지리산 아래, 섬진강가 용정마을로 귀농(2014)하여 몇 통의 꿀통, 몇 고랑의 밭을 일구며 산골사람들 애기를 전하고 있는 농부 시인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