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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친정아버지를 잃은 어머니는 똥장군을 졌다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진주유족회 이야기] 아버지 정한석의 신원 바라는 정영우

등록 2021.05.24 09:10수정 2021.05.2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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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진전면 여양리 유해 수습 모습 ⓒ 박만순

 
[기사 수정: 28일 오전 11시 15분]

1967년 논산훈련소에 입대한 정영우(1945년생)는 신병훈련을 마치고 춘천 102보충대로 갔다. 춘천 102보충대는 신병에게 주특기를 정해주었는데 정영우는 '610'을 받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100(보병)이었다. 정영우는 강원도 홍천의 '제1야전수송교육대대(야수교)'로 보내졌다. 야수교는 운전병을 배출하는 곳으로, 610은 '수송' 업무를 뜻했다.

그곳에서 11주간 후반기 교육을 받은 정영우는 정작 11사단(홍천) 자대 배치 때는 운전병이 아니라 보병으로 배치됐다. 당시엔 '운전병 하려면 논 몇 마지기를 팔아야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정영우가 "집에 논이 없심더"라고 말하자 뺨따구가 돌아왔다. 그런 후 일선 대대 보병으로 배치됐다.

우여곡절 끝 자대 배치를 받은 그에게 방첩대(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에서 찾아왔다. 아버지 관계를 물었다. 그는 솔직히 말했다. "6.25 때 돌아가쎴슴더"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되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방첩대원들은 이미 알고 왔다. 그들은 "착실히 군생활 하라"고만 했다. 베트남 전쟁터는 신원 조회 때문에 갈 수 없었다.

사위와 장인이 모두 죽었다

정영우의 아버지 정한석(1919년생)은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건너가 일본 제철소에 입사했다. 조선 땅에서 먹을 것이 없어 일본과 만주 등지로 봇짐을 싸던 때였다. 그곳에서 해방되던 해 아들을 낳고 영우라 이름지었다. 정한석은 입이 귀에 걸렸다. 그렇게 정한석이 만주에서 알콩달콩 살 때 해방이 되었다.

해방 며칠 전부터 만주 지역에도 B29 폭격이 있었다. 공습경보가 울리면 사람들은 부리나케 방공호로 뛰었다. 몇 차례 B29 폭격 후 드디어 해방되었고, 조선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정한석도 짐을 싸 귀향했다. 경상남도 진양군 지수면 금곡리 필동마을에 돌아온 정한석은 아버지가 일반성면에서 운영하던 한약방 일을 돕기도 했다.


만주에서 돌아온 정한석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경위는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보도연맹에 가입된 후 그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진주 시내로 나가 '보도연맹원 교육'을 받았다. 보도연맹원 교육은 반공강연을 듣거나 제식훈련을 받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1950년 6.25가 터졌고, 지서에서 "보도연맹원 교육이 있으니 전부 지서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정한석은 아무 의심 없이 지서로 갔고 그날로 진주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가 집에서 나간 지 3일 만에 '진전면에서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정한석 집안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장인 김영철도 예비검속돼 죽임을 당했다. 김영철(진양군 이반성면 발산리)은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에 군자금을 지원하던 이로 이반성면의 유지였다. 그런 그가 한국전쟁 발발 후 예비검속 대상이 돼 마을 초입에서 무참히 학살되었다. 그는 사망한 지 반백 년이 넘어서야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다락에서 몇 개월을 지낸 이

정한석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산시(현 창원시) 진전면 여양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사람이 있다. 진양군 대곡면 마진리의 이병학은 진주형무소에서 진전 방향으로 가는 트럭에 실려 있었다.

손목이 묶인 그가 여양리 현장에 도착하자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잠시 후 군경의 총소리가 났다. "탕탕탕" "드드드" 콩 볶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병학은 동물적 감각으로 총소리가 나자마자 엎드렸다. 목 뒤에서 검붉은 피가 떨어졌다. 뒤통수나 목에 총 맞았다고 생각한 그는 혼절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깨어난 이병학은 자신이 숨을 쉰다는 사실이 희한했다. 실제 그는 총에 맞지 않았다. 목 뒤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는 그 위에 있던 시신에서 흘러내린 것이었다. 이병학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파리떼가 극성이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이 묶이기도 했지만, '경찰이 지켜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방이 캄캄해지고서야 그는 조금씩 움직였다. 손목에 묶인 줄을 푸는 데 30분이나 걸렸다. 온몸이 저려왔다. 그는 주변 민가로 들어가니 주인 노인 내외가 기겁을 했다. 귀신이 나타난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르신예. 제가 쫌전에 쩌그 고개에서 죽다살았심더. 살려 주시믄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심더." 이병학을 안타깝게 여긴 주인 내외는 그를 골방에 숨겨주었고 먹을 것도 주었다. 다음날 새벽에 집 주인의 한복을 입은 이병학은 괭이를 메고 집을 나왔다. 그렇게 살아돌아온 이병학은 자기 집 다락에서 수개월을 보냈다. 자칫하다 또 끌려가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똥장군을 진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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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정영우 ⓒ 박만순

 
6.25에 남편 정한석과 친정아버지 김영철을 잃은 김기순은 무작정 넋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어린 아들 영우(1945년생)·영찬(1950년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김기순은 머슴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집에 남자라고는 어린 자식들뿐이라 농사는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모 심고 벼 베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똥장군을 져 밭에 뿌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재래식 화장실의 오물을 밭에 뿌려 거름으로 사용했다. 항아리로 된 똥장군은 균형을 잘못 잡으면 옆으로 기울거나 지게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옷에 똥물이 튀는 것도 예사였다. 성인 남성도 하기 힘들다는 쟁기질도 직접 해야 했다. 어린 아들 영우가 소를 잡아 이끌면 그녀는 뒤에서 쟁기를 잡았다.

정영우가 16세 때 호적을 들쳐보니 아버지 정한석이 '행방불명'으로 신고돼 있었다. 뒤늦게 그가 아버지 사망신고를 했고, 그제야 호적이 정정됐다. 성인이 돼 군대에 다녀온 정영우는 비닐하우스 농사에 전념했다. 고추, 수박, 메론 농사를 지었다. 2002년 태풍 '루사' 때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에서 유해가 드러났다는 소식에 현장으로 갔다. 저기에 아버지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눈시울이 앞을 가렸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아버지 정한석의 죽음이 밝혀졌지만, 정영우의 마음은 여전히 아프다. 젊디 젊던 아버지가 국가폭력에 목숨을 잃은 것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매년 찾아가는 진주 명석면 용산고개의 컨테이너 박스도 그를 우울하게 만든다. 아버지가 초라한 컨테이너에 모신 것 때문에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불러온다. 그의 상처를 어떻게 어루만질 것인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답해야 할 때다.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에서 나온 유해 ⓒ 박만순

 
#운전병 #만주 #B29 #보도연맹 #똥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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