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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출퇴근 3시간... 좋아서 그랬습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충만했던 출퇴근 길, 벌써 그립네

등록 2021.06.02 07:26수정 2021.06.02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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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제작부서에 몸을 담고 있을 무렵, 회사 앞 공원에서 간단한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차들을 피해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을 건너는데 나도 모르게 '꺄르르' 하고 웃었나보다. 그런 나를 보고 피디가 말했다.


"작가님, 여기 출근한 사람들 중에 작가님이 제일 신나 보여요!"

맞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는 출근하면 괜히 신이 났다. 내 방 하나 없는 집구석보다 내 책상이 놓여 있는 그 자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티 하나 나지 않는 집안일이 곳곳에 쌓여 있는 '집'보다 애쓰는 만큼 결과가 눈에 보이는 '회사'에 나와 있는 게 훨씬 좋았다. 출근해 있는 동안만은 누구 엄마, 누구 아내, 누구 며느리가 아닌 그냥 나여서, 그래서 신이 났다. 적어도 몇 달 전까지는 말이다.

살기 위해 일을 선택했다
 

마지막 출근길 티켓 ⓒ 백지혜

 
세월을 좀 더 거슬러 셋째를 낳은 지 백일도 채 안 돼 방송국으로 향할 때였다. 남편에게 젖먹이를 떼어놓고 꼭 그렇게까지 일을 하러 나가야겠냐는 지청구를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꼭 아이가 걱정돼서 했던 말은 아니었다. 훌륭한 돌봄 선생님이 대기를 하고 계셨지만, 남편은 처음부터 내가 일을 하러 나가는 게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던 내가 '회사를 옮기겠다'고 했던 날은 더더욱 알 수 없는 신경질을 냈다. 진주에서 창원까지 고속도로로 1시간을 넘게 달려 가야 했기 때문이다. 식구가 하나 더 늘어 지출을 줄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로에 시간과 돈을 뿌리면서까지 일을 하러 가겠다고 하는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신은 왜 내 일을 존중해 주지 않아?'


그저 속상했다. 교통비는 걱정하면서 일을 하면서 얻는 내 만족도는 왜 고려 대상에서 늘 후순위여야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비록 집은 엉망진창이 되고 내 몸 편히 뉘일 시간일랑 줄어들겠지만, 왕복 3시간 출퇴근길을 감당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오로지 나를 위한 길이었다.

나는 살기 위해 '일'을 선택했다. 한 발 물러서서 보니 그랬구나. 남편은 세 아이보다 나만 생각하는 내가 서운했을 수도 있겠다.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럼 출퇴근을 기차로 하겠다고, 한 달 생활비에서 내 교통비가 그렇게 부담이 되면, 좀 더 부지런을 떨어서라도 열차 시간에 맞춰 다니겠다고 했다. 남편은 그제야 영혼 없는 동의를 억지로 했다.

ITX(옛 새마을호)를 타면 50분, KTX를 타면 35분이면 창원엘 도착했다. 하지만 집에서 기차역까지 가는 시간과 역에 내려 방송국까지 가는 길까지 더하면 길게는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교통비도 저렴한 것만은 아니었다. 버스 타는 게 두 번, 기차 요금 매일 7천~8천 원씩. 왕복이면 교통비로만 30만 원을 훌쩍 넘겼다.

정규직이나 계약직도 아닌 프리랜서 신분이었기에 차비를 빼면 월급에선 정말 남는 게 없었다. '왜 그런 직장엘 다니느냐'라고 반문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걱정과 우려에서 하는 말이었지만 내 귀엔 들리지 않았다.

돈 벌려고 했으면 애초에 이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좋았고, 일을 하면서 얻는 성취감에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 만족할 뿐. 그 어떤 조건도 내겐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 24시간 중 출퇴근 시간이 무려 세 시간이나 됐다. 길어서 지루한 시간이 아니라 유일하게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그 시간이 내겐 너무 소중했다. 듣고 싶은 음악에 취해 보기도 하고, 미처 끝내지 못한 업무를 마무리하기도 하고, 피곤하면 잠시 눈을 붙이기도 했다.

퇴근해서 잠들 때까지 해내야 할 저녁상 차리기와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기에 앞서 미리 나를 위로하는 시간이랄까.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남은 집안일도 해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묘한 시간이었다.

나의 활기와 맞바꾼 가정의 평화

벌써 석 달 전 이야기다.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나를 충만하게 만들었던 출퇴근 시간이 사라졌다. 회사가 구조 조정을 하면서 팀 내 분위기가 와해됐다. 마음 맞는 동료들이 하나 둘 회사를 떠났고, 결국 팀은 해체됐다.

한참 창원으로 출퇴근하던 때를 생각하면, 최근 이사한 집에 작은 책상 하나를 만들어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 무척이나 아쉽다. 생기 있게 얼굴에 뭐라도 찍어 바르고 부리나케 집을 빠져 나가던 내가 그립고, 녹초가 되어 들어오지만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에 가슴만은 뜨겁던 그때의 내가 생각나서.

아쉬운 마음을 비웃기나 하듯 분명 좋아진 점도 있다. 아이들의 케어가 그 때 그 때 가능했고, 무엇보다 집이 정돈되어 갔다. 따뜻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고,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남편은 가장으로서 처음부터 이 지점을 고려해 반대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의 활기와 맞바꾼 가정의 평화, 씁쓸하기 그지없다.

언젠가 다시금 새로운 기회가 오면 또 직장이란 걸 찾겠지만 기차로 1시간 넘게 매일 여행 같은 기분을 내던 출퇴근 시간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기약 없는 그날이 꼭 다시 선물처럼 나타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출퇴근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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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6개월이란 경력단절의 무서움을 절실히 깨달은 아이셋 다자녀 맘이자, 매일을 나와 아이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워킹맘. 글을 쓰는 일이 내 유일한 숨통이 될 줄 몰랐다. 오늘도 나를 살리기 위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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