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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독립운동가 권오설, 낯선 이름이지요?

조선공산당 핵심청년 권오설의 과감성에서 시작된 항쟁

등록 2021.06.01 10:10수정 2021.06.0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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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의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인 권오설.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6월의 독립운동가, 권오설?

종종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접속해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누가 선정됐는지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6월의 독립운동가'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권오설·이선호·박래원·이동환 선생. 그 공적을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만세 시위로 일어난 학생 중심의 민족 독립운동인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주요 인물"로 정의내리고 있다.

1987년 6월 10일에 발생한 6월 항쟁은 널리 알려졌으나 서슬퍼런 조선총독부 통치 시절 1926년의 6월 항쟁은 대체 무엇이길래 민족독립운동이라고 정의한 것일까. 또 권오설은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을 통해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것일까. 호기심이 펜을 잡기에 이르렀다. 분명 국가보훈처가 설명한 자료 외에 더욱 풍부한 사료들이 있으리라.

독립운동에 있어서의 주류 해석

그 전에 먼저 가볍게 사고를 한번 환기해보자.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그 유명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상해에서 설립된 상해임시정부와 이를 계승한 해방 직전의 중경임시정부를 지칭한다. 국가 이념으로서는 조소앙의 삼민주의를 바탕으로 한 공화주의, 인물로서는 1945년 11월 제1, 2진으로 귀국한 김구, 김원봉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을 독립운동의 주류로 해석하고 전문에 반영한 것이다. 또한 3.1운동 이전 해외로 망명해 상해임시정부 설립을 초기 주도한 신민회의 망명가들, 예컨대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유동열, 안태국 등은 전부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들로서 후대들은 인식하고 있다.

3.1운동 이후 국내 상황


그렇다면 또 이런 '역사와의 대화'를 해볼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 주류에 대한 후대의 인식 틀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만에만 집중돼 있다면, 국내에는 운동과 인물들이 텅텅 빈 공간이 된 걸까. 아니면 있더라도 역사적으로 의미 없는 비주류로 평가받는 것이 마땅한 걸까. 이런 질문 말이다.

3.1운동은 생각보다 많은 파생을 일으킨 운동이었다. 운동 이후 급격히 고양된 민족의식은 상해에서 임시정부 설립을 추동하는 강력한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는 다양한 사조의 조직들이 결성되는 토대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 형태는 과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바로 민중혁명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이념이 수입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된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3.1운동은 이념적으로 공화주의 건설을 목표로 한 1911년의 중국 신해혁명만을 수입한 것이 아니라 노농정부 건설을 목표로 한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수입하기도 한 국제성을 띈 운동이었다.

바로 이 시기부터 1920~1940년대 국내에 '신(新)사상'의 위상으로 확산된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역사 인식틀에서 소외하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상당히 복고적이거나 왜소해진다. 또한 '그땐 어쩔 수 없었어' 정도의 패배론적 사고를 받아들일 여지가 생긴다. 이 글을 쓰는 취지의 하나는 그 여지를 방지하기 위한 것도 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

그런데 1926년 6․10운동과 권오설로 시작하다가 갑자기 왜 사회주의 독립운동이냐고? 국가기관인 국가보훈처가 '6월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하며 6․10 만세운동의 역사성은 고려해야 하는데, 권오설 및 3인의 대한 설명은 대단히 함축적으로 서술해놨기 때문이다. 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또 어차피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기에 권오설을 선정하는 근거 역시 부족했을 리 없다.

그러나 함축적인 설명 외에도 좀 더 흥미로운 대목들에 끌린다. 다음은 강만길·성대경 교수가 1996년 출간한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에 기술된 권오설을 보자. 약간의 축약이 있음을 미리 밝힌다.
 
1919년 풍서면 원흥학술강습회, 일직면 일직서숙에서 교사를 지냈다. 1923년 11월 풍산소작인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이 됐고 이 무렵 사상단체 화성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충산소작인회 대표로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꼬르뷰로(조선공산당 중앙총국) 국내부에 가입하여 노농총야체이까 책임자가 되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됐고, 12월 책임비서가 됐다. 1926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 돼 조공 당칙을 기초하고 고려공청 회칙을 작성했다. 그 해 4월 천도교 구파와 함께 6․10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선전물을 작성, 인쇄했다. 6월'제2차 조공 검거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고문 후유증으로 1930년 4월 17일 옥사했다.

 
무시무시한 문장의 나열들이다. 이 문장을 접하면 이성이 일시적으로 또는 장기간 혼돈에 빠지면서 복잡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니 국가보훈처는 분명 '민족 독립운동인 6․10 만세운동'이라고 했는데 이름도 살벌한 조선공산당의 핵심 인사가 6․10만세 운동을 계획했다고? 이거 독립운동 맞아? 하는 물음이 생길 수도 있다. 

6.10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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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이달의 독립운동 6월 포스터. ⓒ 국가보훈처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의 독립운동이 엄청난 첩보력과 물리력을 갖고 있는 조선총독부의 통치 아래 대부분 지하화 되고 소그룹화돼 산발적인 동맹휴학, 소작쟁의 수준으로 표출되면서 '이제 다 끝이야'라고 생각할만한 즈음 총독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자긍과 자존을 안기려던 사건, 1926년의 6․10항쟁의 서막은 그렇게 조선공산당의 핵심 청년 '권오설'의 과감성에서부터 출발했다.

비록 이 6.10만세운동은 사전에 첩보가 파악돼 전국적인 저항으로 확산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55개 학교의 동맹휴학으로 이어졌고, 현장에서 200명이 체포되는 등 아직도 국내에서 대중적인 규모의 시위를 기획할 내적 역량이 존재함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권오설과 6.10만세운동, 이 역사는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어디서 어디까지인가. 해방 전후 이념의 굴레와 분단은, 자존과 자긍을 갖고 당시대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노력한 '인간의 역사'를 마냥 부정할 수 있는 것인가.

그래도 권오설이 사망한 지 75년이 되는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고 2020년에는 6.10 만세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것을 보면, 또 마냥 부정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정말로 다행과 안도를 느낀다. 그렇게 독립운동의 역사를 계속 폭 넓게 확대해나가야 이 땅 인간의 역사가 더욱 풍부해진다.
#권오설 #6.10만세운동 #국가보훈처 #대한민국임시정부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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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생기면 항상 펜을 잡는 자유기고가. 시민단체 흥사단에서 이사로 활동했으며, 최근까지 국회 정무위원장 비서관으로 일했습니다. '근거있는' 소통의 공간을 열기 위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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