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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관총으로 겁박... 좌-우익이 함께 만세 불렀다"

[6·10만세운동 ①] 라종일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회장(가천대 석좌교수) 인터뷰

등록 2021.06.04 19:24수정 2021.06.04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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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6월 10일 개최되는 6·10만세운동 기념식은 지난해 12월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뒤 처음으로 치러지는 정부 주관 행사이다. <오마이뉴스>는 6·10만세운동의 의미와 주요 인물을 3~4차례 조명한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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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종일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장. ⓒ 권우성


"어렸을 때 들은 얘깁니다. 일제시대에 수공업을 하면서 야학을 열던 분인데, 어느 날 일본 순사가 와서 '야학 목적이 뭐냐?'고 물으면서 귀를 세게 잡아당겼답니다. 그 분은 그 자리에서 일하던 낫으로 자기 귀를 싹둑 잘랐데요."

라종일 (사)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회장(가천대 석좌교수)은 3·1운동에 비해 덜 알려진 6·10만세운동을 설명하면서 짧은 일화부터 소개했다. 라 회장은 "일제시대에는 이런 야학 선생님과 같은 분들이 수없이 많았다"면서 "특정 봉우리(사건)만 기억하지 말고 민중과 민초들의 바닥에 면면히 이어진 독립운동의 큰 산맥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립운동의 산맥을 봐야한다"

그가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1926년 6월 10일 융희황제(순종) 인산일에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국내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힌다. 하지만 일제가 만세운동의 의미를 축소했고, 해방 이후 좌익이 주도한 운동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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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10일 융희 황제(순종) 인산일 장면. ⓒ 사진제공 서울역사박물관


라 회장은 "좌우익이 이념을 초월해 공조한 6·10만세운동을 주목하는 건 독립운동의 거대한 산맥을 찾는 과정"이라면서 "소규모 저항도 발굴해서 '식민지 근대화론'과 같은 황당한 이야기를 제대로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뒤 처음으로 치루어지는 제95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을 앞둔 지난 5월 28일, 라 회장을 서울 장충동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그는 일제 치하의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고 제국주의 시대, 유럽 역사와 인문학을 넘나들면서 독립운동을 폭넓게 조망했다.

식민지 근대화? "우리말과 자주정신이 근대화 지표"

이날 라 회장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부터 비판했다.


"존 스튜어트 밀도 영국의 인도 통치가 문명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평가했어요. 엥겔스는 미국이 멕시코를 차지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했죠. 이렇듯 제국주의 시대에는 좌우를 불문하고 피식민지 근대화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3·1운동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우리는 문명국이고, 일본은 군사-침략주의 등 과거 때를 벗지 못한 나라로 그려집니다. 우리를 근대화시키겠다는 침략 명분을 없애버린 거죠. 일본 지식인은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 시기에 일어났다. 라 회장은 "일제가 무력으로만 지배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문화통치를 시작했는데, 민족 분열 책동 등 나쁜 면도 있지만 숨 쉴 공간이 조금 열렸다"면서 "교육 기관과 언론이 생겼고, 국어를 체계화할 기회가 열렸다"고 6·10만세운동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요즘도 옆에 끼고 읽고 또 읽는다"는 홍명희 작가의 '임꺽정전'을 근대화의 사례로 들기도 했다. "당시 창간한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일리아드 오디세이> 못지않은 훌륭한 민족 영웅 서사인 임꺽정을 만날 수 있었고, 매체가 생기면서 국어를 문자화된 문법으로 정리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라 회장은 해방 후 미군정 때 국어가 공용화된 배경을 예로 들기도 했다.

"일본인 관리를 그대로 썼던 미군정은 공용어를 일본어로 채택하려고 했어요. 그 때 우리가 맹렬하게 반대했더니, '한국에 문자가 있냐?'고 물었답니다. 문자가 있다고 하니, '그럼 문법이 표준화되고 용어가 정리돼 있냐'고 되물었답니다. 그렇다고 하니 미군정이 놀랬답니다. 결국 국어가 공용어로 채택됐죠. 우리를 근대화시킨다고 주장했던 일제는 우리말을 말살하려했지만 우리 스스로 근대화를 개척해간 겁니다."

3·1운동 때 놀란 일제, 6·10 앞두고 탑골공원에 기관총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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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 계획이 드러난 뒤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경계를 강화했다. 사진은 융희 황제(순종)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연도를 감시하는 일제 군경들. ⓒ 서울역사박물관


그는 또 산업화가 아닌 자주 정신을 근대화의 지표로 삼았다. 라 회장은 "일제 때 생긴 기차나 산업시설은 그저 수탈의 도구였을 뿐"이라면서 "근대화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건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자주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조선공산청년회 2대 책임비서였던 권오설이 쓴 6·10만세운동의 <격고문> 첫 문단에도 자주 정신은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일찍이 민족과 국제평화를 위하여 1919년 3월 1일, 우리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우리는 역사적 복수주의(復讐主義)를 반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들의 국권과 자유를 회복하려 함에 있다. 우리는 결코 일본 전민족에 대한 적대가 아니요, 다만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통치로부터 탈퇴코자 함에 있다. 우리들의 독립의 요구는 실로 정의의 결정으로 평화의 표상(表象)인 것이다.

하지만 이 격고문은 6월 7일경 중국 지폐 위조범을 쫓던 일경에 의해 발각됐다. 일경은 격고문을 인쇄했던 천도교 개벽사를 급습했고, 이 때 권오설 뿐만 아니라 사회단체 인사 200여명이 붙잡혔다. 불과 3일을 앞두고 6·10만세운동이 좌초될 위기였다.

사실 그 이전부터 일제의 경비 태세는 3·1운동 때와 사뭇 달랐다. 라 회장은 일제가 군대와 경찰 총동원령을 내린 삼엄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제는 광무황제의 국상을 계기로 일어났던 3·1운동 때 크게 놀랐어요. 융희 황제가 승하하기 전부터 경비를 강화했죠. 돈화문 앞에 임시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헌병, 기마 순사를 배치했어요. 탑골공원에는 중무장한 기관총 소대를 배치했죠. 전국 1만여 명의 군인을 집결해 서울을 포위했어요."

통치와 침략은 다르다

라 회장은 "통치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람들이 그 체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인데, 도둑놈처럼 총으로 강박해야만 유지하는 체계를 통치라고 볼 수 없다"면서 "강도짓을 자인한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개탄했다.

그는 일제의 만행을 영국의 인도 통치에 빗대어 비교하기도 했다.

"영국은 2개 사단 이상을 인도에 주둔시킨 적이 없어요. 동인도회사나 주둔한 영국 군대의 대부분은 현지인이었어요. 문화도 우리와 달랐죠. 비단 수건을 가지고 사람 목을 졸라 죽이면 죽은 사람이 천당에 간다는 종교, 죽은 남편을 화장할 때 기쁘게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야 훌륭한 여자라는 관습 등을 금지시켰어요.

벤담을 따르는 공리주의자들은 인도를 근대화하는 중요한 기반으로 근대적인 법전을 만드는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인도의 현실에 괴리되어 있었다는 것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좋은 예가 조지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라는 작품입니다. 영국인들의 생각과 현지인의 현실 사이의 모순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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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10일 융희 황제(순종) 인산일 장면. ⓒ 사진제공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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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10일 융희 황제(순종) 인산일 장면. ⓒ 사진제공 서울역사박물관


6·10만세운동은 지도부의 대량 검거로 무산 위기에 처했지만,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중동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의 학생들은 격문을 제작해 인산 행렬이 지나는 곳에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200여 명이 현장에서 체포되고 주동자 11명은 실형을 언도받았다. 전국 55개교의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6·10만세운동에는 좌우가 없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12월 8일, 6·10만세운동의 국가기념일 제정 소식을 알리면서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26년 6월 10일에 일어난 학생층 전체를 망라한 계획적이며 조직적인 항일학생운동으로, 준비과정에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일부가 서로 뜻을 모아 신간회를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고, 침체된 민족운동과 학생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어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교량역할을 하였음."

라 회장도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좌우의 대립이 있었고, 이로 인해 독립운동이 차질을 빚는 상황이었는데, 6·10만세운동은 좌우합작으로 성사됐다"면서 "종교지도자들이 주축이 됐던 3·1운동과는 또 다른 양상이었고 의미도 깊다"고 평가했다.

장석흥 국민대 교수는 지난해 7월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학술심포지엄에서 "중국 상하이에서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와 병인의용대, 임시정부의 일부 세력, 국내에서는 고려공산청년회, 천도교, 조선노농총동맹, 학생 단체 등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면서 " 3·1운동의 계획 주체가 종교 지도자와 같은 자유주의자였다면, 6·10만세운동은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대를 이루는 새로운 양상을 드러냈다"고 평가한 바 있다.

한일관계가 최악? "황후 살해하고 강제통치할 때보다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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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종일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장. ⓒ 권우성


라 회장은 6·10만세운동의 한계를 짚으면서 1987년 6·10항쟁과 비교했다.

"매년 6월 10일 오전 10시에 6·10항쟁 기념식이 열립니다. 올해 6월 10일 저녁 6시에는 6·10만세운동 기념식이 열리죠. 6·10항쟁 기념식에는 시민-노동단체, 대학생 조직 등이 대규모로 참석합니다. 1987년은 1926년과 달랐습니다. 일제 탄압이 극한 상황이어서 독립으로 이끌 자원과 조직이 부족했죠. 그게 유감인데, 이런 상황에서 벌인 만세운동이기에 더욱 높게 평가합니다."

라 회장은 "일부 사람들은 독립운동이 실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브로주아지의 운동으로 폄훼하는데, 2차 대전이 끝나기 전에 열강의 식민지가 된 나라가 자주적으로 독립을 쟁취한 일은 없었다"면서 "그렇다고 해서 온갖 희생을 무릅썼던 독립운동의 의미가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2년 전인가요? 워싱턴에서 일본 고위층과 공개토론회를 할 때 일본인들이 '지금의 한일관계는 최악'이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아주 좋다'고 말했어요. 16세기말 한국에 쳐들어와서 폐허로 만들었을 때보다, 황후를 살해하고 강제 통치할 때보다 지금이 훨씬 좋다고 말이죠. 관동대지진 때보다도 좋죠. 제 말을 듣고 미국 사람들도 웃더라고요."

라 회장은 올해 처음 정부 행사로 치러지는 6·10만세운동기념식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하면서도 이 말을 할 때는 씁쓸하게 웃었다.
#6.10만세운동 #라종일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국가보훈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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