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사업으로 철거 중인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세계문화유산 품은 공산성 마을, 은개길 주민들 이야기

등록 2021.06.21 10:57수정 2021.06.23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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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4일, 제9차 도시재생특별위원회에서는 '도시재생뉴딜 시범사업지' 68곳을 선정했다. 다음 해 2월, 공주시 옥룡동 버드나무길과 은개길 일원은 주거지 지원형으로 확정되어 4개 영역 13개 세부 사업에 319억 원의 국비를 지원받게 됐다.


대상지 중 은개길 마을은 사적 제12호인 공주 공산성과 충청남도 기념물 제99호인 옥녀봉성 사이에 위치하여 '세계문화유산을 품은 공산성 마을'로 알려져 있다.

6월 초,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다 주택 철거작업이 시작되는 현장을 목격했다. 왼쪽이 높고 오른쪽이 낮은 지형에는 약 80% 이상의 노후된 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도로 확장을 위한 정비사업은 주로 지대가 낮은 오른쪽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6월 15일과 16일 양일에 걸쳐 이곳을 다시 찾았다. 흔적 없이 사라질 주택가를 돌아보고, 긴 세월 이곳에 정주한 원주민들의 숨은 사연도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6월 2일(수)에 공주시 옥룡동 은개길을 지나다 보니 주택 철거가 시작되고 있었다. 지나가는 주민께 여쭈니, 이미 시작한 지 며칠 됐다고 말한다. ⓒ 박진희

 
올해로 92세가 되는 유흥수 할아버님 댁도 대상지에 속해 있었다.

재작년 10월 중순 즈음에 은개골 역사유적공원에서 '옥룡동 풍경전'이 열렸었다. 사진 전시장을 찾았다가 자전거 짐칸에 잘 익은 감 몇 개를 싣고 가시는 할아버님을 만났다. 인상적인 모습에 사진 촬영을 부탁드려 봤다. 그랬더니 "좀 전에 담장 너머 보이는 아주까리 찍었지? 그거 우리 집 거여. 사진값 받아야 겄는디...."라고 우스갯소리를 하시더니, "집에 가면 사진 찍을 만한 더 멋진 장면이 있는디 따라와 볼텨?"라고 예상치 못한 초대를 해주신 분이다.

대문 없는 꼭대기 집에 들어서니 아담하고 소박한 풍경이 펼쳐졌다. 90 연세에 혼자 하는 살림이 정갈했다. 국가유공자인 할아버님이 보여주고 싶다던 풍경은 처마 밑에 대롱대롱 매달린 100여 개의 감이었다. 석장리박물관에 갔다가 흔히 볼 수 없는 거라 오가는 사람들 보라고 따왔다면 목화꽃도 내보이셨다. 귀가 어두운 할아버님과 몇 마디 나누다 이곳이 철거 대상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16일 언덕 꼭대기에 있는 할아버님 댁을 찾았더니 결국 이사를 하셨는지 건물 내부는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대문도 없는 곳에 걸려 있던 문패가 그대로인 것을 확인하니, 혼자 이사는 잘 하셨는지.... 새로 정착할 곳은 마음에 드시는지 때늦은 걱정이 일었다.
 

철거 대상지가 돼 이사를 한 세대 옥상에는 먹다 남은 된장 항아리가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 박진희


유흥수 할아버님이 자전거를 끌고 오르시던 언덕길 왼쪽편의 집 3채도 헐릴 예정이었다. 

충북에서 오신 포도나무집 할머님은 몇 년 전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로 이사와 외로이 사셨다. 늘 보훈회관에 가는 낙으로 사시던 분이었는데, 말년에 치매 기가 있으셨는지 차가 올라와도 길 한가운데 버티고 앉아 계셨단다.

클랙슨을 울려도, 차에서 내려 애원을 해도, 좀처럼 길을 비켜 주지 않아서 동네 사람들한테 눈총 꽤나 받으셨다고 들었다. 이사는 잘 하셨나 궁금하여 동네 분께 근황을 물었더니, 작년에 작고하셨다고 전한다.

나비 벽화가 그려진 할머님 댁도 결국 철거 대상에 들어갔다. 지붕과 담장을 고쳤으면 하셨는데, 철거가 될지 어떨지 몰라서 불편한 대로 2년 가까이 참고 지내셨다. 2020년 12월 28일에 철거가 시작됐어야 한다는데, 6개월 가량 늦어졌으니 맘고생을 반년 정도 더 하시다 이사를 가신 셈이다.

빈집 옥상에 올랐더니 묵은 된장 항아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큰 항아리는 놓일 곳이 없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셨는지도 모르겠다'라고 짐작하며 마당 일부만 철거 대상에 들어간 왼편 마지막 집을 지나 은개골 역사유적공원을 향해 걸었다.
 

일부가 철거될 예정이던 주택에 포크레인이 들어섰다. ⓒ 박진희

 
6월 15일, 보리수나무 가지가 담장을 넘어온 집을 지나친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어르신 두 분이 정담을 나누시다 집주인인 할머님만 집 앞을 서성이시기에 몇 말씀 나눠 보았다.

"할머님댁도 헐리나요?"
"저기, 노란 깃발 꽂힌 데 바깥쪽으로만 헐린대. 다행이지. 21살에 시집 와서 50년 넘게 살았는데, 이제 와 이사를 하라면 어쩌나... 얼마나 심란했다구."


눈앞에 커다란 대문을 뜯으러 포클레인이 가까워지는데도 할머님은 이사를 가지 않는 것만으로 퍽 안도하시는 모습이었다. 
 

대문이 사라진 주택의 할머님은 마늘 수확을 하러 텃밭에 나와 계셨다. ⓒ 박진희

 
다음 날, 다시 대문만 헐린 할머니 댁을 찾았다. 전날 비가 오락가락하고 다른 일정이 있어서 서둘러 자리를 떠나왔기에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재차 걸음을 했다. 전날 할머님은 대문이 헐린 걸 보고 나서 코로나 백신 1차 접종을 하러 병원에 가신다고 했었다. 호적에 3년 늦게 올라 이제야 백신을 맞는다고 하시며 의혹도 해소해 주셨다.

16일 오전, 할머님은 집 앞 텃밭에 나와 계셨다. 힘드시지 않은지 여쭈니, "괜찮다"고 답하셨다. "오늘 내로 마늘과 양파를 뽑아야 야생초를 옮겨 심을 수 있어서...."라고 말씀하시더니 부지런히 호미를 놀리신다. 할머니가 뽑으시는 마늘을 살피니 유난히 작아 보였다. 텃밭이 철거 대상지에 포함될지도 정확하지 않아서 퇴비를 제대로 못 줬더니 죄다 작다고 아쉬워 하셨다.

주변에서 커피숍을 열라느니, 생태학습장을 만들라느니 말들이 많단다. 할머님은 이도 저도 싫고, 좋아하는 야생초 잘 키우고 그것 보는 낙으로 살고 싶다고 말씀하신다. 다만 한 가지, 은개길 역사유적공원처럼 기와편 사이사이에 황토를 개서 새로 담을 쌓고 싶으시단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보기에도 훨 낫지 않겄어?" 되물으시더니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으신다.

이사한 동네에서 행복하세요

2018년부터 생활인프라 개선, 주거정비 지원, 지역 특성화, 지역역량 강화를 목표로 시작된 은개길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올해로 마무리된다. 

철거 작업이 끝나면 올 안으로 깔끔하고 편한 길이  '공산성'이며, '은개길 역사유적공원'과 옥녀봉까지 이어진다. 인근에 사는 주민들과 앞으로 이곳을 방문할 관광객들은 새롭고 풍성해진 볼거리를 즐기게 된다.

대신에 지은 지 오래되어 노후한 집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자 했던 몇몇 분이 정든 곳을 떠나셨다. '정들면 다 고향!'이라고들 말하지만, 이곳이 좋아 눌러살다 부득이 떠나시게 된 연세 높은 원주민들께는 무색한 말이다.

모쪼록 새로 터 잡은 곳에서 좋은 이웃도 만나고, 정 붙일 만한 소일거리도 찾아가며 인생 2막을 재미지게 보내시길 바란다.
#도시재생뉴딜사업 #은개길 #주택정비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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