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완도대교가 한강 인도교였다?

등록 2021.06.25 14:07수정 2021.06.25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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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로인 경인 철도 건설 시 건립된 한강 최초의 다리는 제1 철도교(A선). 이후 1912년에 제2 철도교(B선), 1944년에 제3 철도교(C선)가 건립됐다. 6.25전쟁으로 한강 인도교가 먼저 폭파되고, 나머지 세 교량 모두 폭파됐는데, 1957년 제3 철도교, 1969년 제1, 2철도교를 복구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한강철교는 2006년 6월 10일 국가 등록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됐다.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라


1950년 6월 28일 새벽이었다.

"한강 인도교 폭파.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북한군이 미아리 저지선을 제치고 서울로 입성한 지 2시간 만에 한강철교는 엄청난 섬광과 천지를 뒤엎는 듯한 폭음과 함께, 그렇게 두 동강이 났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성급하고도 무계획적인 결정이었다. 비록 적군이 가까이 온다고 해도 한강철교 앞에서 서울역까지 수많은 피난민이 몰려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강 인도교 폭파는 당시 수백만 서울시민을 아무 대책 없이 적 치하에 묶어놓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무려 10만이 넘는 시민들이 적에게 피살되거나 북으로 납치당해 갔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참담한 비극이었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야인시대> 82화 중 한국전쟁 관련한 해설의 일부 내용이다. 한국전쟁 중 북한군 전차가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육군참모장 채병덕 소장,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 명령을 내리고 곧바로 시흥으로 향했다. 공병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육군공병학교 작업조는 전쟁이 일어난 지 3일 뒤, 한강 인도교 철교 대교 구간의 2, 3, 5번째 경간을 폭파하고 나서 나머지 교량도 폭파했다. 순식간에 한강철교는 사용불능 상태가 됐다.

한 나라의 국가 원수가 전쟁 중 도성을 버리고 후퇴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볼 때 드문 일이 아니다. 도하를 막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 다리 폭파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 결정 자체는 나무랄 데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시기가 빨랐던 것은 논란이 됐다. 한강 인도교 폭파라고 알려진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은 대동강의 다리였다. 1950년 12월 4일 맥스 데스포 기자가 촬영한 폭격으로 인해 끊어진 다리를 신문에 보도했는데, 그 사진은 한강 인도교가 아니라는 것.


종로서 경찰 77명을 포함 민간인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인원이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여기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2016년 한국전쟁사 연구발표에 따르면 민간인 피해는 없었다고 전한다. 민간인 피해는 없고, 군경 77명의 피해가 있는 것이 현재 정설로 기록됐다.

그동안 한국전쟁과 관련한 드라마나 영화 시나리오에 극적인 장면이 추가되면서 많은 부분이 오해의 여지가 됐다. 시민들은 한강 인도교 북쪽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당시 전황으로 보면 6~8시간 먼저 인도교가 폭파됐고,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시민들은 3개월 동안 공산치하에서 시달려야 했다. 군인들이 장비를 버리고 퇴각했으나 미처 퇴각하지 못한 병사들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 

국민의 비난을 받게 된 이승만은 실무를 담당했던 공병대장 최창식을 폭파 명령자로 지목해 사형시켰다. 1962년 박정희 정권은 가족들의 재심 신청을 받아들여 그를 사면했고, 실제 명령자를 채병덕으로 다시 지목한다.
 

ⓒ 완도신문


완도대교,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논란이 많았던 한강철교는 일제 강점기 식민 지배의 수탈에 이용된 현장이었다. 이후, 6.25 한국전쟁의 고난과 경제산업발전과 교통혁명의 상징이라는 것에 의미를 둬 역사적, 건설사적, 교량사적 시설물로서 가치가 인정됐다. 1969년 제1, 2철도교를 복구하면서 기존 트러스 구조물을 전면 교체했는데, 이 중 일부는 완도대교 가설공사에 사용됐다고.

완도대교는 1968년 한강철교와 흡사한 모양으로 개통돼 완도군 교통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 후 1985년까지 사용돼 오다가 2012년 신 완도대교 개통으로 아쉽게도 철거 위기에 휩쌓였다. 이곳 완도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 맞은 임진강 철교를 한강 인도교로 다시 복건했다가 완도로 옮겨 온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서울 양수리 대교라는 주장도 펼쳤다.

어찌됐건 한국전쟁의 상흔과 연륙의 기쁨을 안겨준 이 다리 일부라도 남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역 내에서 강하게 일었지만, 보존예산 확보와 연간 관리비용 충당의 어려움으로 영상기록물로 남기기로 해 아쉬움이 컸다.

완도에 내려온 지 벌써 석 달이 훌쩍 넘는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지역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시간적 제약에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던 중 지역 내 향토사학자와 잠시 통화를 했다. 한국전쟁 기념주간이라서 궁금했는데, 옛 완도대교에 관한 지역 내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 완도신문


"아, 그 다리 말씀이세요? 정확히 말하자면 한강철교라고 말하면 안 되죠, 한강 인도교라고 해야 합니다."

세밀한 지적에 한때 전쟁을 치르고 나서 한반도 최남단에서 섬과 육지를 이어준 소통의 임무를 다한 철교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마침내 철거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완도대교를 보존하고자 지역민들은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예산 마련을 못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군민들 모두 아쉬워했던 부분이다. 타지역 사람들도 관심을 보내고 응원을 했건만 결국 보존되지 못했던 것. 그것을 지키고자 한것은 전쟁의 상흔과 지역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의지와 육지와 섬을 잇는 매개처럼 통일의 마음을 담은 완도사람들의 염원이었다.

지금, 신완도대교는 청해진 장보고의 투구를 상징하는 교각이 대양을 향해 돛을 달고 힘차게 항해하는 형상을 하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지승/다큐사진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립니다.
#정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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