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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병원마다 걸린 특별한 안내문... 이유 듣고 놀랐다

[제주살이를 꿈꾸는 당신에게] 제주 4·3은 현재진행형

등록 2021.07.01 07:32수정 2021.07.0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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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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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평화공원에 설치된 대형 동백꽃 탐스러운 꽃봉오리가 한 순간 툭 떨어지는 동백은 4.3때 스러져간 희생자를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 황의봉


애조로에서 봉개동으로 접어들면서 차가 밀리기 시작하더니 목적지 부근에 오자 10시를 넘겨버렸다. 오늘 목적지는 4·3평화공원이다. 제주 4·3 70주년 추념식에 참석하려고 1시간 정도 여유 있게 집에서 출발했는데, 예상보다 심한 정체로 늦고 말았다. 그래도 좀 늦게라도 참석할 수 있으려니 했던 기대는 주차장에서 헤매다가 접고 말았다.

10여 군데에 마련한 임시주차장을 몇 바퀴 돌았지만 빈 자리를 찾지 못했다. 결국 추념식은 포기하고, 대신 벚꽃과 유채꽃이 만개한 녹산로를 드라이브 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나야 유족도 아니고, 제주토박이도 아니고,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제주 4·3 추념식, 더욱이 70주년이라는 상징성이 강한 추념식에 꼭 참석하고 싶었다. 제주에 와서 4·3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동안의 무관심에 미안함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됐고, 그래서 추념식에 참석해야 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아쉬웠다.

1978년 현기영 작가가 <순이 삼촌>이라는 소설을 발표했을 때 읽고 충격을 받았던 일이 생생하다. 비록 소설 형식을 빌렸지만 제주 4·3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는가를 작중인물 순이 삼촌의 사례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고, 육지에 나와 사는 제주 사람들의 미묘한 심리상태도 엿볼 수 있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유족과 토벌대나 경찰 측에 섰던 사람들의 4·3에 대한 인식차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4·3은 여전히 역사책에 나오는 과거사일 뿐이었다.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은 제주 4·3의 실상을 한국 사회에 공개적으로 드러낸 거의 최초의 사례였다. 그전까지 4·3은 빨갱이 폭도들이 일으킨 사건으로만 선전되었으니, 피해 당사자나 유족들이 감히 진상을 드러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제주 바깥의 사람들이 4·3에 대해 모르거나 피상적으로 혹은 왜곡된 시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4.3평화기념관에 내걸린 플래카드들 4.3이 현재진행형임을 말해주듯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지고 있다. ⓒ 황의봉

 
제주에 살면서 비로소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제주 4·3이 '역사'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제주지역 소식을 전하는 TV 뉴스나 지역신문을 보면 4·3 관련 소식이 빠지는 날이 거의 없다.

집단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나 혈육을 잃은 유족들의 증언, 학살 현장 탐방, 4·3특별법 관련 문제,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려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의 재심 문제와 배·보상 문제 등등 육지에 살 때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매일 접하게 된다. 제주공항의 활주로 옆에서 집단학살 후 매장된 민간인들의 유골 발굴이 주요 뉴스가 되는 게 바로 요즘의 제주다.


제주 시내 한 정형외과에서 있었던 일이다. 진료비 수납창구에 4·3 피해자나 유족은 진료비를 감액해드린다는 안내문이 보였다. 얼마 전 한라수목원 부근의 한의원에 갔을 때도 이런 안내문을 본 적이 있어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여기 한의사님이 좋은 일을 많이 하시는 분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정형외과에서도 이를 보니 궁금증이 생겨 물어봤다.

간호사의 대답은 법에 의해 할인해준다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법에 의해 진료비를 할인해준다니! '육지적 상식'에 젖어 있는 나로선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다. 어떤 상황이 법제화된다는 것은 사회적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됐을 때 가능할 것이다. 3만 명으로 추산된다는 희생자와 그 유족, 일가친척을 감안하면 사실상 제주도민 전체가 피해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유족들이 아플 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건 이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 이런 법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촌 너븐숭이 애기돌무덤 학살의 광풍은 어린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20여 기의 애기무덤에 동백꽃이 놓여있다. ⓒ 황의봉

 
어느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면서 플래카드를 본 적이 있다. 4·3을 소재로 한 어린이들의 연극공연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육지 같았으면 이런 주제의 어린이 연극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우연한 기회에 제주지역 초등학교에서 매년 4월이면 4·3 평화·인권교육 주간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4·3 관련 동영상과 애니메이션 상영, 추념식 생방송 시청, 인형극과 4·3 노래, 4·3 동백꽃 만들기 등을 여러 과목에서 통합적으로 수업한다는 것이다.

이런 교육을 통해 4·3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의 정신을 가르친다는 것으로, 4·3이 현재진행형일 뿐 아니라 평화·인권·화해 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미래 비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매주 발행하는 제주 가톨릭 주보는 4·3 70주년 특별연재 '4.3을 생각하다'를 6주 연속으로 다뤘다. '제주 4·3 바로 알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4·3의 피해상과 연좌제 문제, 진상규명 운동을 자세히 소개하고 이어서 문창우 주교의 '신학적 주제로서의 제주 4·3' 기고문을 세 차례 연재했다. 개신교나 불교계가 4·3에 관해 어떤 자세를 보였는지는 모르나 아마도 어떤 형태로든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최근 들어 4·3이 제주지역을 넘어 전국적 이슈로 떠오른 데는 가톨릭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의 역할이 컸다(강우일 주교는 2020년 11월까지 제주교구장을 지냈다 - 편집자 주). 얼마 전 4·3을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이 TV로 중계됐다. 강우일 주교가 맨 처음 마이크를 잡기에 인사말 정도를 하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본격적인 주제 발표자로 나선 것이다.

발표를 자세히 들어보니 전문 연구자 수준의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4·3의 진상을 알리고 올바른 평가와 진정한 화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 온 강우일 주교의 행적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처음 제주교구장으로 부임할 때는 "아름다운 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는 마음에 기뻤는데, 살다 보니 제주가 그렇게 행복한 땅이 아니었다"는 강 주교의 소회가 긴 여운을 남긴다.
 

순이삼촌 문학비 4.3 당시 최대의 학살이 자행된 조천읍 북촌리 사건을 다룬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 내용이 돌에 새겨져 있다. ⓒ 황의봉

 
나 역시도 제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그토록 아름답게만 보이던 제주도의 마을에, 해안가 절벽에, 오름에, 숲속 천연동굴에, 심지어 관광객을 태운 비행기가 쉴 새 없이 뜨고 내리는 그 활주로 밑에 4·3의 피비린내가 배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제주가 그렇게 행복한 땅이 아니었다'는 강 주교의 토로는 이제 '나의 제주도 생각'이기도 하다. 제주 4·3은 더 이상 나와 관계없는 일이 아니라, 제주에 살아가는 내내 자의식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을 것만 같다.

광화문광장에서도 4·3 70주년을 추념하는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4·3은 70년 만에 제주섬을 벗어나 육지 사람들에게도 관심사가 되고 있다. 대통령은 70주년 추념식에 참석해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추념사를 마무리했다. 제주 4·3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고, 비로소 봄을 맞고 있다. (2018.4)
#제주4.3 #4.3 70주년 #순이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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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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