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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르쳤으면 안 죽었을 텐데" 가슴 치는 부모

한국전쟁기 태안지역 민간인학살 피해자 유족 가청과 한원석의 이야기

등록 2021.07.31 20:43수정 2021.07.31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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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가청 ⓒ 박만순

 
종일 집안 일가와 이웃집을 다니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온 가삼룡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집안 분위기가 흉흉하니 손자 가청(당시 10세, 장남 가종호의 아들)은 쭈뼛거리기만 했다. 가삼룡의 한숨은 계속되었고 손자는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라고 물었다. "아니다..." 어린 손자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가삼룡은 한참을 끙끙 앓았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던지 "아가..."하며 가청을 불렀다. "예, 할아버지." "네 작은아버지가 식전에 네 아버지 때문에 잡혀 가지 않았느냐. 그런데 지서에 논 한 마지기 값을 갖다주면 풀려날 수 있다는구나. 그런데 종일 다녀도 돈을 구할 수가 없구나." 가삼룡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10세 소년 청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할아버지도 손주한테 해결책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하도 답답해서 말한 것이다.

더군다나 가삼룡의 장남 가종호는 보도연맹원을 붙잡아 들인다는 소문에 행방을 감춘 지 며칠째였다. 둘째 가종렬은 형 대신 붙잡혀 갔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구명에 필요한 시간은 3일이란다. 하루를 공쳤으니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논 한 마지기 값을 마련하지 못해

다음날 가삼룡은 아침 일찍 서둘렀다. 하지만 집안 일가와 마을에 돈 있을 만한 집을 모두 헤매고 다녔지만 허사였다.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충남 태안군 남면지서에서 정한 3일 기한은 그렇게 지나갔다.

결국 가삼룡의 둘째 아들 가종렬은 서산 양대리에서 후퇴하는 대한민국 경찰에게 학살되었다. 둘째가 총살 당했다는 소식에 가삼룡은 혼절했다. 그가 깨어나서 처음 한 말은 "가르치지 않았으면 안 죽었을 텐데..."였다.

그렇다. 태안군 남면 양잠리 출신 가종렬은 당시 고려대학교에 당당히 입학했다. 남면뿐만 아니라 태안군에서도 고려대를 가는 게 드물던 시대였다. 대학 졸업 후 가종렬은 남면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사상과는 관련이 없는 이였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남면사무소에 근무하던 형 가종호가 6.25 발발 후 보도연맹원 예비검속 때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가종호가 행방불명되자 남면지서에서는 동생 가종렬을 잡아들였다. 동생 가종렬은 형을 대신해 죽음의 대열에 합류했다. 1950년 7월경의 일이었다.

북한에 살아있었던 아버지... 이산가족 만남은 불발

"할아버지, 아버지 제사는 어떻게 할까요?" "네 아버지는 살아있다." "예!"

할아버지에게 아버지 가종호가 살아있다는 말을 들은 가청은 식은땀이 흘렀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실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할아버지 가삼룡이 그렇게 말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북한 방송을 몰래 청취했는데, 그 결과 장남 가종호가 살아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가삼룡의 추측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1986년 이산가족 만남 때였다. 가청의 일가 되는 가창호가 6.25 때 행방불명된 가종호의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1986년 평양에서 있었던 이산가족만남 때 가창호는 전쟁통에 헤어진 형을 만나게 됐다. "형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나는 외롭지 않어. 우리 집안 종호씨가 살아 있어 자주 왕래를 하고 있어." 가창호의 증언으로 가청의 아버지 가종호가 평양에 살아 있고, 그의 아들 둘이 김일성대학에 다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후 가청은 대한적십자사에 북한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신청서를 냈다. 하지만 어떤 연유인지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청은 이제는 아버지가 사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만났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크다.

연좌제 걸려 경찰시험 떨어져

가청(1941년생, 충남 태안군 남면 양잠리)은 가방끈이 짧다. 남면국민학교를 나온 것이 전부인데 할아버지 가삼룡은 손자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중학교를 나와 남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장남은 6.25 때 행방불명되고, 고려대를 나와 남면초등학교 선생을 하던 차남은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 당했기 때문이다. 이 악몽 같은 현실에 가삼룡은 '똑똑하면 죽는다'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삼게 되었다. 손자 가청은 남면초등학교를 나온 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게 배움의 전부였다.

군 제대 후 가청은 악착 같이 공부해 경찰시험에 응시했다. 1차 시험에 합격했지만 신원조회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아버지 가종호와 작은아버지 가종렬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가청의 둘째 작은아버지 가종하도 북한군 점령 시절인 인공 때 부역했다는 혐의로 남면지서에 연행돼 온갖 구타와 고문을 당한 후 1965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실도 걸릴돌이었다. 한 집안을 파괴시킨 국가가 그의 삶을 옥죄였다.

의용군에서 탈출했는데, 빨갱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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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한원석 ⓒ 박만순

 
"아이고, 석아." 1950년 9월 둘째 아들 한석(당시 22세)을 끌어안은 어머니 김성례는 통곡을 했다. 귀한 자식이 의용군에 끌려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는데 기적처럼 아들이 다시 나타났으니 그럴 수밖에.....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강원도에서 죽기 살기로 도망쳤어요."

그제야 가족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석은 한창교·김성례 집안을 일으켜 세울 기둥이었다. 한석은 어릴 때 태안군 이북면(현재의 이원면)에서 신동으로 소문났었고, 끝내는 서울사범대에 입학했다. 그런 그가 사지에서 돌아왔으니 가족의 기쁨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달 후 기쁨은 슬픔이 되었다. 태안을 점령했던 인민군이 물러가고 경찰이 수복하자 한석은 이북지서에 연행돼 면사무소 양곡창고에 구금되었다. 

한석이 의용군에 갔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강원도에서 탈출한 것만 봐도 한석이 자발적으로 의용군에 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수복 후 결성된 치안대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빨갱이 물들었다"고 했다. 서울사범대를 다니던 한석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시골로 피난을 왔는데 그게 호랑이굴이 되었다.

집안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둘째 아들 한석뿐만 아니라 이북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사위 정동현(당시 25세)도 연행되었기 때문이다. 한석의 할머니 조씨가 밥을 해 날랐다. 사람들이 갇혀있는 양곡창고 문을 두드리면 창문으로 새끼줄이 내려와 주먹밥이 올려졌다. 이런 배달은 한 달간 이어졌다. 어느 날 조씨가 밥을 해 창고로 갔는데 그 날은 창고가 텅 비어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둘째 아들과 사위를 비롯한 사람들이 뒷결박 당한 채로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옹동벗에서 쓰러진 이들

이북면사무소 양곡창고에 구금된 이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소위 '부역자심사위원회'는 지서장, 치안대장, 치안대 감찰부장 및 임원, 지역 유지들로 구성되었다. 심사위원회는 구금된 이들을 3등급으로 분류했다. A는 처형되고, B는 보류했다가 재심사하고, C는 석방했다. 형식상 심사위원회의 최고결정권자는 지서장이었다.

하지만 태안군 이북면에서는 치안대장의 목소리가 더 컸다. 이북면 치안대장 김치환(가명)은 면장으로 근무하다가 인민군 점령 시기 서산 양대리에서 북한군과 지방좌익에게 학살된 김형만의 친형이었다. 심사에서 이북지서 지서장은 될 수 있으면 처형자를 줄이려고 했지만, 치안대장 김치환은 적극적으로 처형하려고 했다. 지서장보다 치안대장의 목소리가 더 컸다. 친형의 죽음에 따른 보복 학살이었다.(『태안 민간인학살 백서』, 2018)

창고에 구금된 이들은 세 차례에 걸쳐 골로 갔다. 한석은 매형 정동현과 함께 1950년 12월 2일 이원면의 옹동벗으로 끌려갔다. 경찰은 뒷결박 당한 이들의 가슴에 총구를 들이댔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젊은이들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확인 사살은 치안대원이 했다. 참나무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치면 "딱"하며 두개골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다음날 한석의 동생 한원석(당시 13세)은 마을 어른과 함께 옹동벗에 갔다. 가슴은 뻥 뚫리고 머리는 으깨어진 형의 시신을 찾았다. 목이 막히고 앞이 안 보였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준비해간 칼로 형의 뒷결박을 풀었다. 하지만 형의 손은 굽어 펴지지 않았다. 12월 초겨울 날씨 탓이었다. 그날은 형의 시신에 표시만 해놓았고, 다음날 집안 식구들과 함께 한석의 시신을 수습했다.

똑똑하면 죽는다

한석의 죽음이 확인된 그날 밤, 아버지 한창교와 어머니 김성례는 밤새 곡을 했다. 한창교는 "가르치지 않았으면 안 죽었을 텐데...."를 기도문 외우듯이 했다. 하지만 경찰과 치안대가 배운 이들만 죽인 것은 아니었다. 태안군 이북면 관리 관동마을에서만 23명이 학살당했는데 피해자 대부분이 무학자였다. 죽음에는 유·무식도 없었고, 이념도 없었다. 한석과 함께 죽은 매형 정동현은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우익이었다. 같은 마을 김정교는 치안대원에게 돈을 꿔주지 않았다며 죽임을 당했다.

부역혐의자 학살 이후에는 또 하나의 광풍이 몰아닥쳤다. 치안대가 빨갱이 가족의 재산을 강탈해 갔다. 농촌 재산 목록 1호인 소를 빼앗긴 사람도 있었고, 취사도구를 탈취당했다. 한창교 집안은 어이없게도 부역혐의죄로 밭을 팔아 벌금을 내야 했다. 

형과 매형을 한국전쟁기에 잃은 한원석(1937년생, 충남 태안군 이원면 관리)은 맘껏 공부를 못한 한이 있다. 할머니가 '똑똑하면 죽는다'며 교육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원석은 평생을 고향에서 밭과 씨름하며 팔십 평생을 살았다. 매년 6.25와 찬바람이 부는 12월 초가 되면 그의 눈에는 머리가 으깨어져 있던 형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한숨과 탄식 소리도 들려온다. 똑똑해서 죽은 세상, 무식쟁이도 죽는 세상, 살아남은 자들은 71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슴을 못 펴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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