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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결전 부르짖던 일본의 항복... 그렇게 '미 점령군'이 왔다

[일본史람] 제국 일본의 패전을 중심으로 미 점령군 논란을 들여다보다

등록 2021.07.12 12:43수정 2021.07.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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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진주한 미군의 길 안내를 하고 있는 일본군 장교(1945년 9월) 조선의 상황에 대해 무지했던 미군은 일본군 및 조선총독부의 협조를 받아 군정을 구성하였다. ⓒ wiki commons


7월 초, 광복절을 한 달 여 남겨둔 시점이지만 제국 일본이 패전하고 식민지 조선이 해방된 1945년 여름 상황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김원웅 광복회장의 '소련 해방군, 미 점령군' 발언이 주요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이에 대한 주요 정치인들의 비판과 옹호가 엇갈리면서, 1945년 여름 정세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정작 논쟁의 양상은, 김원웅 광복회장이 언급한 소련군과 미군에 대한 객관적 고찰이 아닌 누가 '비국민'인지를 가리는 소모적인 사상 논쟁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당시 한반도에 진주한 미소 연합군이 어떤 세력이었고 거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속해 있었는지, 그들이 치렀던 전쟁은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고민은 결여된 채 급기야 반공주의나 극단적 민족주의를 골자로 하는 극언까지 난무하고 있다.

소모적이고 정치적 논쟁을 넘어, 사실관계에 입각한 객관적 고찰을 하기 위해선, 시계를 다시 1945년 7월로 맞추고서 시시비비를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그해 여름의 시대상을 살펴보는 것은 제국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해방 그리고 그곳에 들어온 연합국 군대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작업에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이 치른 전쟁
 

구레 군항 공습 일본 해군의 잔존 함대와 기반 시설들이 완파된 순간이었다. ⓒ wiki commons


1945년 7월의 제국 일본은 그야말로 절망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6월 말 미군에게 함락된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의 운명을 예고한 것과도 같았다. 7월 26일에는 연합국 국가들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이 있었다.

그 무렵인 7월 24일과 28일에 미군이 실시한 '구레 군항 공습'은, 잔존해 있던 일본 해군의 수상함대와 기반 시설들을 철저히 파괴했다. 당시의 육군대신이었던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대장은 궤멸 상태에 놓인 해군을 가리켜 '팔다리뿐 아니라 불알까지 잘렸다(海軍は手足どころか、金玉も取られている)'고 평가하며, 해군이 사실상 독자적인 운영 능력을 상실했다고 단언했다.

물론 육군이라고 상황이 낙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참패도 문제였지만, 전선으로의 보급이 사실상 마비된 상황이 더욱 근본적인 문제였다. 뉴기니와 필리핀, 버마 등 동남아시아 지역과 중국 대륙에 고립된 지상군 병력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본토로부터 보급받는 것을 포기하고 적과의 교전이 아닌 '자활'(自活)에 매진하고 있었다.

즉, 전황 타개를 위한 작전을 전개하는 것은 고사하고 장병 개개인의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구하는 것마저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사 연구가 야마자키 마사히로(山崎雅弘) 작가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 전몰자의 6할의 사인이 '아사'였다. 그러니, 당시 보급 문제의 심각성은 더 부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1945년 7월의 제국 일본은 이미 정상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고 평가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국체의 보전, 즉 천황제 유지를 위해서는 어떤 대가든 치를 각오가 돼 있었던 제국 일본의 지도부는 '본토결전' '일억옥쇄' 기치를 내걸고서 '전쟁 완수'를 부르짖었다. 다시 말해, 연합군을 상대로 일본 본토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여 설사 전 국민이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항복하지 않겠노라 천명한 것이다(관련기사:"주민 넷 중 하나가 죽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국민들).

이에 따라 일본 각 지역에서는 본토결전 수행을 위한 '결호 작전'의 준비가 이뤄졌다. 이때 제주도 역시 결호 작전의 일부인 '결7호 작전'에 포함돼 요새화 작업이 실시됐다.

본토결전의 준비는 이미 상식적인 판단에서 한참 벗어난, 아집과 광기에 가까웠다. 이미 일본의 항공기 보유량은 바닥을 치고 있었으므로 항공기를 이용해 적 함대에 자폭한다는 이른바 '가미카제' 특공마저 여의치 않게 된 상황. 대본영은 인간어뢰 카이텐, 자폭보트 신요 등을 '결전 병기'로 내세우며 가미카제의 공백을 메우고자 했다.   
  

전쟁 말기의 해군 지원병 모병 포스터 1945년 가을에 게시될 예정이었던 포스터. 1946년도 입영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소년 수병과 해군비행예과연습생의 경우, 13세부터 지원이 가능하다. 당시 일본의 수상함대와 항공력은 궤멸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 소년들은 사실상 '특공' 제원에 불과했다. ⓒ 박광홍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경악스러운 이런 특공에는 중학생 나이의 요카렌(해군비행예과연습생) 생도들이 동원됐다. 그나마 '비행을 꿈꾸며 지원했을 소년들이 최소한 하늘을 날며 죽게 해줘야지 않겠느냐'는 온정(?)어린 주장에 따라, 패전이 임박한 시기에는 '글라이더' 특공이 도입됐다. 즉, 장차 본토결전이 벌어지게 되면 연합군의 전차에 글라이더를 타고 자폭하라는 것이었다.

요카렌 출신으로 해군항공대에 근무했던 기시 우이치(岸宇一)씨는 이 본토결전에 대해 "명령을 받는 병사들도, 명령을 내리는 장교들도 모두 본토결전에서의 승리를 믿지 않았다"고 전했다. 승리에 대한 믿음은커녕 "본토결전이 시작되면 모두 꼼짝없이 죽게 된다고 생각했다"는 기시 우이치씨의 증언엔 멈출 수 없이 폭주하는 전쟁의 절망감이 담뿍 묻어난다(관련 기사 : [인터뷰] '가미카제'의 최후를 본 96세 일본 노인의 증언).
 

항복에 반대하다 자살한 오니시 다카지로 중장 해군군령부 차장이었던 오니시 중장은 '2천만 국민을 가미카제로 보내면 반드시 승리한다'고 주장하며 항복 논의에 필사적으로 반대하였다. ⓒ wiki commons


군인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 역시 그 광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억옥쇄라는 문자 그대로 전 국민이 잠재적 전투원으로 인식됐다. 이들을 위해서는, 화승총, 죽창, 농기구, 사발 수류탄 따위가 준비됐다. 제식 소총의 물량이 모자란 탓이었다.

어린 여학생들이 교과서 대신 죽창을 들고서 '찔러' 동작을 연마하던 시대, 그것이 바로 1945년의 여름이었다. 제국 일본이 패전하고 한반도에 진주했던 연합국 군대는, 바로 이러한 극단적 저항을 상정하고 마지막 전역을 준비했던 사람들이었다.

광기와 갑작스러운 항복
 

만주 여순을 함락시킨 소련군 장병들 소련을 통한 강화는 제국 일본 내 온건파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소련의 참전은 제국 일본의 지도부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군부 내 과격파들은 '배신의 나라 소련에 나라를 맡길 수 없다'며 전쟁 계속을 주장하였다. ⓒ wiki commons

 
1945년 여름, 제국 일본의 권역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그 누구도 쉽게 일본의 항복을 예상하지 못했다. 항복은, 참으로 거짓말처럼 다가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가공할만한 신병기'는 제국 일본의 전쟁 지도부에 큰 충격을 줬고, 특히 8월 9일 이뤄진 소련의 전격적인 대일전 참전은 '소련을 통한 강화'에 마지막 희망을 걸던 위정자들을 완전히 경악시켰다. 스스로에게 주어진 엄청난 권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참정을 꺼리던 쇼와 천황까지 나서서 종전을 종용하고 나서야, 내각은 비로소 '전쟁 완수'라는 허상을 포기하고 항복을 위한 과정에 착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본토결전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군부 과격파들에 의해 항복 발표 전야에 쿠데타가 발발하니, 그것이 바로 궁성사건이다. 내각이 항복을 의결하고, 이에 반대하는 궁성사건이 일어났다가 진압되고, 이어서 쇼와 천황이 항복의 뜻을 발표한 이 일련의 흐름들은 참으로 숨가쁘다. 사태가 이러하니, 그 누가 제국 일본의 항복을 간단히 점칠 수 있었겠는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소련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1945년 8월 9일 일본의 최고전쟁지도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때 육군 측은 '천황제 유지, 점령군 규모의 최소화, 일본인에 의한 일본군 무장해제'를 조건으로 내걸며 해당 조건이 거부될 시 전쟁을 계속할 것을 못박았다. 이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나가사키 원폭 투하 소식까지 전해졌고, 이에 쇼와 천황은 스즈키 총리에게 '종전'을 종용하였다. ⓒ wiki commons

      
1941년 12월 개전한 이래 태평양의 가혹한 환경에서 일본군과 분투했던 미군은, 일본 본토로 들어가 일본인들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할 '몰락 작전'을 준비하던 중 종전을 맞았다. 전쟁의 끝은 갑작스러운 것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제국 일본의 권역을 접수할 충분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미군은 조선에 대해서도 무지했고, 일본 본토와 같은 개념으로 점령했다. '미 점령군'의 조선 '진주'는, 광기의 시대가 빚어낸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착오가 해프닝으로 끝났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고착된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은 조선을 점령한 미군에 대한 평가마저 사상 검증의 잣대로 바꿔버렸다.
#미군 #일본군 #미점령군 #항복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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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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