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대기까지 오르면 물러날 것을 생각하라'

이것이 중국인이다 20

등록 2021.10.21 15:29수정 2021.10.2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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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일진대,
목숨을 다해 충성을 바칠 것이요,
만일 쓰이지 않으면 물러가
밭을 가는 농부가 된다 해도 또한 족할 것이다.
-이순신


세 종류의 선비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재상이었던 안자가 주군인 경공에게 세 종류의 선비에 관해 말한 것이 있다.

그는 그 첫째가 가장 훌륭한 선비로서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어렵게 여기지만 물러날 때는 미련을 남겨 두지 않는 선비라고 했다.

그 다음 선비는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것도 쉽게 여기고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도 쉽게 여기는 선비라고 했다.. 그리고 맨 나중의 하등 선비는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쉽게 여기지만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무척 어렵게 여기는 자로서 비록 물러난다 하더라도 온갖 미련을 다 두고 있는 선비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물러날 때 물러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많은 사람들은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금방 타죽을 줄도 모르고 권력을 향해서 날아든다.
  
개국공신의 운명


중국의 거의 모든 왕조가 개국 공신들을 사후를 대비해서 남김없이 제거해 나갔듯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그 길을 철저하게 밟아갔다.

명나라 개국 후, 주원장은 한나라 고조 유방이 그러했듯이 개국 공신들을 잔인할 정도로 처참하게 제거해 나갔다.

어느 날 주원장은 한 수의 시를 한림학사 승지 송렴에게 내려 그의 학문을 칭찬했다.

송렴은 전기문(傳記文)과 기서문(記敍文)에 뛰어난 명문장가로 인정받았는데, 유가 윤리를 존중하고 주원장의 은덕을 칭송하는 글을 많이 썼다.

그에 대한 주원장의 신뢰와 사랑은 정말 지극했다.

그러나 주원장은 권력과 거리가 먼 충실하고 박학다식하고 성현에 가까운 송렴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 먹는 것조차 주원장에게 낱낱이 보고 되고 있었다.

송렴이 친구 몇몇과 술자리를 한 다음날, 주원장은 송렴에게 물었다.

"어제 술을 마셨다면서? 누구와 마셨으며 안주는 무엇이었나?"

송렴은 그때마다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랬어군. 경이 날 속일 리 없지, 암!"

주원장은 그제야 만족스러워했다. 훗날 송렴은 벼슬을 마다하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주원장의 야만적인 통치는 명 왕조를 역대 봉건 왕조 중에서도 가장 암울했던 왕조로 만들었다. 감시 기관인 금위위진무사문 외에 동청과 서청을 설치했다. 이 기관들은 각종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그 중에는 끔찍한 고문도 있었다.
명사(明史) 형법지(刑法志)에 따르면 탄비파라는 형벌은 금의위(錦衣衛)의 형벌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것이었다.

"매번 백골이 다 빠져나가고 땀이 비 오듯 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길 두세 차례 반복했다. 이런 혹독한 상황에서 어찌 사건이 해결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시 평범한 백성들은 물론 조정의 대신들, 변방의 고관들도 모두 전전긍긍하며 불안에 떨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모습을 감춘 채 편안히 생을 마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가 꾀했던 군주독재권의 강화는 공포정치에 의해 실현되었기 때문에 만년에 고독하게 살다 병사했다.

과연 그의 생각은 맞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공을 세운 뒤 은퇴한 월나라의 재상 범려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었다. 

범려는 후세에까지 중국인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오를 멸망시킨 후, 구천이라는 사람은 역경을 딛고 나갈 때는 협력할 수 있지만 일단 태평성대를 만나면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대부 문종(文種)에게 월왕 밑에서 오래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충고를 남기고 자신은 월나라를 떠나 멀리 제나라로 갔다.

그는 바닷가의 들판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 안 되어서 넓은 농장을 가진 부자가 되었다.

제나라 사람들은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자기나라의 대신이 되어 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주 다복한 사람이라 관리를 하자면 대신의 그릇이 되고, 집안에 있어도 수만의 재물이 쌓인다. 사내로서 그 이상 바랄 것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제 나라 왕의 간곡한 간청을 못 이겨서 범려는 제나라에서 재사의 자리를 맡았지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이내 그만 두었다.

"서민으로 집에 있으니 천금의 부호가 되었고 벼슬을 하니 경상의 높은 자리에 올랐다. 평민인 나로서는 복의 극한을 누린 셈이다. 이런 존명을 오래 누리다가는 틀림없이 화가 생기리라."

재상직을 사직한 다음, 그 재산 전부를 친지와 친구와 향당에 나누어 주었다.
그러더니 그는 아무도 몰래 도나라라는 아주 외진 곳으로 갔다.

'여기는 천하의 요지이다. 이곳은 교역 시장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는 도에 와서 맨 먼저 이런 생각을 했다. 과연 그의 생각은 맞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큰 부호가 되었고, 도주공(陶朱公)이라고 불리는 지위도 얻었다.
  
명철보신

한서 화식전(貨植傳)의 범려항(范孼項)에는 범려가 월왕을 도와 나라를 바로 잡을 때 계예의 술책을 썼는데 열 가지 중 다섯 가지로도 충분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그보다 적은 계책으로도 충분했다고 씌어져 있다.

그러나 그 계책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든 범여는 수년 사이에 수천만 금을 모았다고 사마천은 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범려도 자식만큼은 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중국에는 "천금을 가진 부잣집 아들은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千金之子 不死於市)"라는 속담이 있는데 범려는 아들이 그렇게 죽는 것을 보게 된다.

범려의 둘째 아들이 초나라에서 죄를 지어 옥에 갇히는 일이 생겼다.

범려는 구명운동을 하기 막내를 보내려고 했는데 장남이 굳이 자기가 가겠다고 나서서 하는 수 없이 장남에게 금괴를 내주면서 초나라 현신 장생(莊生)에게 보냈다.
범려는 길 떠나는 장남에게 금괴를 전해주고는 곧바로 돌아오라고 몇 번이나 당부를 했다.

황금을 받은 장생은 곧바로 초왕을 설득하여 막내를 비롯한 죄수들의 사면을 허락 받았다.

장남은 이 소문을 다른 사람에게서 듣고는, 어차피 왕명으로 사면령이 내렸으니 그 많은 황금을 장생에게 준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장생의 집을 찾아 갔다.
장생은 장남이 찾아 온 속마음을 알고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 황금을 장남에게 되돌려주었다.

"못난 놈, 아비를 닮지 않은 아들이구먼. 사면이 나 때문에 내린 줄 모르는 옹졸한 놈이야. 그렇다면 나도 생각을 바꿔야지."

그는 궁궐로 들어가 초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시중에는 거부 도주공이 아들 구명을 위해 중신들에게 뇌물로 매수했기 때문에 전하께 사면을 요청하여 전하께서 사면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사옵니다. 이번 사면령은 결코 초나라 백성을 긍휼히 여겨 내리는 사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초왕은 진노하면서 도주공 아들을 사형에 처한 다음에야 대사령을 내렸다.

장남은 뜻밖에 막내가 사형에 처해진 것에 통곡하고 시체를 거두어 고국으로 돌아 왔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으나 범려만은 냉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미리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던 것이다. 장남은 범려가 가난할 때 태어나서 고생을 했기 때문에 재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알고 있었다.

"고생을 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은 돈을 중히 여겨 쓸 줄을 모른다"(見苦 爲生難 故重棄財)

그러나 막내는 부자였을 때 태어나 부요와 환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돈을 우습게 보는 것을 알고 범려는 막내를 보내려 했던 것이다. 막내라면 천금이 아니라 더 많은 돈을 장생에게 주고서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귀국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와 장남이 하도 반대하기에 큰애를 보내면서 둘째를 포기하고 관속에 담겨져 돌아 올 때만 기다리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가 아니냐며 아주 태연했다.

"만(滿)은 손(損)을 초래하고, 항룡은 회한이 있다"

그는 역(易)의 원리를 지켰던 것이다.

가득 차기 전에 몸을 빼고, 정상까지 올라가기 전에 몸을 뺀다. 이른바 명철보신 (明哲保身)이었다,

범려야 말로 노련한 지략가다. 그는 난세를 슬기롭게 이끈 지략가이면서도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재상의 자리도 내던질 줄 아는 혜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범려는 이런 말을 함으로서 토사구팽이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새가 없어지면 활이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 민첩한 토끼가 죽으면 좋은 개도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어 잡아먹히게 된다."

그는 안자가 말한 첫 번째 선비를 대표하는 최고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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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소설가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당선 문학과 창작 소설 당선 2017년 한국시문학상 수상 시집 <아님슈타인의 시>, <모르는 곳으로>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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