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기준 보장소득 프로그램에 참여중인 미국 도시들.
MGI
'파일럿'이라고 부르는 실험
유례없는 위기에 맞서기 위해 미국 정부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재정정책을 쓰고 있는 것도 과감한 보장소득 실험의 배경이다. 트럼프 정부만 하더라도 국내총생산(GDP)의 19.1%인 4조 달러, 바이든 정부는 한술 더 떠 6조 달러 지출을 결정했다(한국 정부는 지난해 GDP의 4.3%를 코로나 재정지출로 썼다).
재정은 인프라에 투자되기도 했지만 위기의 성격상 대부분 국민들에게 직접 현금으로 지급되었는데, 이런 현금지원 방식의 효과가 상당하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2021년 미국의 빈곤율은 아이러니하게도 2018년보다
훨씬 낮다.
미시간대 빈곤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자녀가 있는 가정 중에서 식료품 부족 호소가 42%, 가계 재정 불안이 43% 감소했고, 전체 가정에서는 불안과 우울감 호소가 20% 이상 줄었다. 재정을 사회간접자본이나 현물복지로 사용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특이한 것은 보장소득 제도를 '파일럿'이라고 부르는 실험 형태로 적용해본다는 점이다. 곧바로 제도를 시행하지 않고 굳이 따로 거액의 예산을 들여 실험을 하는 걸까? 이는 최근 사회과학의 트렌드인 '증거기반' 의사결정의 영향이 크다. 편향될 수 있는 이념과 가치로 정책을 결정하기보다는 과거의 데이터나 과학적으로 잘 설계된 실험의 결과를 기초로 실증적으로 판단하자는 생각이다.
특히 대규모 재정이 들어가거나 전례 없는 정책인 경우 실험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진다. 최근 한국에서도 경기도가 기본소득, 서울시가 안심소득 실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방향성이 잘못 설계된 실험이 오해를 낳는다거나 가치가 배제된 실증적 판단은 허상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지만, 현재로서는 경제적 효과를 계측하는 측면에서나 사업을 홍보하는 면에서 유용성이 더 부각되는 편이다.
보장소득은 기본소득일까
국내 언론들은 이번 시카고 실험을 '기본소득 실험'으로 소개하고 있다. 미국 언론에서 '보장된 기본소득(Guaranteed basic income)'이라는 표현을 쓰기 때문에 이를 직역한 기본소득이라는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국민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여러 유형의 정책들이 어떤 이념에 기초해 있는가와 결부된 문제로 그리 간단치 않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기본소득이 국민의힘 유승민 대선 경선 후보의 '공정소득'과 사촌 간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가 잘 지적했듯, 두 제도의 경제적 결과를 완벽하게 동일하게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장소득'의 연원에서도 잘 드러나는 측면이 있다.
보장소득은 그 뿌리를 토마스 모어, 토마스 페인의 아이디어와 프리드먼의 음의 소득세, 닉슨의 기획과 마틴 루터 킹의 제안에서 찾는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윤석열이 감명 깊게 읽었다는 그 밀턴 프리드먼과 인권운동가 그 마틴 루터 킹이다. 극단적 시장자유주의 전통과 미국 민중주의, 근대 사회계약론과 진보적 자유주의가 뒤엉켜 태어난 게 보장소득이다. 이들 각각은 기본소득과 공정소득, 안심소득류 아이디어의 모태들이기도 하다.
보장소득이 기본소득에 가깝냐, 아니면 음의소득세 류에 가깝냐 묻는다면 모두와 차이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말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모든 개인에게 동일한 금액을 지급한다. 음의소득세는 소득에 따라 개인에게 차등적으로 지급한다. 보장소득은 일정 금액 이하의 소득 가구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급한다. 기본소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세훈의 안심소득이나 유승민의 공정소득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따라서 미국의 보장소득운동을 '기본소득'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보장소득이 보편적 기본소득 형태로 확장해 나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이 시점에서 그냥 보장소득으로 구분해 부르는 것이 오해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