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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가 5천 가구에 월 60만원씩 주기로 한 이유

[해설] 미국 보장소득 실험의 맥락, 기본소득일까 아닐까

등록 2021.11.02 07:08수정 2021.11.02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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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풋 시카고 시장 ⓒ 연합뉴스


지난 10월 27일 미국 시카고 시의회가 저소득층 5천 가구에게 매월 500달러(59만 원)를 지급하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보장소득(Guaranteed basic income, GBI) 시범 프로그램을 의결했다. 총규모는 3150만 달러(370억 원)로 미 연방정부의 코로나19 구호기금으로 충당할 계획이다.

연간 소득이 3만 5000달러(4100만 원)에 미달하는 5천 가구를 무작위로 뽑아 조건 없이 2년 간 지급하는 방식이다. 이 실험은 지난해부터 미국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는 보장소득 실험 중 압도적으로 큰 규모다. 어떻게 이런 실험이 가능했을까?

코로나19 광풍이 미국을 휩쓸면서 실업률은 14.7%까지 치솟았고 경제활동이 둔화되면서 국내총생산이 1950년대 이후 가장 크게 감소하는 최악의 경기침체가 찾아왔다. 특히 유색인종, 비정규직, 여성, 고령자, 저소득자들은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발전된 국가 중에서 유별나게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던 미국 사회에서 이런 특징은 더욱 두드러졌다. 

취약계층의 타격에 대응하는 여러 시도 중 특히 주목을 받은 건 2019년 캘리포니아 스톡턴시의 보장소득 실험이었다. 마이클 텁스 시장이 주도해 무작위로 선발된 연소득 4만 6000달러(5400만 원) 이하 125명의 스톡턴 시민들에게 2년간 매달 현금 500달러를 지급해 삶의 변화를 관찰했다.

최근 나온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었다. 소득불안정성 문제가 크게 개선되는 것으로 나타났고, 참가자들의 우울과 불안이 줄었다. 비교를 위해 설정된 통제집단의 고용은 1년 동안 5%p 늘어난 데 비해 수급자들의 노동시장 참여는 12%p 늘었다. 

이 실험은 가난은 사람들이 무능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현금 부족 그 자체 때문이며, 일정한 현금을 정기적으로 조건 없이 지급하는 것이 빈곤 해결의 열쇠라는 생각을 강화시켰다. 그 결과 스톡턴 실험을 주도한 마이클 텁스 시장의 주도로 '보장소득을 위한 시장 모임(Mayors For A Guaranteed Income, MGI)'이 결성됐다.

현재 60명의 시장이 가입해 있으며 보장소득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곳은 27곳에 이른다. 민주당이 우세한 미국 동북 해안과 서해안에 집중되어 있다. 이번 대규모 보장소득 실험을 결정한 시카고에서도 이미 일부 카운티가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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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기준 보장소득 프로그램에 참여중인 미국 도시들. ⓒ MGI

 
'파일럿'이라고 부르는 실험
     
유례없는 위기에 맞서기 위해 미국 정부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재정정책을 쓰고 있는 것도 과감한 보장소득 실험의 배경이다. 트럼프 정부만 하더라도 국내총생산(GDP)의 19.1%인 4조 달러, 바이든 정부는 한술 더 떠 6조 달러 지출을 결정했다(한국 정부는 지난해 GDP의 4.3%를 코로나 재정지출로 썼다). 


재정은 인프라에 투자되기도 했지만 위기의 성격상 대부분 국민들에게 직접 현금으로 지급되었는데, 이런 현금지원 방식의 효과가 상당하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2021년 미국의 빈곤율은 아이러니하게도 2018년보다 훨씬 낮다. 미시간대 빈곤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자녀가 있는 가정 중에서 식료품 부족 호소가 42%, 가계 재정 불안이 43% 감소했고, 전체 가정에서는 불안과 우울감 호소가 20% 이상 줄었다. 재정을 사회간접자본이나 현물복지로 사용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특이한 것은 보장소득 제도를 '파일럿'이라고 부르는 실험 형태로 적용해본다는 점이다. 곧바로 제도를 시행하지 않고 굳이 따로 거액의 예산을 들여 실험을 하는 걸까? 이는 최근 사회과학의 트렌드인 '증거기반' 의사결정의 영향이 크다. 편향될 수 있는 이념과 가치로 정책을 결정하기보다는 과거의 데이터나 과학적으로 잘 설계된 실험의 결과를 기초로 실증적으로 판단하자는 생각이다. 

특히 대규모 재정이 들어가거나 전례 없는 정책인 경우 실험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진다. 최근 한국에서도 경기도가 기본소득, 서울시가 안심소득 실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방향성이 잘못 설계된 실험이 오해를 낳는다거나 가치가 배제된 실증적 판단은 허상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지만, 현재로서는 경제적 효과를 계측하는 측면에서나 사업을 홍보하는 면에서 유용성이 더 부각되는 편이다. 

보장소득은 기본소득일까

국내 언론들은 이번 시카고 실험을 '기본소득 실험'으로 소개하고 있다. 미국 언론에서 '보장된 기본소득(Guaranteed basic income)'이라는 표현을  쓰기 때문에 이를 직역한 기본소득이라는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국민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여러 유형의 정책들이 어떤 이념에 기초해 있는가와 결부된 문제로 그리 간단치 않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기본소득이 국민의힘 유승민 대선 경선 후보의 '공정소득'과 사촌 간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가 잘 지적했듯, 두 제도의 경제적 결과를 완벽하게 동일하게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장소득'의 연원에서도 잘 드러나는 측면이 있다. 

보장소득은 그 뿌리를 토마스 모어, 토마스 페인의 아이디어와 프리드먼의 음의 소득세, 닉슨의 기획과 마틴 루터 킹의 제안에서 찾는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윤석열이 감명 깊게 읽었다는 그 밀턴 프리드먼과 인권운동가 그 마틴 루터 킹이다. 극단적 시장자유주의 전통과 미국 민중주의, 근대 사회계약론과 진보적 자유주의가 뒤엉켜 태어난 게 보장소득이다. 이들 각각은 기본소득과 공정소득, 안심소득류 아이디어의 모태들이기도 하다. 

보장소득이 기본소득에 가깝냐, 아니면 음의소득세 류에 가깝냐 묻는다면 모두와 차이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말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모든 개인에게 동일한 금액을 지급한다. 음의소득세는 소득에 따라 개인에게 차등적으로 지급한다. 보장소득은 일정 금액 이하의 소득 가구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급한다. 기본소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세훈의 안심소득이나 유승민의 공정소득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따라서 미국의 보장소득운동을 '기본소득'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보장소득이 보편적 기본소득 형태로 확장해 나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이 시점에서 그냥 보장소득으로 구분해 부르는 것이 오해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기본소득, 음의소득세, 보장소득 비교 ⓒ 최기원


'○○소득'의 다채로운 양상

주목해야 하는 점은 사회의 맥락과 세계관에 따라 띄는 '○○소득'의 다채로운 양상이다. 만약 당신이 공동체의 모든 부에 모두의 기여가 있다고 믿는다면, 모든 부에 세금을 매기고 모두에게 동등하게 분배하는 기본소득 방식에 수긍할 것이다.

현행 복지의 비효율에 분개하고 양극화와 일자리 소멸로 자본주의 존속을 우려하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기존 복지를 대체하는 음의소득세 류가 어필할 것이다. 그 중간에서 구성원의 최소한의 소득보장을 목적으로 사회통합과 빈곤 해소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고 싶은 사람들은 보장소득에서 길을 찾을 수도 있다. 

결국 '○○소득'의 이름은 이 시대 사람들이 정의라고 믿는 형태에 가깝게 주조될 것이다. 그것은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일 수도, 안심소득이나 공정소득이라는 이름일 수도, 보장소득이라는 이름일 수 있다. 누구에게도 돈을 주지 않는 것이 나름의 정의인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정권심판이라는 포장지를 벗겨낸다면, 이번 대통령 선거는 바로 이런 사유들의 대리전으로 이해할 만하다. 사회의 부를 어떻게 거두어 나눌 것인지, 시카고는 역사적 한 발을 내디뎠다. 대한민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
#보장소득 #기본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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