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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뒤처지는 것 같을 때, '그림책'을 처방했습니다

느리게 성장해도 괜찮아... 그림책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가 안겨준 다정한 위로

등록 2022.02.27 19:59수정 2022.02.27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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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그림책에 빠져보니 '이 좋은 건 같이 해야 해!' 하는 마음에, 어른들을 위해 그림책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테라피를 배우고 모임을 열었다. 그러다 '나도 그림책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작년, 그림책 쓰기 강좌를 듣고 매일 아침마다 원고를 단 몇 줄이라도 쓰려고 노력하며 한 달에 한번 합평회에도 참석해 왔다. 하지만 그림책을 쓰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최근 합평회에서 30대 초반이 될까 말까 한 미혼 남성분이 아이에 대한 엄마의 마음을 쓴 원고를 읽었다. 이 원고는 출간 계약이 됐는데, 스케치에 올라가 있는 문장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났다. '어떻게 저런 글을 썼지?' 배가 아프고 한숨 나게 부러웠다. 이 일이 과연 노력으로 될 일인가, 내 재능에 의심도 들었다. 그날 밤, 떠오르지 않는 이야기를 붙잡고 씨름하는 꿈을 꿨다.


얼마 전 회사에 복직 인사를 다녀온 길이었다. 1년 공백에 제 몫을 할 수 있을지 염려하는 말에 쓴웃음을 짓다가 왔다. 그 사이 동료 직원은 상사가 되어 있었다. 일에서도 취미에서도 나는 더딘 사람이구나... 씁쓸한 마음이었는데 지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도 모르게 꾹꾹 눌렀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글쓰기에 잔뜩 힘이 가득 들어간 걸 귀신같이 들켰다. 다른 사람들은 다 성장하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 가슴속 가득했던 압박감을 단박에 꿰뚫어 본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남들과 비교하느라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계속해 보고 싶었다.

울고 싶은 날 날에 펼쳐드는 그림책 

이럴 때 그림책은 더도 덜도 아닌 딱 내게 필요한 위안을 건네고 용기를 준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제1호 한국인, 김보나 그림책 테라피스트는 자신의 그림책 테라피 모임을 마음의 약상자, 처방전이라고 표현했다. 나도 내가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날, 나를 도무지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순간, 나를 위해 그림책을 처방한다. 그날에 맞는 그림책 한 권을 펼친다.

오늘 같은 날이면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를 펼쳐 든다. 캐나다의 시인 조던 스콧이 유창성 장애로 인한 유년 시절의 경험을 쓰고, 케이트 그린어웨이 수상작가인 시드니 스미스가 그렸다. 말을 더듬는 한 소년의 아픔과 고독, 눈부신 성장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문장과 인물의 내면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섬세한 그림으로 전하는 그림책이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출판사 홈페이지의 홍보이미지. ⓒ 도서출판 책읽는곰


소년은 수많은 소리에 둘러싸인 채 잠에서 깨어난다. 하지만 소년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말할 수가 없다. 소리는 목 안에 달라붙어버리고 소년은 돌멩이처럼 조용하게 아침을 보낸다. 분절된 이미지로 표현된 소년의 모습은 제대로 말할 수 없는 그의 상태를, 의지와 현실이 분리된 속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소년은 발표 시간이 제일 두렵다. 선생님의 지목으로 교실 앞에 선 소년은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소년의 내부에서 소리와 빛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남들과 다른 소년의 입에만 주목하는 반 아이들 앞에서 소년은 울먹거린 것도 같다. 희뿌옇게 번진 이미지들은 눈물을 흘릴 때 눈앞에 보이는 풍경 그대로다.

소년을 데리러 온 아버지가 아들의 기분을 알아차린다. 그는 조용히 아들을 강가로 데리고 간다. 강가에 다다라 아버지는 소년에게 말해준다. "너는 강물처럼 말한다"고.

그 순간 소년은 흘러가는 강물을 본다. 그저 유유히 흘러가는 줄만 알았던 강물이 실은 굽이치고 부딪히고 부서져도 쉬지 않고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부드럽게 물결친다는 것도. 이내 소년은 말한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라고.

그 소년의 성장담이 가르쳐 준 것

이 그림책은 말을 더듬는 남과 다른 자신을 받아들이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시인의 아름다운 문장과 인물의 내면에 깊이 동화된 그림의 힘은 소년에게서 우리 자신을 보게 만든다. 아득한 소년의 시선에서 남들과 비교하며 초라해지는 나를 보고, 돌멩이 같은 침묵에서 머릿속 생각을 재빠르게 꺼내어 유려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내 문장의 답답함을 느낀다.

자연스럽고 유창한 자기표현을 부러워하는 마음에 쫓기며 비교에 급급한 나머지 놓치고 있는 건 없었을까? 말과 생각의 멈칫거림 사이에 머물러 있었던 마음의 소리는 얼마나 다양했던가? 보이고 들리는 것 너머, 다른 이의 마음과 내 마음속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제대로 말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소년의 말하기를 떠올리며 곰곰 생각한다.

이렇게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는 나와 타인, 나와-나 사이의 진정한 표현과 소통의 방식을 생각해 보게 한다. 소년이 말을 더듬는 것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간절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나의 그것에도 가만히 귀 기울여 본다. 머물러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더디고 서툴더라도 천천히 문장으로 바꾸고 글로, 그림책으로 만들어 나가보고 싶어 진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소년이 눈을 감고 강물 속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는 모습이다. 소년의 뒷모습, 그 가장자리를 따라 윤슬이 반짝인다. 소년의 표정은 평온하다. 두 손을 써서 책장을 활짝 펼쳤을 때 마주하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장면, 시인의 깊은 문장을 두고 작가가 고심 끝에 그려낸 그림. 이 그림을 통해 소년의 눈부신 깨달음과 성장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소년은 이제 더듬거리는 자신을 비웃는 반 친구들 앞에서 말할 것이다. 강물처럼 멈추지 않고.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홍보이미지 ⓒ 도서출판 책읽는 곰

 
이 장면에서 소년처럼 눈을 감는다. 빛으로 일렁이는 강물 속에 몸을 담그고, 흐름을 느끼며 헤엄치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 소란스러움이 가라앉고 편안해진다. 용기가 서서히 차오른다. 서툰 문장이 막힐 때, 원하던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아 마음이 쓸쓸할 때면 소년의 말을 되뇔 것이다.

"나를 둘러싼 낱말들을 말하기 어려울 때면 그 당당한 강물을 생각해요."

모든 성장은 계단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유난히 남들보다 한 계단에 오래 머물며 더디게 자신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남다른 고민을 가진 이들과 서툴거나 조금 다른 아이들을 둔 부모에게,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자주 스스로를 괴롭히고 상처받는 이에게 이 그림책을 펼쳐 읽어주고 싶다. 다정하고 따스한 비유로 당신을 북돋우는 그림책 한 권의 위안을 권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저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https://m.blog.naver.com/uj0102
https://brunch.co.kr/@mynameisred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조던 스콧 (지은이), 시드니 스미스 (그림), 김지은 (옮긴이),
책읽는곰, 2021


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
#나는강물처럼말해요 #조던스콧 #시드니스미스 #남다른고민을품은소년의눈부신성장담 #서툴고더딘모든이들에게건네는위안과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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