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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천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논문 쓰는 고등학생들... 잘못된 대학입시제도가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

등록 2022.05.09 06:06수정 2022.05.09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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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것으로, 이 교수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편집자말]
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변변한 논문 하나 써본 적이 없었습니다.

미국 대학원에 지원할 때 'writing sample'을 첨부하게 되어 있지만 기껏해야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을 번역해 보내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런데도 Princeton(프리스턴)은 물론 Harvard(하버드)에서도 합격 통지를 받은 건 엄청난 행운이었지요.

변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사실 그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수준이었습니다.

대학생활 하면서 논문을 쓴다는 건 거의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요즈음 우리 고등학생도 누워서 떡 먹듯 쉽게 하는 외국 저널에 논문을 게재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구요.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한 천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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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3학년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치러진 지난 4월 13일 오전 경기 수원시 수원고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런데 2000년대 초 대학입시제도가 바뀌면서 갑자기 고등학교에서 논문을 쓰는 천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논문들이 외국 저널에 게재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구요.

이런 천재들이 성장해 우리 학계를 이끌어 간다면 머지 않아 우리 학문의 수준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학계는 여전히 예전의 수준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논문을 척척 써내던 그 많은 천재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도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그런 천재들이 상당히 많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서울대학교 들어오려면 여간 화려한 스펙을 쌓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그렇다면 서울대 재학생들 중에는 고등학교 시절 논문 쓰기를 밥 먹듯 하던 사람들이 꽤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단언컨대 내가 지금까지 가르쳐온 학생들 중 나의 학생시절 혹은 입시제도가 바뀌기 이전 세대의 학생들과 비교해 월등히 천재스럽다고 느낀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내가 배출한 제자들 중 세계 학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꽤 있지만 그들은 거의 모두 이전 세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고등학교 때 논문 같은 것은 써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대학시절에도 그들이 논문을 써서 외국 저널에 실렸다는 건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논문 한 편 써낸 적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학자로 성장했습니다.

수시전형의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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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고교 3학년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실시된 4월 13일 오전 서울 송파구 가락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있다. ⓒ 연합뉴스

 
꽤 오래 된 일이지만 어떤 학부모로부터 고등학생인 자기 자식이 '경제학원론'을 저술했으니 감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일개 고등학생이 경제학원론 교과서를 저술했다니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일 아닙니까? 날고 긴다는 서울대 학생이 경제학원론을 공부하면서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어 애를 먹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데 말입니다.

당연히 그 요청을 단번에 거부해 버렸지만, 우리의 잘못된 대학입시제도가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더군요.

최근에는 이런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대학입시에서 고등학교 시절 논문을 썼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군요.

그렇지만 2000년대 초 수시전형이라는 새로운 대학입시제도를 도입했을 때 그와 같은 부작용이 당연히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 개인적 일을 말씀 드려 죄송하지만 새 입시제도 도입과정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었는데, 나는 회의석상에서 늘 그와 같은 문제가 일어나리라는 점을 강력히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수들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고등학생들이 논문을 썼다고 나서는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논문 쓴 것을 스펙으로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방침이 바뀐 것에 대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들의 욕심으로 억지로 만들어진 가짜 천재

물론 고등학교에서 논문을 쓰는 천재가 전혀 나올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2006년 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Fields medal(필즈상)을 수상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천재 수학자 테렌스 타오(Terrence Tao)는 12세 때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받았으며, 15살에 학문적 업적을 인정 받는 논문을 쓴 바 있습니다. 이런 천재라면 고등학교 시절 논문을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써낸다 해서 이상할 일이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고등학교 때 논문을 썼다는 친구들은 그런 천재가 아니고 부모들의 욕심으로 억지로 만들어진 가짜 천재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늘 말하지만 그런 쓸모없는 짓에 매달리게 하지 말고 아예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차게 만드는 것이 훨씬 더 교육적인 일이 아닐까요?

어린 학생이 스펙 쌓기의 정신적, 육체적 부담에 시달려 건전한 성장을 하지 못하는 사회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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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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