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1924, 언양·울산지역 소년운동 맹아기

일제식민시대 언양, 울산지역 소년운동사 (3)

등록 2022.07.12 09:33수정 2022.07.1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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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독립 만세운동의 경험으로 독립에 대한 열망이 고조돼 전국적으로 각종 지역 사회운동단체가 만들어졌다. 청년회가 만들어지고 그 영향 및 지도로 소년단(회)이 만들어졌다. 특히 1922년 5월 어린이날 행사 이후 전국적으로 많은 소년단이 만들어졌다. 1923년부터 24년까지 약 1년 사이에 식민지 조선에 130여 개, 1925년 4월까지 220여 개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언양청년회, 울산청년회, 병영청년회, 동면청년회 등이 창립되어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운동이 일어난 언양과 병영지역은 다소 위축적이었고 울산읍의 울산청년회는 활발했다. 언양과 병영은 만세운동 관련자가 출소한 1923년 이후 활동이 적극적으로 전환되었다.

울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립한 소년운동단체는 1920년 2월에 창립한 울산불교소년(소녀)단이다. 1921년 9월 11일 울산천도교소년회, 불교소년회, 기독교소년회 주최로 울산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축구대회가 열렸다. 우승은 천도교소년회에서 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울산지역 종교단체 소년회는 1921년 이전에 창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22년에 동면소년회(적호소년단), 1923년에 울산어린이회, 박애소년단, 학성소년회 등이 창립하였다. 울산면에는 162개 단체가 있었지만, 그 활동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울산 지역보다 늦게 영남산무리 마을인 언양 지역 주변에도 소년운동단체들이 1923년부터 창립되었다. 소년운동단체의 결성은 어린이날 행사가 경성(서울)에서 전국적으로 진행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언양 지역은 1923년에 중남소년학우회(중남소년단)와 언양소년회, 언양불교소년(소녀)회, 중남 신화조기단, 두서 우리학우회가 있었다.

1924년 삼동소년단, 중남소녀회가 활동하고, 1925년 언양소녀회가 활동했다. 1926년부터 두동 두서면의 구량소년단, 구서소년단과 인보소년단이 활동하고, 상북면 지역에는 상남소년단, 강산소년회(욱선소년회), 헌남소년단(하북소년단)이, 범서면에는 범학소년단, 중남면에는 중남유년회가 활동하였다. 언양 지역 일대에는 1920년대 17개 이상의 소년운동단체가 창립되어 활동 중이었다. 1925년에는 언양 지역의 소년운동단체의 결집체인 언양소년소년연합회가 7월 결성되고, 1926년 5월에는 언양소년소녀연맹으로, 1930년에는 언양소년동맹으로 발전하였다. 1930년 언양소년동맹 가맹 단체는 11개였다. 언양지역의 8개 면 지역에 1개 이상의 소년운동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울산 소년운동 단체가 결성되다

1920년대 울산의 소년운동은 당시의 신문자료를 보면 울산지역보다 언양지역의 보도량이 많다. 이것은 언양에 신문사 분국이 있었고 기자들이 상주한 결과이지만 또한 그만큼 사회운동이 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사료의 문제로 인해 울산 지역의 소년운동이 언양 지역의 소년운동보다 그 내용과 횟수가 적다. 사료상의 문제로 인해 소년운동사 역시 지역적 불균형이 있었다.


소년운동단체의 결성은 당시 지역의 보통학교, 강습소, 야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린이가 소년운동을 하려면 그에 대한 토대는 배움과 활동공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927년이 되면 울산은 1면 1개 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다음 표는 일제식민시대 울산 전체 지역의 소년운동단체, 강습소(주학) 와 야학 현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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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식민시대 울산 소년단체, 강습소, 야학 현황 -일제는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황국신민교육을 하였으나, 조선인들은 대부분 공립보통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 되어 강습소(주학)과 야학을 다녔다. 당시 소년단원들은 공보나 야학 출신들이 많았다. ⓒ 이병길

 
당시 소년 단체는 지역 청년회와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언양청년회, 울산청년회, 병영청년회 등 지역마다 청년회가 있었다. 청년회와 소년단체는 체육대회, 음악회, 강연회, 동화회, 가극회, 소인극회, 웅변대회 등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또한 무산노동아동을 위한 노동야학을 열어 보통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동에게 무료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야학은 보통 농번기를 피해 농한기 밤에 하였다. 당시 야학은 무산노동 아동을 대상으로 하였고 야학 강사도 지역 보통학교 출신의 청년들이 담당하고 지역 유지들의 기부로 운영되었다. 일제 식민지 지배가 강화되면서 국내 항일운동이 민족주의적 노선에서 사회주의적 노선으로 변화하는 것에 당시 청소년들도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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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울산청년동맹회관과 현재 울산삼일회관 -울산삼일회관은 일제식민시대 울산지역 항일운동의 공간으로 각종 사회단체의 창립과 야학, 유치원의 공간이었다. 도심 개발로 사라질 기회에 울산민예총 <2022도깨비난장>행사로 다소 새롭게 변모했다. 왼쪽 사진은 1932년 울산청년연맹회관(000동아일보, 1932.11.06.) ⓒ 이병길

 
현재 울산시립미술관과 옛 울산초등학교가 마주치는 지점에 삼일회관이 있다. 이곳에 울산 근대 항일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울산청년회관이 있었다. 당시 울산공보 북쪽 언덕에 1921년 11월 27일 울산청년회관 낙성식이 있었다. 건물을 짓는 데 우여곡절이 있었다. 3월 말께 건물이 절반 정도 지어졌지만, 의연금 부족으로 공사가 지연되기도 하였다. 총공사비는 6400여 원이었다. 1400여 원이 공사 후 부족액으로 남아 청년회 고문 김홍조(500원)와 김좌성(500원), 찬성원 오경호(200원)와 조임준(150원) 등의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김홍조(1868~1922)는 개화운동에 적극적인 울산의 선각자로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의 후견인이었다. 그는 구포은행 설립, 경남신문 창간, 삼산자동차 경영 등 사업을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하였다. 훗날 상해임정 의정원과 독립청원운동도 하였다. 김좌성(1878~1946)은 김홍조와 같이 울산지역 사회사업을 하였고, 울산농업학교의 건립, 성안동 백양사(白揚寺) 건립, 울산간이도서관 운영, 울산청년회관을 중수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울산의 거부로 일생평 소원이 "자선과 교육"이었다고 한다.

조임준은 1925년 울산청년회 운영 해영학원 기부 출연하는 등, 울산유치원 기금 출연, 야학 동회의숙 출연, 각종 의연금 출연하였으며 교육 독지가로서 유곡동 선일소년일단의 노동야학 창설 등을 하였다. 그는 1928년 언론에서 "우리의 공공사업이라면 반드시 많은 기부를 아니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씨로 말하면 원래 학문의 소양도 없고 더구나 적수성가(赤手成家)한 사람으로서 이와 같이 공공사업에 진력하며 또는 소작인들에게라도 항상 자선(慈善)하고 온순한 태도로 대함으로 군내에서는 씨를 모범부호(模範富豪)라고 칭송이 자자하다"라는 평판을 받았다.

울산청년회관 건물은 2중의 녹색 출입문이 있는 화려한 장식을 한 서양식 건물로 건물 바깥에는 실외 행사를 위한 정원도 있었다. 울산지역 청년의 기풍 교정, 덕육 함양, 실업 연구, 체육 발달의 목적 실현을 위해 조직된 울산청년회가 지은 청년회관은 학예회, 강연회, 창립회 등 각종 행사가 있었던 울산 사회, 문화, 예술 활동의 중심 공간이었다. 건물 안팎으로 8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적도 있었다.

울산노농동우회(1923.12), 울산혁신회(1925.3), 신간회울산지회(1928.3), 울산청년동맹(1929.6), 울산노동조합(1929.8), 근우회울산지회(1930.10) 등 울산지역 민족운동, 사회운동, 문화운동. 교육운동, 노동운동의 출범 장소이자 야학과 유치원 교육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울산의 항일·계몽운동의 상징인 울산청년회관은 1971년에는 건물 훼손이 심해 당시 고기업 울산읍장이 성금을 내놓고 시민들이 시멘트와 모래 등을 기부해 대대적인 보수를 거쳤다. 이때부터 '삼일회관(三一會館)'으로 불리게 됐다. 100년이 지난 울산 항일운동의 상징이 도심 재개발사업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 울산향토문화연구회와 사단법인 대한민국건국회 울산시지부, 그리고 자전거 수리·기부를 위한 사회적 기업 등이 입주해 있다. 역사는 기억하고 유물은 보전되어야 의미가 있다. 울산은 근대 유산이 거의 없기에 이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다시 생각해볼 때이다. 조선시대 유적의 복원이 아닌 근대 유적의 복원이 더 의미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1923년과 1924년에는 청년단체와 소년단체, 여성단체, 노동조합, 농민조합 등의 결성 및 활동이 신문 기사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사회주의의 영향과 함께 함께 농민단체나 노동단체 등 계급운동의 성격을 가진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단주연(斷酒煙) 동맹회나 사시회, 교풍회(矯風會) 등 개량주의 단체들도 만들어졌다. 각종 체육대회, 동화구연대회, 음악회, 가극, 연극 등의 체육 연예 활동도 지역에서 많이 치러졌다. 이를 통해 보면 1920년대 초반 언양시민의 주요 관심사는 교육을 통한 문맹 퇴치와 체육을 통한 신체 건강, 여러 단체의 사회운동 등이었고, 이 제반 활동의 지향점은 '새로운' 근대 사회 건설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20년대는 식민지 조선을 일제로부터 해방하려는 실력양성의 시대요, 민족해방운동의 모색기였다.

울산 최초 소년운동단체, 울산불교소년단 창립(1920.02)

일제강점기 울산에서 가장 먼저 창립된 소년단체가 울산불교소년소녀단이다. 소년단은 1911년 10월 창건한 통도사울산포교당(현 해남사)에 있었다. 1910년 한일강제합방을 당하면서 통도사에서 국민을 계몽하고자 전국에 33개의 포교당을 짓게 되는데, 그 중에 첫 번째로 세워진 곳이 통도사울산포교당이었다. 울산청년회관이 건립되기 전에 울산 포교당은 일제 식민시대 울산 사회운동의 구심적 공간이다.

울산불교소년(소녀)단은 1920년 2월경에 창립되었다. 울산소년단은 통도사 울산포교당에 한설고(韓雪皐) 포교사가 취임하여 청년 신도를 조합하여 현대적 포교법으로 일요 법회를 하면서 소년단을 조직하고 활성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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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사(옛 통도사울산포교당)와 양대응스님 -통도사울산포교당은 울산고등강습소와 여자야학 운영을 통해 지역 교육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 이병길

 
1926년 2월 24일 불교소년단 창립 제6주년 기념식 신문보도가 있다. 포교사 양대응의 강연과 단원들의 가극 공연이 있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참가 자격에 남녀 제한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1921년 불교소년단이 축구대회에 참가하고, 1923년 언양불교소년단과 1924년 언양의 불교소녀단이 창립한 것을 보면 소년단과 소녀단이 구분되었지만, 창립 행사를 같이한 것 일 수 있다. 창립 이후 불교소년·소녀단은 가극 공연, 탁구대회, 축구대회 등을 개최했다. 조선불교소년회는 1926년 6월 15일에 있었다. <불교> 제27호(1926년 9월호)에 따르면, 울산불교청년회가 포교사 양대응에 의해 1926년 7월 31일 창립하였다. 이것을 보면 울산불교소년소녀단 창립은 대단히 빠른 편이라 할 수 있다.

1921년 8월 13일 조선불교청년회 동래 범어사지회 순회연극단이 울산에 도착하였다. 오후 1시 울산청년 체육단과 축구시합을 하여 승리하고, 오후 8시 불교 포교당과 울산청년회 후원으로 가설극장에서 <석가일대기 팔상극>을 공연하였다. 700여 명이 관람하고 찬성금 50여 원이 모금되었다. 12시에 폐막하였다. 다음날 병영에서 저녁 8시 연극 공연하였는데 800여 명 관람하고 40여 원의 모금이 있었다. 당시 불교소년소녀단원도 관람하였을 것이다. 1921년 9월 11일 불교, 천도교, 기독교소년단이 모여 축구대회를 하였다.

1922년 8월 신문보도에 따르면, 그동안 지방의 문화향상에 적지않은 공헌이 있었던 울산불교소년단이 조직된 지 수개 년이 지났다. 울산불교소년단 수학여행단은 7월 26일 열차로 경주 석굴암, 불국사를 구경하고, 다음날 고물(古物)진열관과 기타 명소를 관람하고 경주 양무단과 축구시합을 하고 난 뒤 단장 한설고의 인솔에 따라 27일 돌아왔다.

한설고 포교사는 울산에 처음으로 소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실업학교 2학년 정도의 농과(農科)와 상과(商科) 교육 기관인 '고등강습회'를 만들어 1923년 5월 11일 학생 60명을 모집하여 개강식을 하여 울산 고등교육의 문을 열었다. 언양 석남사에서 운영 경비를 담당했다.

민중문화를 촉진하기 위해 통영청년단 활동사진대가 울산을 경주를 거처 9월 25, 26일 이틀간 울산청년회 이동가설장소에서 흥행을 하였다. 울산부인회, 울산인쇄소, 울산고등강습소 학우회, 울산불교소녀단 회원 등이 기부하였다. 기부금액은 울산청년회 노동야학회에 기부하였다. 이처럼 불교소년단원 각종 공연 관람, 체육행사 등을 통해 계몽인으로 성장하였다.

1924년 포교사 김혜광, 양대응이 부임한 후에 야학원을 설립하여 여자야학을 운영하였다. 양대응 스님(만우, 무홍, 1897~1968)은 1919년 3월 13일 통도사 신평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이었다. 구하 스님의 도움으로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20년 6월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를 창립하고 1922년 3월 26일 도반들과 함께 친일승려인 강대련(姜大蓮)의 명고축출(鳴鼓逐出)에 참여했다.

양대응은 이 사건으로 불법체포 및 명예훼손 등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이후에 통도사 울산포교사로 왔다. 울산에서 고등강습회와 야학교육활동을 하였다. 1925년 10월 24일 울산 해영학원의 주도하에 사립학교 연합대운동회를 기화로 12개소 사학의 교원 및 경영자들이 모여 교육민중화의 실현을 촉진하기 위해 울산사학회를 발기했다. 이들은 교수법의 통일, 교육원강습회 개최, 아동보건, 순회강연 개최 등을 결의했다. 이 당시 양대응 스님은 간사로 활동했다. 진주포교당 포교사로 있던 1938년 비밀항일운동결사체인 만당(卍黨)사건으로 체포되어 진주경찰서에 구금됐어 옥고를 치렀다.

1941년 통도중학교 학감으로 있을 당시 배일운동으로 일제에 고문을 당하였고, 광복 직후 1945년 10월부터 통도사 주지로 있었다. 스님은 염불과 독경에서 '조선의 1인자'로 알려졌고, 통도사 학춤을 인간문화재 김덕명 선생에게 전수했던 예술인이었다.

통도사 울산포교당 여자야학은 1924년 8월 17일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당분간 사정 때문에 사무소를 울산청년회관으로 이전하고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귀가한 유학생과 합하여 소년가극회를 26, 7일 양일간 울산청년회관에서 공연하였다. 1924년 10월 5일 강정동 기독교청년 우조단(江亭友助團) 주최의 소년목판정구대회(少年木板庭球大會)가 열렸다.

당시 남조선 일대에 스스로 만든 목판 라켓 정구놀이가 유행하고 있었다. 불교소년단, 천도교소년단, 병영주게단, 성남맹렬단(城南猛烈團), 기독교(강정)우조단 등 5개 단체가 참가하여 다수의 응원대가 참가하고 단기를 날리며 오전 9시에 입장하였다. 10시부터 시합을 하여 오전에 예선을 마치고, 오후 2시부터 결승전을 하여 불교소년단이 우승하였다. 가을비가 오는 가운데에도 불교남녀소년 수십 명은 우승기를 높이 들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오후 4시 30분에 폐회하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덧붙이는 글 울산저널에도 게재합니다.
#이병길 #울산 소년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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