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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비판 쏟아져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 52] "당신의 생명론이 거짓인 이유"

등록 2022.08.01 15:32수정 2022.08.0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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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명지대 강경대의 죽음 이후 학생들의 분신이 잇따르자 시인 김지하는 5월 5일 <조선>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는 글을 게재, 학생운동을 비판했다. ⓒ 조선일보PDF

 
담시 <오적>ㆍ<비어>와 인혁당 관련 필화에 이어 네 번째 필화였다.

앞선 필화사건이 관재였다면 이번 필화는 민재 즉 동지ㆍ민주세력에 의한 차이가 남는다. 그로서는 더욱 견디기 어려웠을 터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나의 제명을 결정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저희들이 무슨 소비에트 작가동맹이라고……

나에게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아내가 가로막고 나섰다. 아내는 걸려오는 전화마다 매섭게 쏘아붙였다. 욕하는 전화도, 통곡하는 전화도, 협박하는 전화도 있었다.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일단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강릉에 사는 나의 벗, 권혁구 형에게 가서 해변의 한 여관에 묵으며 한밤중에 새카만, 그러나 흰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끊임없이 몰려오는, 새카만 밤물결을 바라다보았다. 검은 물결들 위의 그 자그마한, 흰 물보라들!

그렇다. 강경대 군 사건의 책임 추궁과 함께 무엇보다 먼저 죽은 이들에 대한 예절을 찾아 챙기지 못했구나! (주석 6)

그에 대한 비판의 필봉은 매서웠다. 작가 방현석은 <김지하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지하, 지금 곧 거짓 생명의 굿판을 중지하라. 악마의 화술로 존귀한 생명을 모독하지 말라. 당신은 잘못갔다. 그것도 갈데까지." 라는 전제로 매섭게 비판했다. 한 대목이다. 


당신의 생명론이 거짓인 첫 번째 이유는 중대한 사실 하나를 은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소중한 생명의 존귀함을 유린하고 위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당신은 철저히 은폐ㆍ왜곡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그저 "존귀하다"고 외워두는 관념적 인생 행위가 아니라 존귀한 대접을 받도록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 실천 행위입니다. 실천적 노력뿐만 아니라 생명을 유린하고 위협하는 세력에 맞서 투쟁함으로써 생명의 존엄성은 온전히 지켜지는 것입니다. 생명이 함부로 유린당하는 현실을 방치하면서 입으로 되뇌어지는 것은 사치스런 관념의 유희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누가 인간의 생명을 유린하고 있는 지를 밝혀내고 그에 맞서 단호히 투쟁하는 것에 우선하는 생명운동은 없습니다. 지하, 당신의 생명론에서 빠져 있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지하, 대답하시오.
누가 동족 수천 명을 파리 목숨처럼 살육 했습니까.

그것도 '제 목숨이 아닌 남의 목숨'을, 우리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등 뒤에서 '생명론'이란 이름의 반생명적인 당신의 악선동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는 지배집단입니까. 백주대로에서 무방비의 학생을 쇠파이프로 내리쳐 죽이게 한 것이 누구입니까. 지하, 당신이 우리에게 물었듯이 최소한 당신이 지성인이라면 대답해보시오. 멀쩡한 대학생을 대공분실로 끌고 가 시체로 돌려보낸 게 우리입니까. 

당신은 생명말살의 근원을 은폐하고 오히려 생명말살 세력들의 학정에 비분하여 그 중단을 요구하며 죽어간 젊은이의 가슴 아픈 영혼을 향하여 공격의 화살을 겨누었소. 그리하여 당신은 '생명론'이라는 번드르르한 간판과는 반대로 근원적인 반생명세력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습니다. (주석 7)

민주화운동을 함께해 온 동아투위 소속 언론인 김종철의 <김지하 시인, 돌아오십시오>는 온건한 내용 속에 그의 변신을 아프게 꾸짖는 절실함이 묻어난다. 역시 한 부문이다.

그런데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습니다.

김 시인이 <조선일보>에 문제의 글을 발표한 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여러 차례 대책회의를 열어 마침내 "김지하씨를 이사직에서 해임하고 회원자격을 정지시키기로" 결의했습니다. 한 신문은 김 시인의 반응을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나는 작가회의에 회원으로 가입한 적이 없으므로 제명 결정은 나와 무관한 일이다. 그들은 민족지사들이고, 나는 민초일 뿐이다."

작가회의가 어떤 단체입니까? 74년 초에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으로 2백여 명이 군법회의에서 극형과 중형을 선고 받아 가족들이 피울음을 울어도 언론이 '난 모르쇠'로 일관하던 때 동아일보사를 비롯한 언론사의 젊은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을 한 데 호응해 문인들이 결성한 것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였고, 그 조직이 발전한 것이 민족문학작가회의 아닙니까?

그 문인들은 유신독재와 전두환 정권 때 갖은 탄압을 받고도 민족ㆍ민중문학의 이론을 다듬고 개발하며, 민주화ㆍ통일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제는 회원이 5백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고은ㆍ신경림ㆍ백낙청 선생을 비롯해서 김 시인의 문학적 선배이자 운동의 후배들 아닙니까? 그 5백여 명 가운데는 문학에서도 실천운동에서도 김 시인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가회의와 김 시인 사이에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단체가 제명을 하거나 당사자가 냉소를 하는 일 말입니다. (주석 8)


주석
6> <회고록(3)>, 221쪽.
7> <월간 말>, 1991년 6월호, 77쪽.
8> 같은 책, 35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지하 #시인김지하평전 #김지하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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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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