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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도 에어컨 없이 사는 법

내 몸도 쾌적하고, 지구를 위하기에 마음도 뿌듯하다

등록 2022.07.24 14:49수정 2022.07.2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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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실외기 ⓒ 픽사베이


에어컨이 고장 났다. 두 돌 된 막내 아이 낮잠을 재우고 얼음을 가득 채운 컵에 커피를 내려 식탁에 앉았는데, 에어컨 앞에 물이 흥건하다. 아기가 물을 쏟았나? 하면서 수건을 가져다 닦는데, 수도꼭지를 덜 잠근 것마냥 에어컨 속에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아래를 열어 보니, 위쪽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다. 바로 AS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더워진 날씨에 예약이 꽉 차 8월 2일에 방문이 가능하다고 했다.


달력을 다시 확인했다. 오늘이 7월 14일인데 8월? 3주나 에어컨 없이 버텨야 한다고? 한숨을 쉬며 에어컨 속에서 흐르는 물을 닦아 내다가 뜬금없이 얼음이 더 녹기 전에 커피를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입 안 가득 커피를 한 모금씩 물었다가 꿀꺽 삼키길 반복했다. 그러다 에어컨 없이 살던 때가 떠올랐다.

정작 더위에 익숙하지 않은 몸이 됐다

큰아이 태어나고 살던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전셋집에 에어컨을 달았다 떼었다 하는 일이 번거롭게 여겨졌다. 에어컨이 내뿜는 열기에 지구가 점점 더 더워지고 있으니 나는 거기에 보태지 않겠다는 나름의 큰 뜻도 있었다.

냉동실에서 젖은 손수건을 얼려놓았다가 꺼내 목에 감았을 때의 그 짜릿함이나, 얼린 물병을 수건으로 감싸 꼭 끌어안았을 때 온몸으로 퍼지는 그 차가운 감각이 살아났다. 찬물, 뜨거운 물 번갈아 가면서 샤워한 후 선풍기 앞에 앉으면 얼마나 시원했던가.

진짜 더울 땐 마트나 도서관으로 놀러 가 잠시 쉬었고, 에어컨 바람을 쐬기 위해 버스나 지하철을 타기도 했다. 집 가까이 있던 물놀이장이나 바닥분수에는 매일 발 도장을 찍었다. 돌이켜 보니, 더위도 아이들과 함께 놀이처럼 보냈다. 피하지 않고 직선으로 통과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뿌듯함 같은 것이 남았다. 밤 산책에서 맞는 선선한 바람이 선물이던 시간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놀다 집에 온 둘째 아이가 덥다고 성화다. "에어컨이 고장 났나 봐. AS 기사님은 8월 2일에 온대"라고 말하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럼 우리 이제 어떻게 해?"하고 되묻는다. 아이에게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라고 답하면서, 어찌할 수 없는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먹은 대로 몸도 같이 변하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몸은 더위를 버틸 준비가 덜 된 모양이었다. 에어컨 바람이 사라지자 내 몸은 뜨거워졌고, 더 뜨거운 아기는 계속 품에 안겼다. 샤워를 자주 해도 흐르는 땀을 이기지 못해 피부가 끈적였다. 이른 피서를 떠나야 하나 고민하는데, AS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7월 22일 오후 6시에 방문할 수 있겠다고 했다. 3주에서 1주일로 줄어드니 다시 해볼 만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후텁지근한 열기가 남아 있는 집을 나섰다. 선선한 밤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낮에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에어컨 없이 잘 지낸 때도 있었는데, 어쩌다 단 하루도 에어컨 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첫째 아이가 일곱 살이던 해에 이사 한 집에 천정형 에어컨이 있었다. 아이들은 우리 집에도 드디어 에어컨이 생겼다고 좋아했지만, 에어컨 없이 살았던 습관이 남아 있어 자주 켜진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워지는 것 같았고, 덩달아 에어컨을 켜는 시간도 길어졌다. 막내 아이를 낳은 후부터는 26도에 약한 바람으로 하루 평균 10시간 동안 가동하고 있었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내가 참는 게 얼마나 많은데 더위도 참아야 해?' 하는 뾰족한 마음이었을까. 아이가 셋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셋째는 나라에서 다 키워 준다면서요?"하는 말에 '아이 셋이라고 나라에서 해 주는 건 고작 전기세 30프로 할인뿐인데 그거라도 써먹어야지!' 하는 보상 심리 같은 거였을까. 여름 더위 잠깐인데, 하면서 에어컨을 쉽게 틀었다. 잠깐이라서 버티던 시간을 지나 놓고, 이제는 잠깐이라서 괜찮다 하고 있었다.

에어컨 없이도 그럭저럭 살 수 있습니다

민소매로 바꿔입고, 짧은 반바지를 꺼내고, 창문을 열어 맞바람이 들게 하고, 손수건을 적셔 냉동실에 넣었다. 물병 몇 개도 같이 얼렸다. 집이 1층이라 한낮에도 어둑해 항상 불을 켜두었는데, 그마저도 뜨거운 것 같아서 꺼버렸다. 반찬을 만드느라 어쩔 수 없이 불 앞에 서 있어야 할 땐 한 번씩 냉동실 문을 열고 10초간 냉기를 쐰다.

에어컨 작동을 강제로 멈추고 가족들도 각자 더위에 덜 지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남편은 당분간 밤 10시까지 야근을 하고 와야겠다고 웃으며 말하더니, 정말 일이 많아져 늦게 온다. 둘째 아이는 시원한 에어컨이 켜진 도서관에 가기 시작했고, 큰아이는 적게 움직여야 덜 덥다며 선풍기를 끌어안고 가만히 누워 유튜브를 본다.

막내 아기는 수시로 적신 손수건으로 닦아주니 오히려 땀띠가 적게 오르는 것도 같다. 고양이들은 동물적 감각으로 우리 집 바람길 명당을 찾아 그 자리에 눕는다. 일주일 동안 에어컨 작동을 멈추고 알게 된 건 에어컨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럭저럭 살 수 있다는 것.

아직 체온을 넘는 더위가 시작되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 에어컨을 조금 덜 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어컨 수리를 받은 다음에도 같은 마음일지 장담할 순 없지만, 내게는 쾌적한 몸만큼이나 뿌듯한 마음도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그만큼은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에어컨 고장 #무더위 #더위 이기는 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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