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엄마, 고기 안 먹는 날이잖아" 초등생 딸의 비건 선언

고기를 좋아하던 아이의 놀라운 변화.... 비건은 지향점, 불완전해도 괜찮습니다

등록 2022.09.11 18:57수정 2022.09.11 18:57
12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열두 살 딸이 이번 여름방학 때 동네 독립서점에서 하는 생명행동권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동물의 서식지보존, 생물 다양성에 대한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아이디어를 모아 영상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그 프로젝트 덕분에 아이도 나도 환경 관련 서적을 찾아 읽게 되었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 공장식 축산에 문제가 많다는 것과 도축할 때 동물들을 잔인하게 죽인다는 것.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깊이 알고 싶지 않았고 그 문제를 회피하고 싶었다. 여러 책 중 <나의 비거니즘 만화>를 보고 나니 완전 채식을 하진 않더라도 내 삶이 비건을 지향점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기 안 먹는 날, 불고기를 식탁에 냈더니
  
a

나의 비거니즘 만화 아이와 함께 읽은 나의 비거니즘 만화 ⓒ 김지은

 
2007년 이후 10년 동안 세계연간 육류 소비량은 1.9% 증가했는데 이는 인구 증가 속도보다 거의 두 배나 빠른 것이라고 한다. 축산업은 지구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14~18%를 차지하고 이산화 질소의 65%를 배출하는데 이 기체는 지구 온난화에 끼치는 영향이 이산화탄소보다 296배 높다고 한다.

채식은 환경을 위한 효과적인 실천인 것이다. 마음이 불편하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순 없다. 가장 큰 걸림돌은 내가 요리를 못한다는 것이다. 고기는 그냥 굽기만 하면 되는데. 고기가 없으면 과연 내가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까. 데우기만 하면 되는 간편식이나 밀키트도 고기가 들어간 제품이 많다.
 
최대한 지속가능한 목표를 생각했다. 일주일에 하루, 고기를 먹지 않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책 표지를 딱 덮고 선언하듯 딸에게 말했다.

"매주 목요일은 고기 먹지 않는 날로 하자. 그건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그럼. 매주 목요일은 고기 먹지 않는 날."


그렇게 신중히 생각해 결심했건만 그다음 목요일, 깜박하고 불고기를 볶았다. 볶는 도중 목요일이란 걸 알았지만 '이미 볶은 걸 어쩔 거야' 하고 상에 냈다. 합기도 수업을 마치고 온 아이가 배가 고프다며 손만 겨우 씻고 후다닥 달려와 상 앞에 앉았다. 반찬을 쓱 훑더니 말했다.

"오늘 목요일이잖아. 고기 안 먹는 날."

아이 얼굴에 아무 표정이 없다. 아니다, 약간 날 무시하는 표정... 아니, 실망했다는 표정이었나. 어쨌든 난 머쓱해졌다. 아이는 고기를 한 점도 먹지 않고 된장국을 떠서 밥에 슥슥 비벼 먹고는 다 먹었다며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가 잊었을 줄 알았는데 잊지 않았다.
 
그 다음 날, 아이는 비건을 선언했다. 완전 비건은 아니고 고기만 먹지 않겠다고 했다. 책을 보니 아이처럼 생선, 달걀, 유제품까지는 허용하는 채식주의자를 '페스코'라고 했다. 아이는 자기 결심을 나타내려는 듯 백종원 레시피를 찾아 부추전을 부친다. 난 옆에서 순두부찌개를 끓였다.

그날 이후, 매 끼니마다 샐러드를 챙기게 되었고 간식은 손쉽게 에어프라이어기에 돌려먹을 수 있는 치킨 너겟이 아니라 오이 스틱이나 찐 단호박, 쑥인절미 등을 준비했다. 아이는 고기만 먹지 않겠다고 했는데 전반적인 식단이 건강식으로 가고 있다.
 
a

부추전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당일, 아이가 만든 부추전 ⓒ 김지은

 
친구들에게 우리 딸의 결심을 말하니 아이가 이기적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건 성인이 되고 나서 하라고 해. 고생은 요리하는 엄마가 다 하고 있는데."
"맞아, 고기 안 먹이면 뭘 먹이니. 게다가 성장기인데! 안 된다고 해!"


우리 아이가 이기적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이다. 집에 오며 생각했다. 분명히 난 많이 불편해졌는데 왜 불만이 없을까. 왜 아이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답은 금방 나왔다. 내가 하고 싶었지만 미처 하지 못했던 일,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일을 딸이 대신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딸에 기대어 나도 예전보다 훨씬 고기를 적게 먹고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는다.

'동물들이 불쌍해서' 채식을 한다는 딸아이
 
아이는 개학을 했고 이제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온다. 학교 급식에는 매 끼니 거의 고기가 포함되어 있다. 아침마다 점심 메뉴를 확인한다.

"엄마, 큰일 났어. 오늘은 점심이 간장치킨볶음밥이야."
"어머, 너 어떻게 할래?"
"어쩔 수 없지 뭐. 먹어야지."


하교한 아이에게 물으니 억지로 먹고 조금 남겼다고 했다. 비건을 위해 급식 메뉴를 다양화 해야 한다는 뉴스를 그저 흘려들었는데 그게 내 일이 될 줄은 몰랐다. 개학한 이후 아이는 본의 아니게 육류를 먹지 않는 '페스코'가 아니라 채식을 지향하나 때에 따라 육류와 생선을 먹는 '플렉시테리언'이 됐다.
 
이제 딸은 친구들과 패스트푸드점에 가도 어니어링만 먹는다. 고기를 좋아하던 아이가 이렇게 변할 수 있는지 엄마인 나도 신기하다. 아이에게 단백질이 부족할까 봐 열심히 생선을 굽고 두부와 계란 반찬을 차린다. 유부초밥도 밥과 두부를 섞어 만든다. 혹시 몰라 영양제도 샀다.
 
얼마 전, 핫도그의 빵 부분만 벗겨 먹는 아이를 보고는 웃음이 나서 말했다.

"하하하. 그렇게까지 해야겠니?"
"나 비건이잖아. 소시지는 못 먹지만 빵은 맛있단 말이야."
"얘, 비건은 고기뿐만 아니라 우유도 계란도 버터도 해산물도 다 안 먹는 거라고!"
"아냐, 비건은 지향점을 말하기도 해."


"뭔 소리야?" 하고 혼잣말을 하며 다시 책을 뒤적였다. <나의 비거니즘 만화>를 보니 비거니즘이란 일종의 '삶의 태도'이며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을 '비건'이라고 한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불완전한 실천이라도 의미가 있다는 걸 강조했다. '분리수거',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동물 실험하지 않은 제품 소비', '육식 줄이기'도 모두 그 범위 안에 포함된다고 했다.
  
a

<나의 비거니즘 만화> 뒷표지 비거니즘, 비건에 대한 설명 ⓒ 김지은

 
불완전한 실천이라도 의미가 있다는 말이 따뜻하다. 불완전 실천도 괜찮다면, 일주일에 3, 4일 정도는 아이를 따라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난 그제야 아이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데 너 진짜 왜 비건을 하려는 거야?"
"동물들이 불쌍하잖아."


간단했다. 언제까지 아이가 결심을 이어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뭔가 결심하고 그걸 실행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부 요리와 계란, 생선 돌려막기를 하느라 지쳤는데 찾아보니 맛있는 비건 제품들이 많다. 비건 도시락, 비건 주먹밥, 비건 김밥, 비건 카레. 새로운 비건 제품을 찾아가며 맛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a

식물성 재료로 만든 비건 주먹밥. ⓒ 김지은

 
혹시나 환경이나 동물 복지에 관심이 있어 비건을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불완전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귀하다고.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비건 #페스코 #채식주의자 #나의 비거니즘 만화
댓글1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3. 3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4. 4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5. 5 용산에 끌려가고 이승만에게 박해받은 이순신 종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