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다산인권센터 창립 30년] 다산인권센터, 그곳에서 함께했던 시간들

등록 2022.09.27 13:16수정 2022.10.11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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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인권센터는 올해 30년을 맞이하여, 달려온 시간을 되돌아보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기록작업입니다. 다산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는 전·현직 활동가, 다산의 활동과 만났던 시민들이 필진으로 참여하여 다산인권센터와의 인연, 활동의 의미에 대해 기록할 예정입니다. 이 기록을 오마이 뉴스를 통해 다양한 시민들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현재 남해군 상주면에 살고 있다. 수원에서 360km나 떨어진 곳이다.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인권단체인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의 삶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이주해온지 올해로 8년째. 2015년 9월 단체를 떠날 당시 함께 활동했던 동료 활동가들에게 양해를 구하긴 했으나 동료들에게는 '폭탄선언'으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바짓가랑이 붙잡진 않았으니 여전히 미안하다.

다산인권센터의 인권운동 30년 역사에서 고작 4년의 시간을 보냈던 내가 감히 축하의 말, 조언의 글을 쓸 수 있겠나. 다만, 한 명의 벗바리(후원회원)로 여전히 함께 하고 있고, 인권운동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다산인권센터에서의 내 경험과 기억을 소환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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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인권상담소 다산인권센터는 1992년 김칠준, 김동균 합동법률사무소 한켠 다산인권상담소로 첫발을 내디뎠다. ⓒ 다산인권센터

 
다산인권센터와의 인연은 꽤 오래됐다. 90년대 학생운동 시절부터 연행이나 구속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문을 두드렸던 곳이 다산인권센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다산인권상담소'였기 때문이다. 1992년 김칠준, 김동균 변호사가 수원지방법원 앞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면서 노동 사안과 법률지원활동을 시작한 게 그 시작이었다.

지역의 학생 운동가들, 노동운동가들, 철거민들이 수도 없이 잡혀갈 때 부리나케 연락하고 달려가는 곳이 바로 다산인권상담소였다. 그 상담소가 변호사 사무실에서 '다산인권센터'라는 인권단체로 독립한 해가 2000년. 그 해 나는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수원의 작은 환경운동단체 활동을 시작한 때였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다산인권센터가 발행한 '팩스신문'이었다. 일주일간의 인권소식을 빽빽이 담아 언론사를 비롯해 팩스가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발송하는 신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신문 발행을 위해 활동가들이 밤을 새워가며 글을 쓰고 편집하는 모습이 딱하기도 했고, 멋지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팩스 신문은 인권운동사랑방의 '인권하루소식'이 먼저였고, 주간도 아닌 '매일' 발행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들을 했는데, 누가 먼저 어떻게 시작했던 간에 '인권활동가'의 이미지는 그런 헌신적인 모습, 그 자체였다.

다산인권센터와 본격적인 연을 맺은 활동은 아마 '수원반전평화연대' 활동으로 기억하고 있다. 수원공군비행장내 미군의 열화우라늄탄 논란과 함께 이라크 파병문제까지 이어지면서 지역사회에서 반전과 평화의 목소리를 모아내는 활동을 전개했다.

내가 일했던 환경단체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수원역 광장에서 '길바닥 평화행동'을 진행하면서 다산인권센터 활동가들과 점점 깊은 관계를 맺어나갔다. 수원반전평화연대 뿐만 아니라 지역의 무슨 대책위만 구성되면 빠지지 않는 단체가 다산인권센터였다. 하긴, 이 세상에 '인권사안'이 아닌 문제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수년 동안 지역에서 함께 연대활동 차원으로 만나던 다산인권센터를 2011년 마흔살 새내기 활동가로 들어갔다. 사건만 터지면 성명서 쓰고, 대책위 구성하고 기자회견하고, 현장에 달려가 인권침해 피해자 인터뷰와 농성을 하게 되면 농성장 지킴이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래도 부족했고, 해결되지 못한 사안들이 많았다.

굵직굵직한 사안들은 정부와 국회를 움직이지 못하면 결국 바위에 계란치기. 국가보안법폐지 투쟁,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싸움이 그랬고, 쌍용차 싸움이 그랬다. 밀양 주민들의 송전탑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바위에 계란이라도 제대로 던지기 위해 무던히 애썼고, 이기고 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의 피해 당사자들, 그들과 연대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일상과 피해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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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촛불집회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 집회를 시작으로 박근혜 퇴진 촛불까지 약 10여년동안 수요일마다 수원역 앞에서 촛불집회를 진행했다. ⓒ 다산인권센터

 
2008년 MB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수원촛불은 지역 인권운동의 새로운 전환의 계기였다. 시민단체 중심의 대책위 활동을 넘어 다양한 시민들과 함께 사회적 의제를 말할 수 있는 광장을 수년간 열었다. 그 중심에 다산인권센터가 있었다.

그 힘으로 지역운동의 전망을 함께 모색하는 '지역운동포럼'을 기획하고, 개별 활동가, 개별 조직들의 답답함을 함께 풀어보려 노력했다. 정답을 쥐어 짜내기보다 스스로와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들이었다. 그 질문들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지만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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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역에서 진행된 세월호 촛불집회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 집회를 시작으로 박근혜 퇴진 촛불까지 약 10여 년 동안 수요일마다 수원역 앞에서 촛불집회를 진행했다. ⓒ 다산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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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지역운동포럼 다산인권센터는 지역의 주요 의제와 이슈들을 다루는 지역운동포럼을 진행했다. ⓒ 다산인권센터


내가 다산인권센터에서 활동했던 때 20주년 행사를 치렀다. 그 때가 2012년. 현재 상임활동가들의 말을 들어보니 10년의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인권운동 방향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재정 상황은 10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안정적인 사무실도 구해야 하고, 활동가들의 활동비도 빠듯한 상황. 하지만 차별과 혐오에 맞서 '인권에는 양보가 없다'는 비타협적인 자세도 변하지 않았기에 언제나 희망적이다.

9월 24일 서울에서 기후정의행진이 진행됐다. 차별과 혐오에 맞서 양보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 다산인권센터를 만날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길바닥에서 다시 만났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창립 30년을 맞이한 다산인권센터에서 공간이전과 활동비 마련을 위한 후원 모금을 진행한다. (https://dasan30th.modoo.at/)

글쓴이 소개 : 안병주는 다산인권센터 전 상임활동가로 현재 남해군마을공동체지원센터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산인권센터 #인권 #창립30년 #수원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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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에는 양보가 없다는 마음으로 인권활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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