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요리를 좋아한다. 따로국밥으로 유명한 도시를 고향으로 두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육개장 국물은 물론이고 칼국수 국물, 어묵탕의 국물까지도 좋아하다 못해, 아주 사랑하는 지경이다.
"오늘은 외식하자, 뭐 묵고 싶노?"
"할매 곰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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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겨 먹는 '할매 곰탕' ⓒ 김혜원
밖에서 조리된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게, 눈치를 보며 외식을 제안하는 남편을 향해,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국물요리를 선택해 외치는 나다. 곰탕이 안 된다면 우리 지역의 유명한 따로국밥 집을 차선으로 택하는 데 일말의 주저함이 없다.
"외식하면 쫌 비싼 거 무라. 맨~날 곰탕 아이믄 따로국밥이고."
남편의 타박을 30년 가까이 들으면서도 국물을 향한 내 사랑은 멈출 줄을 모른다. 국물 음식이 한국인의 만성적 위장병을 불러온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누가 짬뽕이나, 설렁탕 한 그릇 하자는 얘길 건네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국물 요리(육개장, 곰탕, 김치찌개)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찌개국물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누룽지를 끓일 때도 국물을 좀 넉넉하게 잡아서 밥알을 퍼먹기보다는 훌~훌 국물을 들이켜는 걸 선호한다. 해서 "그렇게 하다간 국물도 없어!"라는 말조차 그게 설혹 농담일지라도 싫어하는 티를 내곤 한다.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국물을 애정 하는 여인이 되었나.
인생 국물
정확한 시기를 단정할 순 없지만, 이 국물 사랑의 기원은 아마도 술맛을 제대로 알고 마시기 시작한 대학 1학년 가을쯤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제 막 수습 딱지를 떼고 학보사 문화부 기자의 삶을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살아가던 나는, 일주일 내내 취재와 기사 쓰기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다 인쇄소에서 마지막 조판을 끝내고 o.k 사인이 나고 나면, 우르르 선후배 동기 기자들 할 것 없이 인근 중국집으로 몰려가서 먹던 술(막걸리에 가끔은 고량주), 거기에 짬뽕국물이 더해지곤 했었다.
이 둘(술과 짬뽕국물)은 원래 그렇게 짝지어지도록 태어난 것처럼 기가 막힌 궁합을 자랑했다. 얼큰함과 얼큰함이 만나, 스러져가는 육신을 일으켜 세우는 힘을 매번 발휘했다. 단점이 있었다면 이 마법에 휘말려 배가 부른 줄도 모르고, 취해가는 줄도 모르고, 아저씨 여기 짬뽕국물 추가요! 술도 한 병 더요!를 쉼 없이 외쳤다는 거.
가난했던 청소년기의 나는 중국음식을 자주 먹지 못했기에, 일주일에 한 번 무상으로 제공되는 이 기름진 술자리가 매번 넘치도록 반가웠다. 사실은 막걸리 한 잔이면 벌써 홍조를 띠는 얼굴이 되면서도 따라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지금 와 생각해보니 짬뽕국물을 조금이라도 더 먹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술이 훑고 내려가 서늘해진 곳곳을 데워주며 다시 술 한 잔을 불러내는 것이 바로 짬뽕국물이었으니까. 뼈와 살 사이 빼곡하게 숨어 있는 외로움이나 낮게 드리워진 일상의 고초까지 은근하게 감싸주던 것 또한 짬뽕 국물이었으니까. 술 때문였는지, 일주일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지워가는 시간의 기억 때문였는지 확실치는 않다. 지금도 그때의 짬뽕 국물을 능가하는 인생 국물을 만나지 못하고 있음은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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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물 음식엔 사람을 녹진녹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 최은경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지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매운 음식을 먹고 위로의 전환점을 찾는 사람들처럼 나는 뜨거운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좀 더 젊었을 때는 무서우리만치 매운기가 도는 국물이었고, 나이가 조금씩 찰수록 맵기와 짠기를 뺀 국물로 옮겨갔다. 하지만 국물 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국물 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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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물의 뭉뚱그리는 능력을 경외한다. 갖가지 재료를 품어 하나의 맛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힘. ⓒ 최은경
국물 음식엔 사람을 녹진녹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삼복더위에 보양을 할라치면 삼계탕 속의 푸짐한 닭고기를 먹어야겠지만 기어이 그 국물에 만 찹쌀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어야, 왠지 몹시 부자가 된 느낌이 들면서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상태가 되곤 한다. 내게로 온 국물의 마법이다. 삶이란 것에도 정직하게 규격화된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이렇게 국물을 닮은, 질퍽하게 풀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희한하게도 차가운 국물은 또 별로다. 냉랭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위장을 비롯한 여러 장기관에 찌르르한 기운을 전달하는 그 순간을 참지 못하겠다. 아무튼. 삶을 긍정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짬뽕국물에 소주나 막걸리를 만나는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그 귀한 시간의 위로가 송두리째 없어진다면, 그게 더 슬퍼질 거 같긴 하다. 밍밍한 누룽지를 끓인 국물이라도 있어야 지난한 삶을 훌~훌 마시듯 견뎌낼 수 있을 테니까.
국물의 뭉뚱그리는 능력을 경외한다. 갖가지 재료를 품어 하나의 맛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힘. 국물에는 고단한 일상을 보듬는 능력도 있다. 따뜻한 국물요리를 먹고 난 후엔, 아주 잠시지만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니. 흔히 쓰는 '속을 데워준다'는 표현은, 아마도 시린 가슴까지 따스하게 만져준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추운 겨울, 뜨끈한 국밥 한 그릇 훌훌 불어가며 먹고 나면 온몸의 세포들이 서서히 풀어헤쳐지는 느낌을 종종 받곤 하는 데, 이 또한 국물의 힘 아닐까.
앞으로의 내 남은 날들은 명징한 주제를 지닌 건더기보다는 조금 희미해지더라도 본성은 잃지 않는 국물에 가깝게 살고 싶다. 그 어떤 이에게든, 그 어떤 사실에게든 스며들고 스며들어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따뜻하면서도 정형화되지 않은 사람. 태어날 때의 원형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 진하게 농축된 국물 같은 사람.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 수십 년 동안 먹어 온, 앞으로도 먹어갈 그 국물의 내재된 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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