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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위령탑' 청소, 무슨 사연?

창원유족회 위령탑 청소하는 이정석씨 "부친 부끄러움 씻기 위해"

등록 2022.10.28 09:14수정 2022.10.2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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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석(67)씨가 창원마산에 세워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추모 위령탑'에 거의 매일 빗자루로 청소하고 있다. ⓒ 창원유족회

 
대빗자루를 들고 거의 매일 창원마산에 세워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추모 위령탑(아래 위령탑)을 청소하는 사람이 있다. 이정석(67, 월영동)씨가 그 주인공으로, 그는 쓰레기를 줍고 떨어진 낙엽을 쓸기도 한다. 

마산합포구 가포동 산73번지에 있는 위령탑은 창원특례시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회장 노치수)가 세웠고, 오는 11월 26일 제막식을 앞두고 있다.

위령탑은 지난 9월초 조경을 마무리 했으며 이씨는 모습이 어느 정도 갖춰질 때부터 청소를 해왔으니, 그 기간만 해도 3개월 정도다. 창원유족회도 이씨가 아침마다 위령탑을 청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가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창원시와 계약 등을 맺은 일도 없는 이씨는 남몰래,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아침마다 위령탑을 살펴온 것이다. 

노치수 회장은 "매일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분이 계신 줄 몰랐다. 엊그제 유족회 한 분이 지나가다가 보고서 알게 되었다"며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지 물어봐도 말을 하지 않는다. 창원유족회 회원도 아니다"고 말했다.

27일 오후 이정석씨에게 전화를 걸어 물으니 처음에는 "아무 사연 없다. 위령탑 가까이에 사는데 운동하러 나왔다가 앞을 지나게 된다. 지난 봄부터 공사를 하고 있어 유심히 봤고, 거의 끝나갈 무렵부터 빗자루를 들고 나와 청소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인근에 낚시하는 사람과 행인들이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특히 주말에는 더 그렇다. 세워 놓은 위령탑이 잘 관리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청소를 하고 있다"는 말만 했다.


거듭 재차 물었더니 그는 "마음이 아프다"면서 "나이 일흔살이 다 되어 가는데, 저 정도 나이가 되는 사람들은 집안마다 다 아픔이 있는 거 아니겠느냐"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 아침에도 쓸고 왔다. 빗자루로 청소하고 오면 기분이 좋다. 비석에 적힌 글자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함부로 그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못할 것인데... 청소를 해놓으니까 쓰레기를 덜 버리는 것 같더라"고 하면서 "자랑할 일도 아니다"고 했다.

그런데 28일 새벽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왔다. 이씨는 선친과 관련한 사연을 이야기했다.

"선친이 한국전쟁 전에 철도역무원으로 일하다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적이 있다고 들었다. 조부께서 당시 창원군 상남면장으로 계신 덕에 풀려났다고 하더라.

그때 같이 끌려간 철도노조원들은 모두 학살당하였다고 들었다. 선친께서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시면 이승만 정권의 손에 죽은 동료들에게 늘 죄스럽고 미안한 심사를 토로하곤 하셨다."


그러면서 이씨는 "매일 아침 위령비 앞에 대빗자루를 돌고 서면 저도 똑 같은 마음이 된다"고 했다.

그는 "비문에 적혀 있는 '감씨'로부터 시작하여 '황씨'로 끝나는 520분의 신위가 새겨진 위령비 앞을 혼자 살아남은 제 부친의 부끄러움을 씻기 위해 방바닥처럼 깨끗하게 쓸고 싶다. 제 팔과 다리에 기력이 남아 있는 한"이라고 했다.

이를 전해 들은 노치수 회장은 "매일 그것도 아침마다 위령탑을 살피고 쓰레기 청소를 하기가 쉽지 않는데, 사연이 있건 없건 정말 고맙다"며 "위령탑 제막식 때 초청을 하고 싶고, 조만간 식사라도 대접을 해드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희생자 아픔과 눈물을 형상화, 높이 5.6m"

한편 창원유족회는 창원시, 창원시의회, 열린사회희망연대,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부마민주항쟁기념대잔, 경남민예총 등 단체의 후원으로 위령탑 제막식을 겸해 '추모제'를 연다. 이날 행사에는 서울과 부산지역에 사는 유족회원을 위해 차량이 운행된다.

한국전쟁 전후 창원(마산)지역에서는 민간인 2300여명이 재판도 받지 않고 군경에 의해 학살 당했고, 특히 국민보도연맹원 등 1681명은 1950년 7~8월 사이 '괭이바다'에 수장됐다. 위령탑은 괭이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

진실화해를위산과거사정리위원회(1기)는 2010년 진상규명과 함께 위령사업을 권고했다. 높이 5.6m인 위령탑은 창원시 예산 2억 5000만원을 들여 희생자들의 아픔과 눈물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세워졌다.

위령탑 빗돌에는 희생자 명단이 빼곡히 새겨져 있고, 노치수 회장이 쓴 '무죄-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면서'라는 제목의 건립취지문도 있다.

진실화해위는 결정문을 통해 "국민보도연맹 혹은 인민군에 동조할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적법한 절차 없이 예비 검속한 민간인이 살해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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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특례시 마산합포구 가포동 산73번지에 세워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추모 위령탑. ⓒ 창원유족회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추모위령탑 #창원유족회 #창원특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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