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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앞장섰던 이윤정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추모] 광주YWCA에서 일하며 5.18 참여... 암투병 중 향년 68세로 별세

등록 2023.02.27 13:17수정 2023.02.2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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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윤정 선생님. ⓒ 김동규


지난 26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YWCA 사회문제부 간사로서 광주항쟁을 주도한 여성 중 한 명이었던 이윤정 선생이 향년 6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장례위원회에 따르면 이 선생은 전날(25일) 오전 11시 20분께 병원에서 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프시다는 소식을 얼마 전 듣고 연락드리고자 했으나, 이제 그럴 수 없게 됐다.

나는 고인을 생전에 뵐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첫 만남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공동저자 전용호 선생과 현 5.18 진상규명조사위 부위원장인 안종철 박사가 주선한 자리였다. 그날 이윤정 선생에게 5.18을 포함한 당신의 생애사를 들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고인은 1955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전남여중, 전남여고를 졸업한 후 광주 동부교회 백영흠 목사를 통해 사회운동과 연을 맺었다. 백 목사는 광주YMCA의 초대 재단 이사장이었고, 1980년 5월 26일 계엄군의 광주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지역인사들이 진행한 '죽음의 행진' 참가자이기도 했다.

이윤정 선생에게서 들은 그의 생애사... 80년 5.18 그날의 기억

이후 이윤정 선생은 1978년 11월 광주·전남의 여성 활동가들이 조직한 송백회에 참여한다. 고인의 표현에 따르면 '광주·전남 최초의 민주여성단체'인 송백회에는 교사, 간호사, 노동자, 주부, 청년운동가 등 진보적 사회의식을 가진 여성들과 민청학련 사건 구속자 가족 등 80여 명이 참여했다. '소나무처럼 푸르고 잣나무처럼 곧게 이 사회를 위해 헌신하자'는 뜻을 지닌 송백회는 1978년 함평농협의 고구마 수매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함평 고구마 사건' 당시 광주에서의 저항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북동성당에서의 단식농성과 광주YWCA에서 북동성당까지 이어진 가두시위에 함께했다.

1980년 3월, 이윤정은 광주YWCA 사회문제부 간사가 된다. 훗날 5.18 마지막 수배자가 되는 합수 윤한봉 선생이 추천했다. 광주YWCA 사회문제부는 여성 노동운동가들을 지원했다. 고인은 당시에는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만연해 있었고, 노동3권은 당연한 듯 보장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민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해 활동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교양 강의를 시작으로 각종 교육을 했다.

1980년 5월 18일에도 광주YWCA에서는 강연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강연은 긴장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강연이 끝나고 토론이 진행되던 차에, 이윤정 선생은 문득 트럭이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곧 창밖에서 군인들이 청년들을 목덜미 잡고 끌고 가는 광경이 목격됐다. YWCA에 있던 시민들은 계엄군에게 욕설 세례를 받은 후 해산당했다. 그러나 이내 광주 시내를 오가며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윤정 선생은 앞서가던 시민이 곤봉에 맞고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선생은 그날부터 10일간 이어진 광주항쟁에 참여했다. 광주YWCA는 구 전남도청, 광주YMCA와 더불어 시민들의 항쟁지도부가 됐다. 특히 진실을 알리는 홍보 관련 일이 YWCA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곳의 등사기를 통해 인쇄된 인쇄물들이 시민들의 손을 타고 광주 전역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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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회보 제6호, 제7호 ⓒ 김동규


이윤정 선생은 생전, 당시 1980년 5월 22일 날 구 전남도청 구름다리 아래에서 목격했던 시신들의 모습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검게 변한 시신들의 모습이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당시 이 때문에 시신에 대한 예우가 논의됐고, 상무관에 분향소가 마련됐다. 송백회 회원들은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검은 리본을 제작했고, 염을 하는 등 어려운 장례 일을 도맡아 했다. 부상자를 파악하고 취사팀을 꾸리기도 했다.

5월 26일,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됐다. 매일 한 번씩 개최되던 궐기대회가 이날은 오전, 오후 두 번 열렸다. 오후 집회가 끝난 후, 시민들은 시내를 한 바퀴 돌며 결의를 다졌다. 이후 YWCA 강당에서 마지막을 준비했다. 그 자리에서도 역시나 수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누군가로부터 더 이상의 희생은 안 된다며, 총을 내려놓고 후일을 기약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때 이윤정 선생은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같은 해 있었던 (정선) 사북 사태 등을 이야기하며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도청과 YWCA와 YMCA 건물에 남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 후, 윤상원 열사가 YWCA 회의 참석자들의 결의를 모아 외신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기자회견을 마치며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억할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윤상원은 다음 날 새벽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980년 5월 26일은 이 땅의 역사에서 가장 긴 밤이었다고 이윤정 선생은 기억했다. 그는 당시 YWCA에서 일하던 박용준 열사와 함께 YWCA에 남았다. 전남도청, YWCA, YMCA는 광주시민들의 최후의 항전지였다. 이윤정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시민들이 모금해 준 돈 중에서 만 원, 이만 원을 꺼내 옆을 지키던 박용준 열사에게 건넸다고 한다. 당시 송백회 활동가들은 모금 일도 함께했다. 박용준은 "누나, 나는 이거 필요없어요. 나는 오늘 밤에 죽을 건데"라고 답한 후 밤새 유서를 썼다고 한다.

잠시 후, 도청항쟁지도부에서 여성투사들을 대피시키자는 결정이 있었다. 이윤정은 새벽 2시를 넘긴 직후 동료들과 함께 인근 교회로 갔다. 잠시 후 계엄군이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민 수백 명이 체포되거나 사살됐다. 전남도청에서 7명, YWCA에서 2명의 여성이 마지막까지 그곳을 사수하던 중 체포됐다. 이윤정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낸 박용준 열사는 그날 새벽 머리에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오월운동의 최전선에 있던 그... 당당한 그 모습 그대로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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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윤정 선생이 5.18 당시 간사로 활동한 YWCA 옛터. ⓒ 김동규


항쟁 직후 광주를 점령한 계엄군은 항쟁 주동자들을 상무대로 연행했다. 여성 활동가들은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직후부터 두 곳에서는 고문과 가혹행위가 이뤄졌다. YWCA 인사들 역시 줄줄이 구속됐다. 조아라 회장과 이애신 총무가 구속되었고 이윤정 간사는 신군부에 의해 전국에 지명수배돼 2년간 수배생활을 했다. 광주YWCA는 이때의 여파로 회관 건물에 손상을 입어, 신축회관을 준공해 이전했다. 이윤정 선생이 일했던 광주YWCA 옛터에는 5.18사적비만 남았다.

이후 이윤정은 늘 오월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5.18광주민중항쟁 동지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고, 1991년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에는 초대 광주광역시의원으로 당선돼 오종렬, 안성례 의원과 함께 3대 재야의원으로 불렸다. 그러나 임기 만료를 앞두고 통일운동을 위해 일본에 방문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고인은 열리우리당 등 민주당계 정당에서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최근까지는 오월민주여성회 회장과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맡아 활동했다.

늦은 나이에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 결과 50대 후반이던 지난 2012년 조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5.18 당사자가 사회가 정해둔 일반적 시각보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 박사학위까지 받은 것이다. 이윤정 선생을 처음 뵌 날, 그는 본인을 조선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그의 생애사를 듣기 전날에, 앞서 언급한 안종철 박사에게 선생의 증언 기록을 받아 읽어봤다. 그 기록의 이름은 '우리 여성도 항쟁지도부였다'였다. 제목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5.18의 '주체'였던 여성들이 과연 그 위상에 걸맞은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됐다. 묘사하기도 두려운 방식으로 유명을 달리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작 항쟁의 주체였던 이들의 이야기는 많이 듣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주체였던 그들은 정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역사 속에서 은폐된 이들이 됐다.

고인의 개명 전 이름은 이행자였다. 5.18 직후인 1980년 6월 신군부가 배포한 수배전단에 광주YWCA '이행자'의 이름이 올라있기도 하다. 5.18 당시 마지막까지 싸우자고, 당당하게 목소리 냈던 고인을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자 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덧붙이는 글 [참고자료]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광주여성들, 이렇게 싸웠다. 고정희(월간중앙, 1988. 5)
구술생애사로 본 5.18기억과 역사- 송백회 편(5.18기념재단)
#5.18민주화운동 #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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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해 고민하며 광주의 오늘을 살아갑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주세요'를 운영하며, 이로 인해 2019년에 5·18언론상을 수상한 것을 인생에 다시 없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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